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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3.18 18:18:03
  • 최종수정2015.03.18 18:17:50

이영석

청주 라포르짜 오페라단장

쇼팽을 두고 흔히 '피아노의 시인'이라 부르는데, 이는 러시아의 작곡가며 피아니스트인 안톤 루빈슈타인이 쇼팽을 찬양하기 위하여 '피아노의 시인,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넋'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위대한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 솜씨가 놀라울 만큼 빠르게 발전했다. 여덟 살 때엔 바르샤바의 여러 청중 앞에서 기로베츠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서 제 2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며 신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즉흥연주의 재능도 나타냈는데 이것은 그가 작곡가가 될 하나의 징조였다. 작곡에 대한 정식 교육은 12세 때부터 시작되어 바르샤바 음악학교 교장 요제프 에르스너 에게서 받았다.

·1824년 14세에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일반적인 교육은 받지 않고 오직 작곡에만 힘썼다. 15세 때인 1825년에 처녀작 론도 작품1 이 출판되었으며, 18세 때엔 베를린으로 가서 유럽의 넓은 음악계를 직접 경험했다. 1829년 가을엔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열고 자기가 작곡한 변주곡을 출판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의 주제에 의한 이 변주곡은 그 뒤 몇 년 되지 않아 낭만파 작곡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때 아직 신진 작곡가이며 평론가이던 슈만이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나타내십시오, 여기 한 천재가 나타 났습니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비평문에서 절찬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1830년 20세 때에 바르샤바를 떠나게 되는데 그가 다시는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난 것은 그가 남몰래 짝사랑한 콘스탄티아 그라도코프스키를 잊기 위함이었다. 콘스탄티아와 헤어질 때 그는 고별연주회를 베풀었다. 그 무대에는 '짝사랑의 연인'콘스탄티아도 찬조 출연을 하여 독창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고별음악회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쇼팽이 맨 먼저 간 곳은 그 전에 환영을 받았던 빈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뒤집히고 말았다. 한때 그를 따뜻이 맞아 주었던 그곳의 음악가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고독과 실망 속에서 빈에 혼자 있던 쇼팽은 21세 때에 런던으로 떠났다. 그는 도중 슈투트가르트에 이르렀을 때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과 분노를 담은 혁명 이라고 불리는 '에튀드c단조'를 작곡했다.

1836년 26세 되는 해 겨울, 쇼팽은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친구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를 만난다. 그 무렵 이미 폐결핵에 걸려 있던 그는 활달하면서도 적극적인 조르주 상드와 사랑에 빠졌다. 조르주 상드와 함께한 9년 동안 쇼팽은 상드의 다뜻한 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열중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들은 이 기간중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이별의 날이 왔다. 함께 살아온 지 9년째인 1846년 11월, 36세의 쇼팽은 상드와 영원히 헤어졌다. 그는 건강을 잃고 더 이상 작곡도 하지 못하여 1848년 38세 때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스코틀랜드 부호의 딸로서 한때 그의 피아노 제자이기도 했던 제인스 탈링의 초대로 안개 낀 차디찬 스코틀랜드에 연주 여행을 떠난 것이 그만 지병인 폐결핵을 악화시켰다. 급기야 파리에 돌아왔으나 1849년 10월 17일 그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쇼팽은 폴란드 사람과 프랑스 사람과의 혼혈아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음악도 자연 혼혈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폴로네즈나 마주르카는 뚜렷이 폴란드 적 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작품에 깃들인 화려한 장식이나 섬세함은 파리 귀족사회의 취향을 나타내고 있다. 쇼팽의 음악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의 삶속의 기쁨과 슬픔이 그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매우 서정적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할 만큼 풍부한 정서가 담겨 있다. 파리에 있는 쇼팽의 묘석 위에는 젊은 여신상이 줄이 끊어진 리라를 들고 비바람을 맞고 있다. 그 여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조국과 사랑을 잃고 타국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쇼팽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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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