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오늘부터 농암(聾菴) 유수원(柳壽垣·1694-1755)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로운 주제이지만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과 정치·사회적인 흐름이 연결돼 있다. 그는 조선후기 이용후생(利用厚生) 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우서》(迂書)라는 실학서를 남겼다. 유수원은 호를 '농암', 즉 귀머거리라고 지을 정도로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충추 출생, 단양·문의현감 역임 등 우리고장과 큰 인연을 지니고 있으나, 지역 차원의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수원의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이다. 그는 형조정랑을 지낸 유성오(柳誠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유상재(柳尙載)이고, 아버지는 유봉정(柳鳳延)이며, 어머니는 김징의 딸이다. 이처럼 유수원家는 명문사족의 DNA를 지니고 있었으나, 문제는 당색(黨色)이 소론 그 가운데서도 준론(峻論)이라는데 있었다. 서인은 숙종대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노장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소장파인 소론으로 분화됐다. 이후 소론은 다시 영조에 강경했던 준론(혹은 준소)과 완론(완소)으로 나뉘었다. 유수원은 충청도 충주목에서 유봉정의 맏아들로 출생했으나 유년기는 한양에
[충북일보] 여울[riffle]은 하천 바닥이 작은 급경사를 이루어 물의 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여울의 하천바닥은 주로 굵은 조약돌이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 충주를 떠나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던 비숍의 배도 여울을 만났다. "밧줄이 끊어지고 배가 돌면서 빠르게 급류의 밑까지 떠내려갔으며 배와 승객 및 장비에 파손을 입혔고 때로는 제멋대로 떠내려가기도 했다."- 비숍의 배가 어느 여울을 만났는지 분명치 않으나 충주~청풍 사이에 위치했던 황공탄(惶恐灘)일 가능성이 높다. 황공탄은 이름 그대로 '두렵고 공포스런 여울'이라는 뜻이다.(그림참조) 『여지도서』(1765)는 "성난 물결이 힘차게 내뿜으며 흐르고 매우 위험한 형세가 된다. 본토박이들이 말하기를, 물밑은 모두 너럭바위인데 두서너 곳은 가마솥처럼 돌이 파여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수장됐다. 비숍의 배는 서울을 떠난지 10일만에 지금의 제천시 청풍면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청풍에서는 객사건물(한벽헌)과 한벽루(寒碧樓·보물 제528호)가 유명했다. "그곳은 그럴듯해 보이는 작은 도시로 거기에는 높고 하얀 의자가 초들이 놓여진 탁자를 향해 있고, 마루 탁자
[충북일보] 연병호(延秉昊, 1894~1963)는 증평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193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기까지 20여 년을 국내와 중국 관내, 만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으며,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신한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 연병환 역시 독립유공자이며, 형의 딸 연미당과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 또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곧 연병호는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 형 병환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현재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부친 연채우(延彩羽)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곡산이고, 호는 원명(圓明)이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형편은 겨우 빈농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의 선대가 도안면에 세거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이다. 연정은 부친이 죽은 후 어머니 상산 김씨의 친정인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이 후 안동 김씨와 결혼하면서 처가인 도안으로
[충북일보]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의 연인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23살의 짧은 삶을 산 그녀는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 △한국 부강(구 충북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시)에서의 생활(1912∼1919) △박열과의 만남과 동거(1922) △관동대지진 때 치안법 위반으로 체포(1923) △천황 암살혐의 추가(1924) △옥중 자서전 집필 시작(1925) △박열과 옥중 결혼(1926)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목을 메 자살(1926.7) △박열 고향인 경북 문경읍 팔령리에 유골 안장(1926, 11) 등의 생애 마디를 지니고 있다. 이 가운데 부강에서의 7년 생활은 그녀 특유의 반항적 기질, 조선인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 무장 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사학계는 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그녀의 옥중 수기인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원제: 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를 바탕으로 부강 7년 생활을 재조명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모두 버림받았던 무적자(無籍者) 후미코에게는 미리 입국해 부강에서 생활하고 있던 할머니와
[충북일보] 영조 39년(1763) 이번에는 내륙이 아닌 섬 제주도에서 이른바 '심내복(沈來復) 역모사건'이 발각됐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심내복, 조영득(趙榮得), 유동혼(柳東渾), 이익좌(李翼佐), 윤몽정(尹夢鼎), 신정관(申正觀) 등 십 수 명이 결탁,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심내복은 과거 답안지에 역모의 글을 적어낸 심정연의 조카이고, 경술년 사건으로 흑산도에 유배된 심익년의 아들이다. 경술년 사건은 무신란 사건과 관련에 그 잔존세력이 또 다시 국문을 받고 절도 등으로 유배된 사건으로 당시 아버지 심익년은 흑산도로, 아들 심내복은 제주도로 유배됐다. 심문 과정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장사치로 위장시켜 바다를 건너가서 먼저 호남의 고을을 습격하고 거기에서 군기와 군량을 취득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묘사(廟社)를 범하여 불을 지르고 귀양가 있는 종신 이훈(李壎)을 추대키로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서두에 거론한 인물은 대부분 연좌죄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온 인물들로, 이중에는 신정관이라는 이름도 보인다. 그는 1728년 무시란 때 이인좌에 의해 충청병사에 임면된 신천영(申天永)의 조카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른바 '연불만지율'(年不滿之律)이라는 법이
[충북일보] 70년전 꼭 그해, 충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945년 8.15 광복으로 36년간 잃었던 국권을 되찾으면서 도하 각 신문지면은 흥분과 희망으로 넘쳐났다. 당시 충북과 관련된 내용으로 새 조선 건설을 위한 식량 확보, 자치치안유지회 조직, 미 군정청 충청북도 지사대리 임명, 귀국한 김구 예방 등이 기사화됐다. 이밖에 충북출신 임정요인 귀국, 한국광복군 명부 발표, 조선국군준비대 충북사령부 구성 등의 내용도 보도됐다. ◇ 새 조선 건설을 위한 식량 확보 매일신보는 광복 이틀후인 1945년 8월 17일자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자료를 인용, 당시 식량 사정을 이례적으로 기사화했다. '16일 현재로 각도 창고에 확보되어 있는 식량은 전부 1백2만3천8백76석이나 된다. 그러므로 일반은 조금도 불안한 생각을 가지지 말고 지도자를 신뢰하여 새 조선 건설로 동포된 지성을 받쳐야 할 것인데….' 당시 보도는 사회불안을 잠재우겠다는 의도로, 그해 8월 충북에는 5만1백70석으로 비치돼 있었다. ◇ 자치치안유지회 조직 제천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관내 유지들이 회합했다. 매일신보는 이에 대해 8.15라는 특수상황 속에서도 제천의 민심이 극히 안온하고 일사불
[충북일보] 비숍이 탄 배는 서울 마포나루를 떠난지 3일째 되는 날 경기도 마재[馬峴]라는 곳에 도착했다. 마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대로, 지금은 다산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각선 방향으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가 위치하고 있다.(지도 참조) 비숍도 이 사실을 기록했다. '우리는 마재라는 마을 앞의 분기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북쪽 지류가 내려왔고 남쪽 지류는 남으로부터 흘러오고 있었다.(…) 두 지류 사이에는 진달래꽃으로 핑크빛이 된, 숲이 우거진 예쁜 섬이 하나 있었다.'- 비숍은 섬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나, 정황상 두물머리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뱀섬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팔당댐 건설로 미니 섬이 됐으나 당시에는 숲이 존재할 정도로 제법 면적이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숍은 마포를 출발한지 닷새째되는 1894년 4월 19일 경기도 여주에 도착했다. 그녀는 관련 자료를 사전에 숙지한 듯 여주를 '전 왕후(명성황후 지칭)가 태어난 곳'이라고 서술했다. 비숍이 명성황후에 대해 왜 '전 왕후'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충북일보] 충북도의 도계 조형물과 행정 안내판이 충북 이미지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고, 광역과 기초단체의 위계도 고려돼 있지 않는 등 개선점이 매우 많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전국의 각 광역단체와 기초단체는 행정경계가 되는 도로 지점에 지역 이미지를 형상화한 조형물과 행정 안내판을 설치, 운전자 편의제공과 지역을 홍보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도계에 설치된 조형물과 행정 안내판은 해당 지자체의 '첫 인상' 내지 '첫 이미지'가 된다는 점에서 중시돼 왔다. 그러나 충북도계 조형물의 경우 △'고드미'-'바르미'가 주는 메시지가 모호하고 △광역-기초단체 간에 위계가 고려돼 있지 않으며 △그리고 일체(一體)가 아닌 따로따로 세워지면서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충북도의 고드미와 바르미는 "곧고 바르게 개척해 나가자는 다짐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도 스스로 밝히고 있다.(사진 참조) 그러나 도계 조형물은 지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대외 홍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자기 스스로의 다짐을 조형물 이미지와 명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광역과 기초단체의 조형물이 같은 장소에 따로따로 설치돼 있는 점도 적지 않은
[충북일보] 정태희(鄭泰熙, 1898∼1951)는 충주 출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22세의 젊은 나이에 임시의정원 의원직에 임명된 이래 약 13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부 간사, 참사(參事) 등 주요직임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유일당운동에 참여하여 민족협동전선을 이끌기도 하였다. 1933년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기까지, 정태희는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좌우 진영을 넘나들며 조국의 독립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독립운동가였다.충주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길로 정태희는 1898년 충주시 노은면 문성리에서 부친 정낙중(鄭樂中)과 원주 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이고, 호는 계운(桂雲)·백양(白洋)을 사용하였다. 그는 충주간이농업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하였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후에 독립운동가로 저명한 류자명이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는 류자명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19년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간 3·1운동은 충북지역에서도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충주지역에서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3천명이 넘는다고 하였다
[충북일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역모의 글을 써내다.' 이 희대의 사건은 나주괘서 사건이 정리된 영조 31년(1755)에 발생했다. 그것도 임금 영조가 친림하여 과거를 보는 가운데 발생, 당시 조정에 엄청난 충격파를 안겨줬다. "임금이 바야흐로 친림하여 시사(試士)하는데 한 시권(試券)이 처음에는 과부(科賦)를 짓는 것처럼 하다가 그 아래 몇 폭에다가는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를 썼는데 모두 난언패설이었다. 고관이 앞으로 나와 그 글을 진달하니, 임금이 열어 보기를 명하였는데…."- 인용문의 시권은 과거시험 답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날 과거에서는 시권 뿐만 아니라 역모의 내용을 적은 상변서(上變書)도 함께 발견됐고, 이 내용을 본 영조는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또 위소(衛所)의 하리(下吏)가 시권을 축(軸)으로 만들 때 과제(科題)를 쓰지 않은 한 종이를 보았는데 첫 행에 '상변서(上變書)'라 쓰여 있었으나 그의 이름은 없었다.(…)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한과 분노의 감정이 뒤범벅이 된 영조는 "종이 가득히 장황하게 쓴 것이 음참(陰慘)하기가 헤아릴 수 없어 비단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