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사년 뱀의 해가 시작됐다. 뱀은 민간신앙의 주대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기록이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烏蛇'(오사), 즉 먹구렁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경상도 관찰사 김응기가 치계하기를, "청송에 거주하는 민세정(閔世貞)은 그의 형 세경(世卿)이 병을 얻어 사경에 이르니, 67세의 홀어미가 상심한 끝에 또한 병이 났습니다. 의원이 말하기를 '오사(烏蛇)를 혹은 찌거나 혹은 회를 쳐서 먹으면 나을 것이다." 하니…'- 구렁이와 관련된 표현으로는 능구렁이도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능구렁이를 한자로는 적동사(赤棟蛇)라고 한다. 등에는 흑갈색과 적갈색이 교대로 배열되어 있고, 배는 은백색이기 때문이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구렁이는 '굵(굵다)'에 호칭어미 '엉이'가 붙은 말로 굴겅이 → 굴헝이 → 구렁이 순으로 변했다. 따라서 구렁이는 '굵은 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구렁이는 지금 사람에게는 조금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동작이 느리면서 음흉하거나 능글 맞을 때 '구렁이 같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데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해치울 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라고 하고, 본심을
우리나라에 서양력인 양력이 처음 도입된 해는 1895년(고종 32)이다. 고종은 양력 도입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정할 정도였다. 건양은 글자 그대로 '양력을 세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종이 양력 도입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외국과의 조약체결 때문이었다. 주변 나라는 모두 양력을 쓰는데 비해 조선만 유독 음력을 사용하면서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음력 표기를 한 후 그 아래에 '양력 몇년 몇월 몇일'을 병기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통상조약을 체결한 구한말 인물은 권재형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조약문 맨 끝에 '대조선국 개국 501년 5월 29일'이라고 쓰고, 다시 '양력 1892년 6월 23일'이라고 병기했다. 그러나 양력 도입은 처음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은 종두법을 발견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력 도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한 나라 안에 '정월(正月)'이 두 개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종묘, 사직, 전각에 지내는 제사와 경사스러운 명절, 기원절에 대해 음력을 쓰는 것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을 정월로 삼기 때문이며, 행정의 조서
택리지는 1751년(영조 27) 조선후기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조선시대 지리서를 말한다. 그러나 책이름 '택리지'는 처음이 아닌 후대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저자 이중환은 30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끝에 그의 나이 61세인 1751년 그때까지의 체험을 기록한 초고를 바탕으로 택리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중환은 이 택리지를 완성한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런 택리지는 저술된지 200년이 훨씬 넘었음에도 오늘날에도 공감되는 바가 적지 않다. 바로 공리공담이 아닌, 실학적인 관점에서 지리적 사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젊은 나이인 24살에 지금의 고시인 문과에 합격해 숙종 39년(1713)에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이른바 목호룡(睦虎龍·1684~1724) 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두 차례나 반복했다. 1722년 목호룡이라는 인물이 "노론들이 경종(영조의 이복형)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라고 고자질을 했다. 이 여파로 영의정 김창집 등 당시 4대신을 포함해 60여명이 처형당하는 살육행위가 일어났다. 이를 신임사화라고 부른다. 그러나 2년 뒤인 1724년 노론의 지지
청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누각은 중앙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는 망선루(望仙樓)다. 망선루의 고려시대 때 이름은 '경치를 모은다'는 뜻의 취경루(聚景樓)였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인 한명회가 지었다. 이후 망선루는 건축학적으로 두세 번의 변화를 더 겪었다. 조선후기 청주목사였던 이섬(李暹·1612∼1673)과 이수득(李秀得·1697~1775)에 의해 추가 중수가 있었다. 망선루와 가까운 곳에는 청주옥이 위치했다. 이중 이섬이라는 인물은 청주옥에 얽힌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죄인 관리를 잘못해 결국 청주목사 자리에서 파직을 당한다. '집의 이유상, 장령 심유가 아뢰기를, "청주(淸州)에 수감되어 있던 살인한 죄인과 아비를 시해한 죄인이 형신을 받은 뒤 거짓으로 옥중에서 죽자 목사 이섬(李暹)이 곧바로 시친(屍親)에게 내어주었는데, 여러 달 동안이나 도망하여 살다가 이번에 발각되었습니다. (…) 목사 이섬을 파직하고 나서 추고하소서."- 반면 숙종~영조 연간을 살았던 이수득은 같은 청주목사를 역임했으면서 이섬과 정반대의 행정을 펼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가 진휼 관리를 잘 하자 당시 암행어사 정상순이 크게 칭찬했다. '정상순이 말하기를, "비단 잘
국립환경과학원이 얼마전 "호랑이 없는 남한에서 담비가 최상위 포식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담비는 같은 족제비과 동물 중에서도 나무를 잘 타고 또 땅 위에서 날쌔기로 유명하다. 이런 요소들이 담비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고 있다.담비의 중세 표현은 '담븨'로 이것이 '담뷔', '담뵈' 순으로 변했다. 경상도 지역에서 담비를 '담보' 또는 '담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아가 담비가죽의 순우리말은 '잘'로, 중세어 '쟈할'이 변했다. 이밖에 담비를 한자로는 '貂'(초), 또는 '山獺'(산달)이라고 쓰고 있다. 고사성어 중에 '구미속초'(狗尾續貂)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개꼬리로 담비꼬리를 잇는다'는 뜻으로 쓸모없는 사람에게 관직을 함부로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때 사마륜(司馬倫)이라는 인물있었다. 그는 진나라 무제 사마염(司馬炎)의 숙부로 조왕(趙王)에 봉해졌다. 사마염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사마충(司馬衷)이 혜제(惠帝)로 즉위하였으나, 사마륜이 그 자리를 찬탈했다. 그런 사마륜은 권력을 남용, 그의 친척과 친구들은 물론 노비와 시종들에까지도 관직을 주었다.그러자 진서(晉書)를 쓴 방현
뗏목은 원시적인 배라 사고도 빈발했다. 여기에는 우리고장도 포함돼 있다. 성종 때 제천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내려가다 익사한 사고가 실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한강도승(漢江渡丞) 심지(沈智)라는 사람이 이런 보고를 한다. "충청도 제천의 정병 김중선 등 6인이 본현에서 뗏목을 타고 양근군 지경에 이르렀다가 큰 물을 만나서 뗏목이 풀리어 3인은 익사하고 김중선 등 3인은 부서진 뗏목을 같이 타고, 한강에 표류하여 이르렀으므로 신이 이를 구원해 내었습니다."인용문에 등장하는 도승은 조선시대 한강수계 7곳의 진(津)과 도(渡)를 관리하던 책임자를 말한다. 종9품이다. '진'과 '도'는 그 구별이 쉽지 않다. 다만 도하(渡河), 진강(津江)의 표현으로 미뤄, '도'가 좀더 규모가 큰 나루터가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사실 뗏목은 조선의 창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태조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설 때도 대형 뗏목사고가 발생했다. 익히 알다시피 이성계는 위화도까지 진출했다가 그곳에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바로 그 직전의 상황에서 뗏목사고가 일어났다. 함께 출정했던 당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1390)의 상소 내용
남한강 상류의 산간 내륙에서 벌목돼 뗏목 형태로 운반된 소나무는 역시 궁궐을 짓는데 가장 많이 사용됐다. 광해군일기에서 영건도감이 이런 말을 한다. "작년 가을과 겨울부터, 여기 저기서 긁어모아 마련하여, 금년 경덕궁(慶德宮) 공사를 끝내는데 쓰려고 한 것이, 재목과 서까래 감을 합쳐 모두 1만8천여개였습니다. (…) 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덕궁 안에 또 더 건축할 곳이 생겼고, 장롱과 궤짝, 제상과 향탁 등의 집기에 응당 들어갈 수효도 또한 2백, 3백개에 이릅니다."- 그러나 뗏목은 궁궐 뿐만 아니라 한양 사대부들이 자기집을 짓는데까지 사용되면서 갖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중종실록에 이런 표현이 보인다."사대부의 집에서도 다투어 본받아 또한 장려하게 꾸미기를 힘써 화려한 서까래와 높은 용마루가 방곡에 즐비했는데, 선왕 때 재상의 집은 여기에 비교해 보면 마치 변소와 같았다. 수령들도 매번 집짓는 재목을 벌채해 뗏목과 배로 운반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느라 동강과 서강을 메웠다."- 인용문 중 '권귀'는 사대부를 의미한다. 강원도 영월의 동강과 서강이 메워질 정도로 소나무를 벌채했다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재목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영건도감이라는
남한강 뗏목은 얼음이 풀리는 우수·경칩이 지난다고 바로 운반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로 강물이 어느정도 불어나야 가능했다. 뗏사공들은 봄비로 물이 어느정도 불어나면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뗏목을 엮는 방법은 △칡넝쿨이나 쇠줄로 붙들어 매기 △나무에 구멍을 뚫어 연결하기 △쇠고리를 이음새로 박고 밧줄로 잡아매기 등이 사용됐다. 이렇게 완성된 뗏목배 하나를 '한동가리'라고 불렀고, 여기에는 보통 25~35개 정도의 굵고 곧은 소나무가 사용됐다.이렇게 영월이나 우리고장 단양 등 남한강 상류에서 만들어진 뗏목은 자본가인 목상(木商)이 자비를 들여 '강치성'이라는 제사를 올린 후에야 한양을 최종 목적지로 운반이 시작됐다. 이때 여자의 접근은 엄격히 금지됐고, 뗏목이 출발할 때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강치성을 드린 뗏목은 한번에 보통 5~7 동가리가 운반됐고, 이때 2-3명의 뗏사공이 동가리떼에 올라탔다. 그러나 뗏목도 배는 배여서 조타수 역할을 하는 사공이 필요했다. 뗏사공 중 제일 앞에 서는 사공을 '앞구잽이', 맨 뒤에 서는 사공을 '뒷구잽이'라고 불렀다. 이중 앞구잽이가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앞구잽이는 각 지점의 여울, 수심,
뗏목은 '목재 따위를 엮어 물에 띄워 내리는 나무'로 정의된다. 조선시대 우리고장 남한강으로 뗏목이 운반됐다. 이 뗏목은 일반 배와 많이 달았다. 또 그 자체가 나중에 상품으로 팔렸기 때문에 재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종사자들에게는 생계수단이 됐던 셈이다. 그러면서 뗏목은 뗏사공을 운송했다는 점에서 운송수단의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뗏목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는 않았다. 조선시대 뗏목은 크게 벌목, 목재운반, 엮기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먼저 벌목은 낙엽이 진 이후인 음력 10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여름에 나무를 베면 청태가 끼거나 뒤틀림 현상이 심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졌다. 또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은 영농철이라 인력동원이 쉽지 않은 면도 있었다. 벌목을 했으면 일단 산 밑으로 운반해야 했으나 그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임도가 거미줄처럼 뚫여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러질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통길'과 '목도'라는 방법으로 산속의 소나무를 산 밑으로 운반했다. 통길은 잡목을 제거한 후 경사면 아래로 미끄럼 길을 내, 통나무를 운반한 것을 일컫는다. 목도는 두 사람이 줄과
영동군 상촌면에 위치한 민주지산(해발 1,242m)이 아름다운 설경을 벗삼아 겨울 산행을 즐기려는 등산객과 탐방객들을 유혹하고 있다.첩첩산중에 둘러쌓인 민주지산은 자연생태가 잘 보전돼 아름드리나무가 만들어내는 설화와 주변 경관이 어울려 한폭의 아름다운 수묵화를 보든듯한 겨울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있다.민주지산은 능선이 비교적 완만한 편인데 북쪽으로 국내 최대 원시림지역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물한계곡이 자리잡고 있고 △삼도봉 △석기봉 등 봉우리들이 솟아 있어 경관도 수려하다.특히 겨울이 깊어갈수록 수북이 쌓이는 눈을 이른 봄까지 밟을 수 있고, 영하의 날씨에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이 하얀 꽃을 피워 겨울 내내 산악동호인과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이 이용해 이곳을 찾고 있다.주로 많이 찾는 등산코스는 물한계곡(상촌면 물한리)에서 출발해 각호산 쪽으로 올랐다가 석기봉, 삼도봉을 거쳐 다시 물한계곡으로 하산하는 게 보통이며 산행시간은 왕복 6시간 정도 소요된다.하산길엔 물한계곡에 형성된 식당가에서 따뜻한 손두부, 파전, 닭도리탕으로 겨울산행으로 지친 몸을 훈훈하게 녹이고 출출한 배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군 관계자는"해발 1,242m에 이르는 산의 높이에 비해 등반하기
전회에 우리고장 문의(청원)가 관향인 고려말 대신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억정사 대지국사탑비(보물 제 16호·충주 엄정면 괴정리 )의 글을 지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존하는 사료를 보면 대지국사(大智國師)는 고려후기 우리고장 충주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속명이 한찬영(韓粲英)으로, 본관은 청주(淸州)다, 그리고 아버지는 사복직장에 재직했던 한적이고 어머니는 청주곽씨이다. 부모 모두 청주를 관향으로 가졌다는 점이 우리고장과의 밀착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는 1341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태고화상 보우를 은사로 삭발하고 계를 받았다. 이후 승과에 응시한 23세 전까지 보우에게 5년, 정혜국사에게 3년, 수자화상에게 1년간 공부를 했다. 보우에게서 법을 받았고, 정혜국사로부터는 수행을 배웠으며, 수자화상을 통해서 참선의 진정한 의미와 방법을 배웠다. 그는 1353년 승과에 장원 급제, 대흥사의 주지가 되면서 사판승(事判僧)의 길로 접어든다. 그 결과, 왕명에 의해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 중요한 절의 주지를 맡아 선법을 설하고, 1372년 공민왕으로부터 '정지원명무애국일대선사(淨智圓明無石+疑國一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금란가사, 바리때, 묘
2007년부터 시작한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가 2013년 전국 명품길 순례를 이어간다.완성길 걷기를 테마로 한 이번년도 일정은 다음과 같다. 1월 26일: 추자도 제주올레길 18-1구간 2월 23일: 태안 솔향기길 3월 30일: 강화도 호국돈대길 4월 27~28일: 울릉도, 독도 5월 25일: 예천 회룡포 6월 29일: 변산 마실길 7월 26~30일: 민족의 영산 백두산 8월 31일: 방태산 아침가리골 9월 28일: 지리산 만복대 10월 26~27일: 한라산 백록담 11월 30일: 북한산둘레길 12월 28일: 대관령옛길(주문진 경유)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