[충북일보] 대학 적립금이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청주대학교가 김윤배 전 총장 재임기간에고려청자 등 고가의 유물을 13억원 어치나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유물매입 규모가 도내 다른 대학에 비해 과다하고, 또 '순수 교육용으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시각이 뒤따르는 등 여러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본보가 확보한 관련 자료에 따르면 청주대 박물관은 지난 2010년 10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4년 동안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 13억 4천만원 어치의 유물 10점을 외부로부터 구입했다. 종류별 유물구입 가격은 청자흑백상감국화문병 1억 5천만원, 청자음각모란문주자 1억 4천만원(이상 2010년 10월), 청자음각연화문유개사이호 1억 5천만원, 백자청화모란문병 4천 3백만원, 백자투각파초문필통 5천 7백만원(이상 2011년 10월) 등이다. 이밖에 2012년 10월에는 청자상감베개를 3억 5천만원, 청자화형잔탁 4천만원, 경자자 주자본 강목 1억원을 구입했고, 2013년 10월에는 청자상감모란당초문매병을 2억 5천만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6천만원에 매입했다. 청자상감베개가 3억 5천만원으로 최고가를 기록한 가운데, 1억원이
[충북일보] 곽재기(郭在驥, 1893-1952)는 충북 청주 출신으로 만주 길림에서 조직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1920년 비밀리에 권총과 폭탄을 국내로 들여와 조선 총독을 처단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을 무력적 방법으로 파괴하려는 이른바 '밀양폭파사건'의 주도자로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다곽재기는 1893년 충청북도 청주군 강외면 상봉리(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상봉리) 75번지에서 아버지 곽신엽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현풍, 자는 경(敬)이며, 이명으로 김광삼(金光三)과 김재만(金在萬)을 사용하였다. 그는 백부인 곽지엽에게 입양되어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경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의 경신학교 졸업 여부는 명부가 소실되어 확인되지 않으나,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이곳에서 김규식, 안창호 등에게 철저한 민족의식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귀향한 곽재기는 1907년 청주 청남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청남학교는 청주지역 유지인 방홍근, 김태희, 김원배 등이 1904년 광남학교(廣南學校)로 개교하였다가 청남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청주
[충북일보] 조선 조정은 왕실이나 국가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경우 도감과 의궤청 등 2개의 임시기구를 설치했다. 도감은 행사를 총괄 집행하고 의궤청은 말 그대로 의궤를 제작했다. 의궤는 후세를 위해 행사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과 인원, 의식절차와 행사 후의 논상(論賞) 등을 기록해 놓은 책을 일컫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궤는 어람용, 의정부, 예조, 사고(史庫) 보관용 등 5~9부가 제작됐다. 영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 만든 의궤도 존재하고 있고, 현재의 명칭은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이다. 이 의궤는 우연찮게 발견됐다. 충북도 문화재계와 청원군청은 지난 1981년 영조 태봉과 관련된 석부재가 일제 감정기에 파괴된 채 산 아래 계곡에서 나뒹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때 당시 청원군 낭성면 무성리 태봉마을 이장인 이상린씨가 "집안에 내려오는 가보"라며 다락에 있던 고전적을 보여줬다. 영조태실 의궤는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봤다. 의궤에 의하면 △가봉에 사용된 석부재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현암에서 채석됐고 △공사는 1729년(영조 5) 9월 12일에 시작해 그해 10월 15일에 종료됐다. 그리고 이때 충청도관찰사는 도내 각 군현에 인력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
[충북일보] 충북 증평군과 충남 천안시가 조선중기의 문인이자 독서광인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 서로 자기 지역에서 출생했다고 주장, 논란이 일고 있다. 현재 증평군은 증평읍 율리에 좌구산휴양림을 개장하고 또 인근에 김득신 문학공원을 만드는 등 김득신 묘가 있는 율리 일대를 휴양과 역사탐방의 공간으로 집중 조성하고 있다. 나아가 인근 삼기저수지 둘레길에 김득신 소개글과 독서광과 관련된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김득신을 증평이 배출한 최고의 문인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행정력을 투입하고 있다. 증평군은 이와 관련해 '부제학 김치의 아들로 증평(옛 청안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증평읍 율리 밤티마을 좌구산 자락 아래에 그의 묘가 있다'라고 서술, 증평 출생설을 기정 사실화했다. 군은 그 근거로 △아버지 김치(김시민장군 양자)가 청안현에 수년간 머문 적이 있고 △그 시기에 아들 김득신에 태어났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반면 천안발전연구원 산하의 천안학연구소(소장 심재권 나사렛대 교수)는 백곡집 등 그가 남긴 글을 바탕으로 '김득신=천안 출생설'을 주장하고 있다. 연구소측은 그 근거로 △호가 백곡(栢谷)이고 △김득신 시에 백곡 근처의 복구정(伏龜亭
[충북일보]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2인자 였던 이기붕(李起鵬·1896-1960)의 출생지는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가 맞고, 또 그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증조부 이회정(李會正·1818-1883)의 몰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네이버 인명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대부분의 사전은 이기붕의 출생지를 서울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에 비해 중원대 이상주 박사 등 괴산지역에서는 구주소로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 299번지'가 출생지라고 주장해 왔다. 이와 관련해 본보가 1960년 4.19혁명 당시의 각종 자료를 검색한 결과, 동아일보가 이기붕의 출생지와 가계를 장문으로 기사화했고 이는 사실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29일자는 '李起鵬씨의 人生航路' 기사에서 '만송 이기붕씨는 4229년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그의 할아버지 李錫宇 진사가 몰락된 권속을 이끌고 낙향한 곳이었다. 그는 7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고난많은 어린시절을 보냈다'라고 보도했다. 이보다 하루 앞선 4월 28일 새벽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장남 이강석(李康石·이승만의 양자)은 경무대에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충북일보]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가들이 "만약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그가 재위 24년 동안 보여준 개혁과 대통합 그리고 민본(民本) 정치는 분명히 봉건왕조 조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정조의 민본정신은 그가 생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백성을 '만천'(萬川)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만천을 비추는 명월(明月)로 생각했다. 이처럼 정조는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다가가는 지고지순한 왕정을 추구했다. 정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회만 생기면 궁궐 밖으로 행차를 했다. 1백회 이상을 기록한 그의 행차는 백성들의 민원을 집적 현장에서 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던 호문(好文) 군주답게 《홍재전서》( 弘齋全書)라는 시문집을 184권 100책의 방대한 분량으로 남겼고, 제 19~25권에는 그가 생전에 지은 제문이 실려 있다. 이중 제 21권에는 1728년 무신란 때 청주읍성에서 희생된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 영장 남연년, 비장 홍림 등을 추모하는 글인 '삼충사 치제문'이 들어 있다. 먼저 이봉상에
[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
전국 지자체들 사이에 이른바 '미선나무 마케팅'이 붐을 이루고 있다. 자생지를 3곳이나 갖고 있는 괴산군이 지난 3-5일 미선나무 축제를 개최했다. 옥천군은 군서면 재건산에 분포하고 있는 미생나무 자생지에 대해 천연기념물 지정을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미선나무는 유명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다.# '미선'은 아름다운 부채라는 뜻일까 많은 사람들이 미선나무 할 때의 '미선'을 한자 '美扇', 즉 '아름다운 부채'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이때의 미선은 '꼬리 尾'와 '부채 扇 ' 자를 쓰고 있다. 사극을 보면 궁녀 2명이 임금 좌우에서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미선'으로, 미선나무는 그 열매가 미선과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 잘 자랄까. 국내 산림학자들이 전국 미선나무 자생지 5곳에 대한 지형과 토질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미선나무는 '경사가 다소 심한 돌밭'에서 가장 잘 식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수목원 이병천 박사 등은 얼마전 발표한 논문에서 △미선나무는 돌이 구르는 전석지(轉石地·일명 너덜지대)에서 잘 자라고 △그 경사도는 평균 20-45도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즉 미선나무는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