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일보] 박기성(朴基成, 1905∼1991)은 충북 진천 출신으로 일본 유학중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한 독립투사이다. 그는 중국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고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육군 장교로 준장까지 복무한 평생군인이었다. 예편 후에는 정치 등 다른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정립하는 활동에 매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 전념하였다.댕기머리 소년, 신학문에 눈뜨다그는 1905년 6월 1일 문백면 봉죽리(鳳竹里-석복, 갈마지)에서 박문용(朴汶容)과 연철희(延哲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 아명은 순성(順成), 호는 의당(毅堂)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이수현(李守玄)·오양준(歐陽軍)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진천에서 자라던 그는 어린시절 외가가 있는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 행화정(杏花亭-울어바위)으로 이사하였다. 어려서는 부친께 천자문을 배우고, 15세까지는 서당을 다니며 한문공부를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4월 10일 도안면 광덕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그도 참여하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충북일보] 인조 9년(1631) 2월에 정한(鄭澣·?-1631)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지금의 충북 옥천사람 권대진(權大進) 등이 합천인 정한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를 같은 옥천인 조흥빈(趙興賓)이 고변[밀고]하면서 일어났다. '옥천인(沃川人) 조흥빈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도사를 보내 권대진·권계·권락·권순·정담·양천식·양정식·이찬희·정후엄, 박선검·박후검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이 사건의 성격은 잔존하던 대북파들이 자파 인물을 국왕으로 옹립, 세력을 복원하려는데 있었다. 당시 당색이 대북(大北)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천인 권대진은 '출신'(出身) 신분으로, 스스로를 중병영장 혹은 권천총(權千摠)으로 칭했다. 출신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유생을 일컫는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1575-1641)은 대북의 지지를 얻어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에 의해 실각, 강화도로 유배된 끝에 제주도로 이배됐다. 당연히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이끌던 대북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능(陵)·원(園)·묘(墓)를 구분했다. '능'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 그리고 '원'은 세자·세자비·종실 무덤에 대한 호칭이다. 반면 묘 혹은 묘소는 일반 백성들의 무덤을 가리켰다. 신문 지상에 가끔 등장하는 총(塚)과 분(墳)은 문화재와 관련된 용어이다. '총'은 옛무덤 가운데 특이한 유물이 출토된 경우에 붙여지게 된다. 경주 금관총은 금관, 천마총은 천마도가 출토됐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분'은 특별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음 무덤으로, 지역명을 따서 'OO동 고분' 식으로 작명해 오고 있다. 가령 '경주 황성동 고분'과 같은 사례가 된다. 왕릉이나 사대부의 무덤과 달리 보통 사람의 무덤인 묘소는 대략 봉분(封墳), 입수도두(入首到頭), 용미(龍尾), 선익(蟬翼 혹은 사성), 계절(階節), 배계절(拜階節), 순전(脣前) 등의 구조로 이뤄져 있다. 모두 풍수적인 의미를 지닌 것들로, 나름의 풍수내지 종교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봉분(封墳) 풍수상 혈(穴)에 해당하고 있다. 봉분이 큰 함지박을 엎어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주변과 묘지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다. 일부에서는 자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나 분명치는 않다.
[충북일보] 1728년(영조 4)의 이인좌와 1755년(영조 31)의 유수원 역모사건은 3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나고 있으나 그 뿌리는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노론대 비노론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이때의 비노론은 소론과 남인들의 정치적인 연합을 의미하고 있다. 지난 회를 끝으로 영조 연간을 휩쓸었던 두 정치적인 사건을 성깃성깃 하게 살펴봤다. 그 와중에 엄벙둠벙 하면서 빼먹은 인물이 있다. 황진기(黃鎭紀)라는 인물이다. 그는 1728년(영조 4) 선전관(宣傳官)이라는 중앙정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그해 발생한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선전관은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무반직으로 종9~정3품의 품계를 지녔으나, 그가 어느 단계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김일경(金一鏡·1662∼1724)의 문인(제자)으로 추정되는 만큼 골수 소론계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이명언(李明彦) 부자와 함께 밀서(密書)를 꿰맨 호복(胡服)을 입고 역모를 도모하였는데,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청나라로 망명했다. 흔치 아닌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당시 조정은 망명한 황진기(黃鎭紀)가 처벌된 무리와 연락, 후에 다시 2차 역
[충북일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중세와 근현대 전시실이 나타난다. 기획전시실을 지나 앞마당에 이르면 고상창고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건물 주변에는 원형표시가 일정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는데, 이 원형표시가 이 일대에서 발굴한 고상창고건물을 표시한다. 이곳에서는 5세기 후반에 대형창고가 16채 이상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 서일본의 대부분 지역의 물산과 한반도로부터 수입한 교역품은 나니와즈(難波津)에 집중되고 있었고 이곳에는 많은 저장시설(창고)이 줄지어 건립되고 있었다. 고상창고에서 육교를 건너면 나니와궁 유적이 드러난다. 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대동난을 거쳐 탄생한 일본 율령국가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기초한 '천황중심'의 세계관과 함께 천황과 그 관(官)이 대외관계를 독점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규슈 북부에는 대외관계를 담당하는 다자이후(大宰府)를 설치하고 이 곳에 왕래하는 외국인을 외교사절인 '번객(藩客)'과 스스로의 의지로 천황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귀화인(歸化人)'으로 분류하였다. '번객' 혹은 '귀화'는 '중화사상'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그러나 당의 율령과 일본의 율령에는 대외교역관리부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보이는데, 그 차이는 스스로 가진 고
[충북일보] 조선 영조-순조 연간을 산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09)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영조 탕평책의 일종인 서얼통청운동에 의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박제가·박지원 등 당대 실학자들과 교유했다. 서얼청통(庶孼通淸)은 서얼이 청요직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청요직(淸要職)은 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 지위는 그리 높지 않지만 학식과 덕망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직책이었다. 성대중의 저서 가운데 《청성잡기》(靑城雜記)가 있다. '청성'은 그의 호이다. 청성잡기에는 조서후기 심약이라는 인물과 기생 첨섬(翠蟾)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한다. 취섬은 함양 출신 기생으로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일찍이 서울로 뽑혀갔다. 그녀가 서울에서 지낸 지 몇 년 만에 협객과 한량들 간에는 취섬이 사는 골목을 모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취섬이 서울 생활을 마치고 함양에 돌아올 때 심약이 이웃 고을 수령으로 있으면서 그녀를 소실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심약이 그의 형 심악의 역모에 연루되어 먼 북쪽 변방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그러자 취섬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그곳까지 따라가 정성을 다해 심약을 섬겼다. 심약이 남해로
[충북일보] 육상 교통로가 발달하기 전의 남한강은 한반도 내륙의 주요 물길이었고, 그 주변에는 풍광이 수려한 곳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조선시대 뭇 시인과 묵객들은 남한강을 노래했고, 또 그림을 적잖이 남겼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작품들은 남한강을 소강(遡江·거슬러 올라가기)과 하강(下江)을 하며 남긴 문화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일종의 '스쳐가면서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조선 숙종-영조 연간을 산 안중관(安重觀·1683-1752)이라는 인물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한강가인 충주목 가흥촌(可興村)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다수의 문학작품을 남겼고, 후손들이 이를 '회와집'(悔窩集)으로 편찬했다. 책은 8권으로 구성돼 있고 1904년에 발간됐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는 △가흥촌에 손수 세운 집의 이름 △현지 농민들과 어울리며 농부로 살아가는 모습 △청룡사 등 충주지역 사찰 방문 등의 이야기가 등장, 지역 친밀도를 높이고 있다.◇ 부친 때부터 가문 급격히 기울어 그는 본관이 순흥(順興). 자는 국빈(國賓)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안후(安土+后·1636-1710)는 노론계 인물로, 숙종의 신임을 받아 당상관인 우승지(정3품)까지 올랐으
[충북일보] 홍사구(洪思九, 1878~l896)는 1896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종사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1896년 4월 13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스승 안승우의 곁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평에서 스승 안승우를 만나다 홍사구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원구리에서 아버지 홍성유(洪聖裕)와 어머니 성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홍훈(洪·)은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8대조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이라고 한다. 영주에 살던 그는 집안이 빈한해지자 경기도 지평으로 이주하였다. 마침 옆집에 학문으로 유명한 안승우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안승우를 본 후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안승우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 일제에 맞서 일어난 제천의병 1894년 일제는 경복궁을 습격하
[충북일보] 7세기의 한반도의 정세는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을 둘러싼 격동의 세기였고, 왜국도 또 그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640년대 제국은 모두 쿠테타나 정변에 의해 권력의 집중이 꾀해지고 있었다. 백제의 후예인 소가씨도 645년 나카노오에노미코(中大兄皇子)와 후지와라노 가마타리(藤原鎌足) 등에 의해 쫓겨났다. 나카노오에는 고토쿠(孝德)를 즉위시키고 자신은 태자가 되어 긴박한 한반도 정세를 배경으로 새로운 개혁정치를 행하였다. 나카노오에는 수군을 주력으로 하여 바다를 건너갔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에서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많은 백제의 유민과 함께 퇴각했다. 야마토 정권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국제적 분쟁을 배경으로 중앙집권국가 건설을 모색했다. 이를 계기로 '천황'이라는 새로운 왕호를 사용하였고 '왜'라는 칭호 대신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쓰시마ㆍ이키ㆍ큐슈의 북부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667년에는 수도를 오미(近江) 지역의 오쯔(大津)으로 옮겼다. 다이카 개신이 있던 645년을 시점으로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