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에는 총 24명의 노비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고장 영동 황간이 외가인 오희문은 이들 노비를 세습, 매득(買得), 별급(상속이나 증여) 그리고 유망비를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확보했다. 유망비는 주인집을 도망쳐나와 떠돌아다니는 노비를 말한다. 이들은 상전의 수족(手足)이 되어 농삿일, 누에치기, 물품교역, 편지와 안부전달, 상전의 나들이길 수행, 밥짓기, 땔감나무 마련 등 집 안팎의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했다. 오희문 노비들의 물품교역에는 우리고장 지명도 등장한다. 지금은 휴전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 평강에서 외가가 있는 영동으로 목화를 사러온 사례가 기록돼 있다. 1596년 음력 윤달 8월 16일자 쇄미록을 보면 '덕노'라는 노비가 외가가 있는 영동 황간에 와서 목화 12근을 구매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때 소요된 시간은 총 15일이었다. '덕노'는 오희문 집에서 충성도가 가장 높았던 노비로, 이듬해 겨울에 서울로 미역을 팔러 갔다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을 잃기도 한다. 조선시대 노비들이 매번 어떻게 그 먼 거리를 걸어다녔는가는 아직 완벽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주막이 대중화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괴산 연풍은 지금은 일개 면(面)에 불과하지만 일제가 1914년에 전국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기 전까지는 현(縣)의 지위를 유지했다. 연풍현은 고구려시대에는 상모현, 고려시대 때는 장풍현으로 불렸다. '연풍현'이라는 행정명칭을 처음으로 얻은 것은 조선 태종 3년(1403) 때였다. 이후 세종 11년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성종 7년(1476)에는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흡수하면서 행정 면적을 넓혔다. 그러나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연풍현은 1600년부터 1615년 까지 약 15년간 지도 위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현이 너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2년 후의 기록에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충원이 말하기를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인용문에 등장한 '충원'은 신충원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 출신으로 조령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축성했다. 왜군이 완전히 물러가자 조정 대신들 사이에 피폐한
'신각은 그(조헌 지칭) 말을 옳게 여겨 기계(器械)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성내에 봇물을 끌어들여 큰 못을 만들었다. 뒤에 왜란이 일어나자 이정암이 성을 지켜 온전할 수가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신각이 사전에 준비한 공로를 추모하여 아울러 비석을 세워 그 공을 기렸다.'-선조수정실록 임진왜란 때 조헌의 충언을 유일하게 실천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라고 전회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신각은 자신이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城), 즉 인용문에 등장하는 성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역인 다른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이라는 곳에서 왜군의 머리 70~80급을 베었다. 신각 대신 '대대적으로 수리한 성'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은 그 후임자인 이정암(李廷·1541∼1600)이다. 인용문 안에 이정암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의 본래 이름은 연안성(延安城)으로, 지금은 북한 지역이 된 황해도 연안읍에 위치하고 있다. 연안성 전투는 청주성보다 꼭 한달 늦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있었다. 그날의 전투는 소규모 충돌이 아니었다. 왜군 수만명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 등이 흩어진 장수와 졸병을 거두어 죽기로
청주성 전투에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陸戰) 승리'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고 있다. 임진왜란 청주성 전투는 1592년 음력 8월 1일에 있었다. 그러나 청주성 전투를 임진왜란 최초의 육전 승리로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충남 금산 진산면에는 이치대첩비가 존재한다. 권율은 그해 음력 7월 8일 금산 이치(梨峙·배재)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보다 먼저 승리한 전투가 있다. 이른바 경기도 양주 해유령(蟹踰嶺) 전투로, 1592년 5월 16일에 있었다. 실록에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인물은 신각(申恪·?∼1592)이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 이혼을 만나 군사를 합쳐 진을 결성했는데, 여염에 흩어져 약탈하는 왜병을 양주의 게재(蟹嶺)에서 요격하여 패배시키고 70급을 참수하였다.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범한 뒤로 처음 이런 승전이 있었으므로 원근에서 듣고 의기가 용동하였다.'- 인용문에 등장한 '게재'는'해유령'과 같은 지명이다. 어류 '게'를 한자로 쓰면 '蟹'(해)가 된다. 실록 다른 곳에도 숫자가 다소 다르나 비슷한 내용이 등장한다. '신각(申恪)은 사력을 다하여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격전하여 사졸(士
안내면 답양리 채운산에 가산사(佳山寺)라는 절이 위치하고 있다. 법주사의 말사로,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창건자는 정확하지 않다. 가산사는 조선시대에는 비교적 작은 암자 규모를 유지되다 정조 대에는 일시적으로 폐사됐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발간된 여지도서(1765년)는 가산사에 대해 '옥천군 북쪽 25리에 위치한다'고 적었다. 신경준도 '가람고'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정조 때 발간된 범우고(梵宇攷)는 '북쪽 2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됐다(今廢)'라고 적었다. 사찰에 영정각이 존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가산사에는 영정각(도기념물 제 115호)이 존재하고 있다. 영정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의병을 이끌었던 영규대사와 조헌이다. 영정각이 건립된 직접적인 이유도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조헌이 의병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장으로 사용하였고, 영규대사 또한 연합작전을 펴면서 가산사를 승병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실 관계가 약간 불명확한 면이 있다. 두 인물이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의·승병을 훈련시켰다면 청주에도 함께 입성했다고 보는
전회에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이 9년여 동안 피난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는 지금의 충남 홍성으로 피신한다. 여기서 8개월 정도 머물다가 전북 장수로 피난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들이 현감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강으로 도피하고, 나머지 4년은 지금의 충남 부여 임피면에서 생활한다. 그는 평강에서 50개월 가량 머물면서 역둔전 등 국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으며 피난생활을 이어갔다. 아들 윤겸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평강시절을 제외하면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가장 많이 했다. 임진년 음력 8월의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산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점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추석)으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오희문은 산속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임진왜란의 전황을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다. 노비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노비를 수시로 관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보고토록 했다. 임진년 음력 8월 10일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대장 조헌과 참장 이천준은 때에 맞는 인걸로서(…) 승리를 거두어 행동하는 것이 옛사람과 같으니…' 이때의 승리는 청주성 전투를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서 쓰여진 개인일기로 '쇄미록'이 있다.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11월부터 1601년 2월까지 9년여 동안 썼다. 현재 해주오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쇄미록은 7책 분량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참상뿐만 아니라 조선중기의 생활상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때문에 개인이 쓴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물 제 1096로 지정돼 있다. 쇄미록이라는 표현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시전'(詩傳)에서 발췌됐다. 시전에는 '쇄혜미혜 유리지자'(쇄兮尾兮 遊離之子)라는 표현이 있다. 첫 글자 '쇄'는 '銷'자에서 '金' 대신 '王'자이다. 쇄미록은 이 문장 중 '쇄'와 '미' 자를 따와서 만든 표현이다. 해석하면 '부서지고 자잘하게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로 쇄미록은 '임진왜란 중에 전국을 피난하면서 쓴 일기'라는 뜻이다. 오희문은 조선 중기인 중종과 광해군 연간을 살았던 인물로, 아버지는 장성현감을 지낸 오경민(吳景閔)이고 어머니는 고성남씨 남인(南寅)의 딸이다. 그의 아들 윤겸(允謙)은 임진왜란 종전 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포
백전백패하던 조선군에게 청주성 전투의 승리는 고무적인 것 이상이었다. 전란 중의 선조가 대신들과 영규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가를 논의하나 곧바로 논쟁이 벌어졌다.조선은 무장 이성계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사대부가 힘을 합쳐 세운 연합정권이고 그 고리는 유교였다. 이런 까닭에 정도전은 석가모니를 '佛氏'(불씨)라고 멸칭하기도 했다.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 아무개' 정도가 된다. 그러나 영규는 조선의 대통을 실천하는 유학자가 아닌, 머리를 깎고 산중으로 들어간 수도승이었다. 대신 윤두수가 이런 말을 한다."승려를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개벽이래 아직 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선 의당 특이한 법전을 써야 합니다."-청주성 전투의 공을 봐서는 당상관 벼슬을 주는 것이 합당하나, 유교사회의 승려이기 때문에 일종의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뜻이다.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대신인 윤승훈은 "영규는 (…) 호령이 엄명하고 곧바로 전진할 뿐, 퇴각함이 없이 한마음으로 싸웠습니다. 청주의 왜적은 이 군사가 아니었다면,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논란 끝에 영규대사에게 당상관(정3품)에 해당하는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내려졌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
영규(靈圭·?∼1592) 대사는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청주성과 금산전투에 잇따라 참전했다. 속향이 공주인 영규대사와 옥천에 기거하고 있던 조헌은 '공주'라는 지역성을 매개로 만났다. 선조수정실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승려 영규는 당초 공주 산사에 있었는데, (공주)목사 허욱(許頊)이 불러 승장을 삼았으나, 하려 하지 않다가, 강권한 뒤에야 응하였다. 일단 무리를 모아 군대를 만들고 나서는 오직 조헌만을 따라 진퇴하였다." 영규대사는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헌과 마찬가지로 승리 후에 관군이 공다툼 시비를 걸어온다. "충청병사 이옥(李沃)은 영규가 성을 함락시킨 뒤에야 비로소 들어가 웅거하였는데 적이 되돌아올까 두려워하여 즉시 성을 헐고 곡식을 태우게 하고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므로 청주의 사람들이 그(곡식)의 살점을 먹으려고 하였는데 마침내는 적을 물리친 것을 자기의 공으로 삼아 거짓으로 보고하여, 상을 받았으니…"- 후에 충청병사 이옥은 이같은 사실이 발각돼 삭탈관직을 당했다. 영규대사와 조헌은 청주성 전투 후 선조를 보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려했으나 방향을 바꿔 금산으로 향했다. 이때도
'옛날에 중원에 나그네로 왔더니 / 지금은 중원으로 유배되어 왔도다 / 그저 달천의 물을 마실 뿐이요 / 달천의 물고기는 먹지 않았는데'- 연산군~성종 연간의 인물인 이행(李荇·1478∼1534)이 우리고장 충주의 달천 주변에 유배를 와서 쓴 시로, 적거록이라는 고문헌에 실려 있다. 그 증손이 이안눌(李安訥·1571∼1637년)이다. 그는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는 동년배인 권필과 선배인 윤근수·이호민 등과 문장을 논했다. 후대에 이들의 시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불렀다. '동악'은 이안눌의 어릴적 호이다. 따라서 그가 이 모임의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07년 이안눌이 동래부사로 부임하면서 '四月十五日'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시제목은 평이하나 내용은 슬프기 그지없다.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 아버지가 자식 위해 곡하기도 하고 / 자식이 아버지 위해 곡하기도 하고 /…/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을 하고 /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을 하고 /…/ 눈물이 문득 턱을 타고 내리네 / 아전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
임진왜란과 관련, 당시 충청도 순찰사인 윤국형(尹國馨·1543~1611)이라는 인물이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받고 있다. 일부 사료를 윤국형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도순찰사와 도관찰사는 같은 종2품으로 품계는 같다. 다만 도순찰사는 임시로 파견되는 직책으로 전시에는 군권(軍權)을 가지게 된다. 도순찰사는 성종 때부터 처음 등장한다. 적지 않은 사료들이 조헌 등 의병 지도자들이 모병 활동을 할 때 당시 충청도 순찰사였던 윤국형이 방해내지 훼방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儒生)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와 청주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방법으로 저지하고 방해하였다. 이에 조헌이 순찰사 윤국형을 찾아가 거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뜻을 극력 말하자…'- 같은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로 '청양현감 임순(任純)이 백여 명의 군사로 조헌을 돕자 국형이 그가 절도(節度)를 어겼다고 하여 잡아 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리니, 조헌이 또 편지를 보내어 그를 책망하고 바로 우도(右道)로 가서 1천 6백 명을 모집하였다'라
의병장 조헌은 생전에 이런 시를 남겼다. 宣尼(공자)께서 당시에 東周를 이루지 못하셨으나 / 남긴 가르침은 가득차고 넘쳐 만년을 비추네 / 남자가 경을 궁구함은 장차 주나라를 이루려 함이지 / 어찌 한 나라의 왕이 다스리는 한 지역만을 위할 것인가.'- 인용문 중 '동주'는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던 중국고대 주나라를 일컫는다. 이처럼 조헌이 추구한 세상은 예의와 염치(廉恥)가 충만한 도학적인 세상이었다. 관군의 방해가 적지 않았고 또 목숨을 담보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헌 휘하로 의병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상당수는 조헌의 직계 제자들 이었으나 일부는 조헌의 성격과 인품 그리고 사상에 이끌린 사람들이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경구는 무인뿐만 아니라 문인의 세계에도 통했다. 후대의 송시열은 이를 두고 '明道正誼 就義成仁'(명도정의 취의성인)이라고 표현했다. '도를 밝혀 정의를 바로 세웠고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금산 칠백의사 중 이름과 신원을 간략히 기록한 것으로 '同日殉節錄'(동일순절록)이라는 문헌이 있다. 같은 날 순절한 사람의 기록을 의미한다. 이 목록에 첫번째로 오른 인물이 조헌의 아들 완기(完基)이다. 그 다음은 이광륜(李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