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2월 5일 우리고장 문화단체로는 처음으로 청주문화원이 탄생했다. 당시는 6·25전란의 아픈 상처가 아물어 가던 때라 문화에 뜻있는 선지자들에 의해 선진 서구문화를 보급하는 문화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설립 후 사무실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고 70년대에는 운영난에 봉착해 문을 닫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외국의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창구로 설립된 문화원이 70년대 후반부터는 물밀듯 밀려오는 외래문화에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고 가꾸는 역할로 바뀐 것이다.
△문화원이 지역문화발전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어떤 점에 역점을 두고 운영했나.
-먼저 지역문화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회원확보에 역점을 두었다. 취임당시 임원만 10여명 있던 회원조직이 불과 5년 만에 운영위원, 특별회원, 향토사회원 등 5백명을 헤아리는 조직으로 늘임으로써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결과 오직 보조금으로만 운영되던 것이 오늘날에는 회비, 찬조금, 광고협찬비 등으로 1년에 6천여만원이 들어옴으로써 정부나 지자체 보조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립도 50%이상 달성함으로써 운영전반에 내실을 기할 수가 있게 됐다.
△문화원장을 지내며 가장 보람된 일과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무엇이 있나.
-‘청주문화원이 하면 다르다’는 평을 들을 수 있도록 사업 하나 하나에 열정을 바쳐왔기 때문에 모든 사업이 애착이 가지만 그 중 하나를 들라하면 종합문화지 ‘청주문화’ 발간사업이다. 매년 말 3천부 정도를 발간해 돌리는데 매호마다 다양한 기획특집으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2006년 기획특집으로 꾸민 ‘청주명사들이 미리 쓰는 유언장 공개’와 지난해 권말부록으로 실린 ‘청주현대인물 50인 화보’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는 과분한 평을 받기도 했다.
또 가장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지난 해 개원 50주년 기념사업으로 폈던 ‘재경작가 4인4색전’과 ‘청주의 노래 가곡의 밤’ 그리고 출향(出鄕) 명사들의 고향을 그리는 수필집 ‘내사랑 청주’ 출판 사업이다. 특히 수필집 ‘내사랑 청주’는 지난 8년 동안 청주문화지에 연재해 왔던 72인의 청주출신 명사들의 애절한 고향이야기를 모은 것인데 ‘이 책을 읽고 어찌 청주에 대한 애향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2003년 ‘청주문화기행’은 재판까지 찍어 내는 히트를 쳤고 ‘청주역사인물기행(2006년)’도 나오기 무섭게 절판되는 기록을 세워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퇴임하는 박영수 청주문화원장
임기를 마치는 박 원장은 수필가답게 도덕적 해이가 이 시대의 가치관 혼돈을 초래했다며 문화사회건설은 인간성 회복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독특한 지역고유의 문화 창출은 시민들의 참여와 체험을 통해 접근해야 하고 그 힘이 문화 환경을 바꿀 수 있도록 문화원이 바람을 일으키는 풍구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박 원장은 ‘명예직’이 아닌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무한 봉사직’이 문화원장임을 역설한다.
평생을 교단과 대학의 출판ㆍ홍보에 바쳐온 박 원장은 8년 전 정년퇴임하면서 곧바로 문화원장을 맡았다. 또 한국문화원연합회 부회장과 충청북도지회장을 맡아 역동적으로 활동해 왔다.
아침등산을 즐기며 전국의 높은 산을 두루 섭렵하고 있는 그는 탁월한 유머감각을 발휘하며 청주대평생교육원 수필 강좌와 대학원 고위과정, 여성회관, 노인대학 명강사로 분망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문화원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시민들의 호응도가 날로 높아가고 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는 박 원장은 만년청춘을 구가하는 ‘청주문화 풍구잡이’가 자신이라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