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았다. 따라서 역대 왕들은 미래 예언을 믿는 도참사상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이미 조선초기에 도참서적을 집에 간직하지 말 것을 명령하기도 한다.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 동천록, 통천록, 호중록, 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효유는 깨달아 알아듣도록 타이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삶이 도탄에 빠질 때는 어김없이 도참사상이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무학이 지은 도참기가 나돌았다. 선조실록에 등장해 있는 내용이다. '국초에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1386)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 크게 성행했으나 아무도 그 말을 해석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왜구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조정에서 순변사 신립을 보내어 방어하
소라야. 이번엔 정말 가고 싶었던 북유럽으로 가.전에는 그저 일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여행이란 걸 했다면 지금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아서 자꾸만 떠나고 싶은 것 같아. 거기에 뭐가 있기에 자꾸 가냐구?글쎄.....뭐가 있어서 보러 간다는 것보다 난 그 낯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공기를 함께 마신다는게 좋아.어쨌든 오늘부터 열흘 간 나와 함께 나가보자. 미지의 세계로....오늘 오전, 잔뜩 찌푸린 하늘이 불안해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하려고 큰 며느리 차에 올라타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어.여행 중에 맞을 비를 다 맞고 간다고 좋게 생각하며터미널에서 일행을 만나 인천공항을 향해 힘차게 출발했지.오후 4시 반에 비행기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우리 시간으로 새벽 2시가 넘어 있었어.모스크바 시간으로는 밤 9신데도 대낮처럼 환하니 잠을 어떻게 잘지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설렘과 기대로 올 것 같지 않은 잠인데 어떻게 청해야 할지… 두터운 커텐 속에 부푼 가슴을 묻고 모스크바의 첫날밤을 얌전하게 보냈어. 오늘 밤부터 열흘 간 백야와 정면대결 할거니까… 태극기가 펄럭이는 호텔 앞마당 분수광장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미
추소리의 둥그나무는 빙둘러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족히 서너명은 되어야될 정도로 우람하다. 그로부터 뻗어나간 가지는 하나의 거대한 아지트처럼 그늘지지만 아늑하다. 추소리는 그 둥그나무를 중심으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길가 언덕위에 자리한 둥그나무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 윗마을 추소리이고 둥그나무에서 동남쪽 300m 아래 대청호변에 위치한 마을이 아랫마을 추소리이다. 금강의 물줄기가 휘어감아 나가는 한쪽 자락에 암봉들이 끝없이 줄지어 서있는 일명 병풍바위로 유명한 아랫마을 추소리의 절경에 반하여 일찍이 우암 송시열은 소금강이라 이름 지어 노래했는데, 이 바위산의 절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반면 둥그나무 주변으로 형성되어 있는 윗마을 추소리는 마을이 수몰되면서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게 된 곳으로 둥그나무가 있던 길은 예전부터 추소리 사람들이 읍내 가려면 이 둥구나무까지 올라와 길을 가야했다고 한다. 추소리가 수몰되기전에는 탑신제를 매년 올렸었는데 이주할 때 탑신제당을 이전을 하지 못하고 물속에 두고 온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마을사람들은 둥구나무아래 '추소리탑신제당'을 복원하였고
마음이 허전해 무량사를 찾았다.무량은 셀 수 없다는 말로 목숨을 셀 수 없고, 지혜도 셀 수 없는 극락정토를 지향하는 말이다. 곧 무량사가 극락이라는 뜻이다.극락이 있는 곳 무량사 길에 졸졸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귓속과 마음속에 낀 세속에 먼지를 씻어준다. 매표소에 오르니 일주문이다. 일주문이 마음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중생도 하나라 생각되어 앞을 보니 산 까치들이 먹이를 찾다말고 나를 맞이하듯 나뭇가지에 올라 날개 짓을 한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던데 이 산사에 반가운 길손일까 아니면 세속의 찌든 먼지나 털고 가는 그런 중생이 아닐까 생각하니 출가하는 마음 같아 만수산 산자락에 있는 무량사의 하늘을 바라보았다.이 길을 오르다가 천왕문 앞에 통일 신라 시대의 조형을 따라 만든 고려 때 당간지주가 산사로 안내를 한다. 천왕문으로 들어가면 동, 서, 남, 북을 수호하는 각각의 천왕들이 모여 사천왕문 되어 부리부리한 눈으로 부처님 도량으로 향하는 중생을 수호하고 몸과 마음 상태를 가다듬어 오르라는 무언중 교훈을 주는 보탑, 창, 칼, 보탑, 비파에 몸매를 가다듬고 천왕에게 빈배를 하였다.경내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꽉 차 극락전, 5층 석
실록의 표현을 빌면, 왜군들은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다'. 신립과 그의 종사관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달천강에 뛰어들어 자살했고, 당시 충주목사 이종장은 아들 희립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탄금대 앞 개활지에서 전사했다. 그 와중에 사잇길로 도망을 쳐 살아남은 장수가 있었다. 순변사에 임명됐던 이일(李鎰·1538∼1601)이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 제 1군은 파죽지세로 밀양까지 올라왔다. 그러자 조선 조성은 이일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 급히 경북지역으로 파견한다. 순변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임시로 단기간 파견되는 특사를 말한다. 선조실록은 이때의 조정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에 모여 청대하였으나 (임금은)비답하지 않았다. 계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냈다. (…)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청대'는 신하가 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던 일을, '비답'은 임금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선조 22년(1589) 비변사의 대신들은 각자 무신들을 추천한다. 능력있는 무신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국방력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이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책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이때 대신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은 이종장(李宗張·?~1592)을 추천했다. 이런 흐름 속에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 정사와 부사로 보내, 일본을 정탐케 한다. 그러나 둘이 귀국해 올린 보고서 내용은 정반대였다. 서인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침략할 것임으로 대배해야 한다"고 보고를 했다. 반면 동인 김성일은 "일본은 침략할 능력이 없다"는 내용을 올렸다. 당시 조정은 동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서인인 황윤길의 의견은 묵살됐다. 당시 서인들은 이른바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었다. 따라서 선조는 서인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봤다. '건저'(建儲)는 왕의 자리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서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등이 대거 귀양을 가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계절은 3계절뿐이다. 우리나라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게 아니라 더운 계절, 아주 더운 계절, 미치도록 더운 계절만이 존재한다. 4월은 미치도록 더운 계절에 속한다. 한반도에서는 진달래꽃에 이어 철쭉이 봄의 한 중간을 달리고 있는데 인도차이나 반도는 펄펄 끓는 가마 솥 더위는 지구상의 생명체를 무차별로 구어내고 있다. 그곳 여름의 보통 기온은 섭씨 36~38도를 기록하는 데, 체감온도는 42도쯤 된다. 따라서 캄보디아의 곳곳을 여행하자면 하루에 생수 4~5병은 준비해야 한다. 이를 소홀히 했다간 탈진 사태를 불러올 수도 있다. 모자나 양산은 필수장비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속칭 '뚝뚝이'를 타면 자연의 바람으로 염제(炎帝)를 어느 정도 쫒을 수 있다. 5~6월, 우기로 접어들면 고온 다습하여 여행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섭씨 40도가 넘으면 일상사를 멈추고 휴식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의 겨울에 해당하는 1월의 기온도 섭씨 18~20도에 달하는데 이때는 더러 동사자도 발생한다. 더위에 익숙한 현지인들이라 그런지 36도쯤의 폭염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캄보디아 하면 앙코르 왕국의 영화를 접어두고 가장 먼저
신립이 임진왜란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달천강에 투신할 때 함께 자살한 인물이 있었다. 신립의 종사관이었던 김여물(金汝山+勿·1548~1592)이다. 종사관은 장수를 보좌하는 장교로, 종6품에 해당한다. 김여물은 임란 직전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정철(鄭澈·1536~1593)의 사람'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돼 있었다. 정철은 이때 동인의 모함을 받고 막 실각된 시기였다. 정철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당시 영의정)와 함께 광해군 책봉을 건의키로 했다. 이는 이산해의 계략이었다. 이 때 선조는 인빈김씨에게 빠져 있던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을 책봉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철은 선조의 노여움을 샀고 같은 그 파장은 같은 당인 김여물에게도 미쳤다. 옥중의 김여물을 구해준 사람은 서애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은 그가 무략에 뛰어난 것을 알고 자기 막중(幕中), 즉 참모로 쓰려고 했다. 그러자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그의 재능과 인간 됨됨이를 알고 자기 종사관으로 임명, 함께 출전하게 된다. '신립이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 뿐만이 아니라 충의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
맑은물 굽이굽이 휘돌아가고 비단강 금빛모래 뛰어놀던 곳 어미소 한가로이 풀뜯던 벌판 오봉산 소쩍새 가냘픈 울음소리 꿈에나 그려지는 아득한 고향...석호리 마을 유래비에 새겨진 글귀에선 깊게 파인 깊이만큼 꼭 그만큼의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대청호 담수가 시작되면서 본래 마을이 있었던 곳은 모두 물 속에 잠겨 버렸고 주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일부는 수몰선을 벗어난 인근으로 일부는 새로이 조성된 이주단지로 또 일부는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졌다.남은 사람들이나 떠난 사람들이나 지척에 있는 그곳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개발논리에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치유되지 않은 까닭이요 마을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한 향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산과 호수 허름한 마을들과 실핏줄처럼 그어진 길 수몰의 한을 품은 채 삶을 영위하고 있는 대청호 주변 사람들이 그려내는 고향의 정취는 아픔과 이별 슬픔과 서러움 그 위로 덧칠된 그리움 때문이려나...한걸음 한걸음 발길 빌어 마주하는 풍광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대청호 둘레길 10구간은 옥천군 군북면 소재 석호리, 이평리, 보오리, 지오리, 이백리, 환평리, 추소리에 걸쳐 형성
임진왜란 참패의 원인을 두고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의 전략부재를 거론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새재에서 지키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신립은 여진족을 물리칠 때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 성과를 거뒀다. 전문가들은 신립의 이 같은 성향이 협곡보다는 탄금대 앞 개활지에 진을 치게 한 것으로 봐왔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일부 사가는 신립이 조령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이다. 같은 날 왜군은 벌써 새재 밑 문경에 도착해 있었다. 충주~새재와 문경~새재는 거리상 비슷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새재에 도착할지는 서로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일 수 있다. 그런데 새재는 충주 사면이 더 가파르다. 이 점이 신립의 판단력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일부 사가는 보고 있다. 신립이 탄금대에 진을 친 것은 익히 알려진대로 배수의 진을 염두에 둔 결과였다.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처음에 150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한다. 이후 제승방략 체제에 따라 모집병을 끌어들이면서 군사가 8천여명으로 늘어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군사를 지역단위별로 모집하고, 이를 지휘할 장수는 중앙에서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두고 온정 잊을 길 없어 /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산 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키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세 북이 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과천리에 있는 수덕사를 오르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 조용한 산사를 울린다.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스님의 길 찾아 수덕사는 모든 고뇌에서 해탈, 자신의 모든 명목을 추구하고 덕을 닦게 하여 모든 중생을 복과 덕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에서 수덕이라 한단다.이 덕이 머무는 곳을 찾아 속세의 인연들을 끊고 스님이 되기 위하여 출가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 따른다. 모든 번뇌, 망상을 이겨야 한다.이 고통과 싸워 이겨야 출가자가 된다. 부처님께 몸 바쳐 출가하는 데는 아무 자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출가 한다고 해서 누구나 정식으로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 제한도 있고 몸에 문신을 새기거나 흉터가 있는
얼마전 충암 김정(金淨)의 후손들이 충암이 남긴 고서와 고문서를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했다. 기탁 목록에는 김정의 문집인 충암집, 조광조의 문집인 정암집, 만동묘정비 탁본, 경주김씨족보 초고본, 송시열이 제주도에 지은 농맹혹문정의통고 등이 포함돼 있다. 김정은 1486년 지금의 보은읍 성족리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21살인 1507년(중종 2) 문과에 장원 급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러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지역에서는 일부 한문학자를 제외하고 그를 크게 주목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식으로 표현하면 명현 조광조와 '절친'의 관계였다. 따라서 중종 때의 개혁 정책은 거의 두 사람에 의해 주도됐다. 도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소격서(昭格署)가 이때 폐지됐고, 대신 숨은 인재를 천거 형식으로 선발하는 현량과(賢良科)가 도입됐다. 특히 그는 '국왕도 현인·철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기(修己), 즉 자기수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현철군주론이라고 한다. 그는 연산군의 학정이 군주의 자질미달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됐다. 중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유학(幼學) 윤세정 등이 상소하
[충북일보]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손님이 연이어 들어선다. 혼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저녁을 위해 포장하는 손님, 선물용으로 예쁘게 포장해달라는 손님, 내일 점심 포장을 예약하는 손님도 있다. 포장하는 메뉴도 다양하다. 진열장에 보이는 빵 메뉴부터 6가지 종류의 샌드위치, 라자냐, 샐러드, 잠봉뵈르 등 신중한 선택이 이어진다. 스피카 카페에서는 청주 흥덕초등학교 정문이 바로 보인다. 통창 너머로 재잘대는 아이들의 모습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환하게 들어오는 채광이 따스한 공간을 연출한다. 오전 10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있는 이곳에서는 재료가 떨어지기 전까지 맛있는 냄새가 새어 나온다. 스피카의 이선영 대표는 10년 넘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음악과 영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한 언어는 성인이 된 후 일본으로 떠날 용기를 줬다. 일본의 베이커리나 카페 등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보낸 시간은 돌이켜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언어를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며 성취감이 있었지만 마흔이라는 나이가 다가오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됐다. 40살이 되면 뭔가 달라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여름철 폭우와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세웠다. 17일 시에 따르면 올 여름 청주지역 무심천 범람에 대비해 시민들의 통행을 자동으로 차단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성한다. 이 자동차단시설은 갑작스러운 폭우나 장마기간 무심천의 수위가 위험수준에 달했을 때 시민들의 세월교 보행을 자동으로 차단하는 시설로, 시는 지난해 운천동 세월교 1곳에 양방향으로 이 시설을 설치해 시범운영했다. 시는 이달 내로 무심천 19곳 세월교 전체에 자동차단시설을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자동차단시설 1기를 설치하는데 소요되는 예산은 1천만원 수준으로, 모두 38개 시설에 3억8천여만원의 예산이 투입된다. 지금까지는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면 직원들이 세월교를 일일이 방문해 차단선을 설치했다. 그러나 올해부턴 원격으로 작동하는 이 시설을 무심천 전 구역에 설치해 재난대비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또 이 시설은 한번 설치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예산투입 대비 사업효과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함께 시는 재난 예보·경보시설도 개선한다. 시는 노후화된 예보·경보시설을 점검해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재난상황에 대비할 방침이다. 총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