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한때 국가 개혁을 위해 귀머거리가 된 자신과 필담(筆談)을 나누던 일국의 지존. 유수원(柳壽垣)은 그 지존(영조) 앞에서 처음에는 춘천 교영계 역모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답변을 기록한 실록 기사는 '마침내 형신하니, 유수원이 승복하여 공초하기를'(영조실록 31년 5월 25일자)로 시작된다. 형신은 죄인을 형구(刑具)로 고문하면서 신문(訊問)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조사 방법을 일컫는다. 이 단계는 심한 고문이 아닌 주로 정강이 부분을 때렸다.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살인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문도 하루 세 차례 이상 형신을 할 수 없었다. '무릇 형신은 하루에 한 차례를 넘지 못하며, 추국에서는 두 차례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심문의 첫 단계로, 자백이 나오지 않으면 고문의 강도는 급속히 강해졌다. 심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수원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신치운·박사집과 친밀하게 사귀어 침체된 바가 신치운과 다름이 없게 되었는데, 이는 오로지 조제(調劑)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성상을 비방하고 아래로는 조제한 여러 신하를 욕하여 몰래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쌓아왔습니다."- 유수원의 입
[충북일보] 1755년(영조 31)에 발생한 춘천 교영계(敎英契) 역모사건의 명단에 어찌된 이유에서 인지 유수원(柳壽垣)의 이름이 등장했다. 당연히 유수원은 국문장으로 끌려 나왔다. 조선시대에는 반란·모역 등의 중대 범죄가 발생할 경우 왕의 명령에 의해 임시 심문기구인 국청(鞠廳)을 설치하고 죄를 캤다. 이때의 '鞠' 자는 '국문할 국' 자이다. 국문은 대개 2종류로 분류됐다. 임금이 친히 심문을 하면 친국(親鞫), 임금이 빠진 채 의금부·사헌부가 심문을 하면 정국(庭鞫)이라고 불렀다. 모반 등 국왕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건은 주로 친국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의금부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의 관원, 좌 ·우포도청의 대장 등이 배석했고, 이 가운데 대신 한 사람을 위관(委官)으로 명하여 시행하였다. 송강 정철도 정여립사건 때 위관을 맡았다가 두고 두고 영남사림(동인)의 원망을 산 바 있고, 실제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영조는 내사복에서 유수원을 친국했다. 내사복은 본래 임금의 말과 수레를 전담 관리하던 관청이나 때때로 친국 장소로도 사용됐다. '임금이 내사복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유수원·조재민(趙載敏) 등에게 물었는데, 조재민은
[충북일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광해군 연간을 산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역사지리서 《동국지리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주와 인연도 깊어 목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남일면에 시조 한란(韓蘭의 재당을 지었고, 그리고 '청주한씨시조유기서사비'를 상당구 운동동에 세우기도 했다. 그의 가까운 후손으로 한진호(韓鎭戶+木·1792-?)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31살 때인 순조 23년(1823)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가 의기소침해 하고 있을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정혜교·이철유·정치순·정수교·정청풍·이후·성여 등 내외 친인척들이 그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대부분도 과거에 낙방했고, 평소 자주 이용하던 남한강 물길을 귀향하고자 했다. 한진호는 이들의 귀향과 동행, 평소 하고 싶었던 단양팔경 여행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 남양주에 이르러서는 정약용 집도 방문 남한강 물길 여행에는 이들 외에 장인 정의준과 배에서 조수 노릇을 할 동자(童子) 양천돌도 동승했다. 따라서 한진호가 뚝섬에서 빌린 배에는 자신을 포함해 10명이 승선했다. 그는 1823년 4월 12일 한양 뚝섬을 출발해 9일만인 4월 21일 충주 목계에
[충북일보] 황학수(黃學秀, 1879~1953)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만주의 독립군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한평생을 무장투쟁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해산 될 때까지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로군정서, 신민부, 한국독립군 등 여러 단체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군인의 길로 들어서다 황학수는 1879년 서울 화동에서 부친 황두연(黃斗淵)과 모친 홍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이고,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으로는 이국현(李國賢)을 사용하였다. 그는 서울 출신이었지만 자신이 어려서 성장한 제천을 고향으로 여겼다. 제천과의 연고로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광복 후에도 여생을 제천에서 보냈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 모친 홍씨와 충청북도 단양군 어상천면 대전리 삼화동으로 내려와 다 시 상경할 때까지 10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1895년 부모를 여읜 황학수는 서울로 올라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합격하여 1900년 1월 제1기로 졸업하였다. 군인으로서의 첫걸음
[충북일보] 유수원은 그의 나이 50살이 되는 해인 1744년(영조 20) 벼슬길에서 물너났다. 이후 10년 동안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초야에 묻혀 야인 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가 노론이 득세하면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타의에 의해 야인생활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이 실록에 다시 등장한 것은 1755년(영조 31) 5월 무렵이었다. 이 해 과거시험 답안지에 정답대신 영조를 부정하는 글을 써내는 심정연(沈鼎衍·?-1755)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란)에 연루돼 처형된 심성연(沈成衍)과 심익연(沈益衍)이 그의 형들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심정연은 자라면서 형들의 얘기를 들었다. "익명서는 과연 신이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바로 신의 원수입니다. 신은 심성연과 심익연의 아우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훈척(勳戚)인 사람과 임금의 권우(眷遇)를 받는 사람은 모두 미워하여…."- 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 교영계(敎英契)라는 춘천지역의 사당조직이 자리잡고 있음이 밝혀졌고, 당시 훈장은 유봉성(柳鳳星)이라는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훈장은 일정 수준의 학식과 교
숙종대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된 것은 젊은 서인들이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유교의 도리이 맞느냐, 안 맞느냐를 논쟁하는 사문(斯文) 시비가 일어났다. 그러나 경종대 들어 왕통에 관한 시비가 본격화됨으로써 기존의 사문시비는 충역(忠逆)시비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소론은 창당정신을 저버리고 노론에 대한 극심한 정치 보복을 자행했다. 이것은 노론도 마찬가지여서 승리한 자가 충(忠)이 되고, 패비한 자는 역(逆)이 되면서 공존의 정치는 사라지고 독존만이 횡행하였다. 숙종~경종 연간은 사화의 절정기였다. 1721년(경종1)에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노론은 연잉군(후에 영조)의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조선시대에는 두번의 왕세제가 탄생했다. 태종 이방원이 정종 때, 그리고 영조가 경종 때 세제로 책봉됐다. 노론은 나아가 병약하며서 후사가 없는 경종을 대신해 연잉군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리청정은 왕이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세자나 세제가 왕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을 일컫는다. 경종은 이를 수용했지만 조태구(趙泰耉·1660-1723), 유
[충북일보] 한강은 지리적으로 한강본류·남한강·북한강 등으로 구분되고 조선시대 뱃사공과 뗏사공들은 경기도 양수리를 기준으로 하류를 아랫강, 상류를 윗강으로 불렀다. 지류 가운데 규모가 큰 것에는 '江'(예 소양강·섬강·주천강), 이보다 작은 것에는 '川'자(예 충주 달천·장호원 청미천)를 붙였다. 江은 육로를 단절시키나 나루[渡津]는 육로 기능을 연결해 주고 있다. 때문에 나루의 사전적인 의미도 '강이나 내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으로, 그 기본적인 기능은 여객과 물자를 도하시키는데 있었다. 이 나루에 인마(人馬)와 물산의 유통 등 상업적인 기능이 더해지면 포구(浦口)로 발전하게 된다. 관련 자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국의 나루는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57곳에 불과하던 것이 18세기 《여지도서》(1757)에 62곳, 19세기 《대동지지》(1865)에 이르러 100곳으로 늘어났다. 조선시대 남한강 수로에도 수십 개의 나루가 존재했고, 《세종실록》 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을 통해 충주목 나루에 대한 세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 덕흥창, 경원창과 일정 기간 공존전통시대 충주지역 남한강 일대의 나루와
[충북일보] 이형우(李亨雨 1889∼1958)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 이범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왕칭현(汪淸縣) 분단에 가입하여, 이듬 해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각지를 돌며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함경북도 영흥(현 금남군)에서 피체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북간도 왕칭현으로 망명하다 이형우의 본명은 이춘우(李春雨)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광복단 활동 당시 이형우, 이현(李玄), 이흥준(李興俊)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이나 본명을 숨기고 이명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동일인인지 알 수 없어 독립운동의 행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이형우 역시 법원 판결문의 기록 이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그가 만주의 광복단에 가입하여 그 조직의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무장독립투쟁을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
[충북일보] 충주목 출신 유수원(柳壽垣·1694-1755)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이다. 조선의 교육은 서원과 서당이 중심이었지만 구한말이 되면 그 명칭이 달라진다. 변천사를 살펴보면 1895년 '소학교', 1906년 '보통학교', 1941년 '국민학교' 등의 명칭이 등장했다. 일제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려는 교육적 목적으로 1941년 3월 '보통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칭은 반세기 넘게 사용되다가 1996년 3월 1일부터 지금의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까지 생존했던 그가 초등학교라는 명칭을 구사했을리는 없다. 그는 '나이 4-5세', '15세 이전' 등 학령(學齡)의 개념을 구사했다. 그의 초등교육 기회 균등론은 중국과의 비교에서 출발한다. 유수원은 중국의 교육관습 가운데 공부를 하다가 그쪽에 장래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농(農)ㆍ상(商)ㆍ공(工)으로 전환하는 것을 무척 높이 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선비가 되려는 것은 국가적으로 손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아들의 나이 4~5세가 되면 곧 글방 선생에게 나
[충북일보] 3세기 중엽이후 일관되게 나라분지의 야마도에 축조된 왜국왕묘(倭國王墓)가 4세기말엽 이후 오사카평야의 이즈미(和泉)의 모즈(百舌鳥)와 가와치(河內)의 후루이치(古市)에 축조되었다는 것은 3세기 중엽부터 4세기 후반에 걸쳐서 나라에 건설된 왜국의 왕묘가 4세기 말엽 오사카평야 남부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고사기(古事記)』ㆍ『일본서기(日本書紀)』가 말하는 일본의 왕권이 '만세일계(萬世一系)'였다는 사실과 배치된다. 고분은 어디까지나 그 정치세력의 본거지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오사카평야 남부에 대왕묘가 축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사카남부의 세력이 왕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모즈고분군의 닌토구(仁德)릉이 위치한 사카이시나 나니와(難波)는 나라의 야마토정권의 해외창구, 즉 주로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는 문화ㆍ정보유입의 창구였다. 왜왕은 하카타를 거쳐 사카이나 나니와를 출입하는 외교사절을 통해 국제정세의 정보를 독점하고 중국왕조의 책봉을 받는 것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또한 주로 한반도를 통해 유입되는 선진문물을 독점하여 그것을 나눠주는 것을 통해 그 권위를 획득하였다. 3세기 중엽이후 일관되게 나라분지의 야마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