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은 하천 바닥이 경사를 이뤄 물흐름이 빠른 부분을 말한다. 백과사전은 보다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는 굵은 조약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이 소리내어 흐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여울이 형성되는 하천은 지형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유년기(幼年期)에 속하며, 대륙의 구조평야를 흐르는 하천에서는 일반적으로 보기 드물다'라고 쓰고 있다. 조선말기 인물로 이유윤( 李裕元·1814~1888)이 있다. 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인물로, 대원군의 등장과 퇴진에 따라 좌천과 복권을 반복했다. 그는 고종초에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수원유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으로 승진했다. 그는 총재관 자격으로 조선의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 편찬을 주도했고, 대한제국기 전인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기도 했다. 그는 다재다능해 조선의 역사, 지리, 시문, 제도 등을 다룬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쓰기도 했다. 이 문집은 같은 시기 백과사전류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와 종종 비교된다. 그는 이 문집에서 '호서(湖西)의 네 고을'이라는 소제목으로
황인종을 학술용어로는 몽골로이드(Mongoloid)라고 부른다. 아시아, 태평양제도, 아메리카 대륙 등에 분포하고 있다. 이런 몽골로이드는 대략 북방계와 남방계 등 두 부류로 세분된다. 한국·일본·몽골민족은 북방계, 베트남·태국 민족은 남방계로 분류되고 있다. 북방계 몽골로이드는 납작한 얼굴, 쌍꺼풀이 없는 가늘고 작은 눈, 낮고 작은 코, 칼귀, 얇은 입술, 발달한 턱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 남방계 몽골로이드는 작은 키, 단두, 약간 돌출된 입, 다소 두툼한 입술, 넓고 낮은 코 등의 특징을 대략적으로 지니고 있다. 고고인류학자들은 이같은 원인을 기후와 유전학적인 표이가 함께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표이는 특별히 나타나는 특징을 말한다. 인류단일지역 기원론(일명 아웃오브 아프리카)을 적용할 경우,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대략 6만년전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을 벗어나 히말라야 남쪽의 인도를 거쳐 5만년전 지금의 동남아시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일부는 해안을 따라 중국, 한국, 캄차카반도까지 진출하고,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일부는 시베리아 내륙으로도 이동한다. 이들이 북방계 몽골로이드로, 마지막 빙하기 끝무렵에는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 수덕사(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의 말사인 개심사(開心寺)라는 고찰이 있다. 사적기에 의하면 651년(의자왕 11)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라 하던 것을 1350년 개심사로 고쳤다. 그 후 1475년(조선 성종 6) 중창했고 1955년 전면 보수하였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충남문화재자료인 명부전과 심검당 등이 있다. 그러나 성종 때의 중창은 노후화가 아닌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실화범은 다름아닌 당시 충청도 절도사였던 김서형(金瑞衡·?-?)이다. 실록에는 그와 사냥에 얽힌 이야기가 이례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무신 출신이었던 그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민폐를 자주 일으켰다. '사헌부에서 행대 감찰 정찬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충청도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습진(習陣)을 한 뒤에 인마(人馬)를 많이 거느리고 사냥을 행하여 홍주진(洪州鎭)에 속한 여러 고을로 하여금 날마다 지공(支供)하게 하여 폐단을 일으키고…'- 당시 조선 전기의 충청병영은 해미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해미 주변의 서해안 일대를 벗어나 우리고장 청주까지 진출, 이른바 '원정 사냥'도 했다. 이날은 청주목과 청안현 일대를
호패(號牌)는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성이면 누구나 차고 다녀야 할 물건이었다. 이 호패제도는 호구(戶口) 파악, 유민(流民) 방지, 각종 국역(國役)의 안정적인 조달 등을 위해 도입됐다. 호패에는 착용자의 신분, 지위, 거주지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명문으로 새겼다. 따라서 오늘날로 치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일면을 지녔다. 호패는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관원인 경우에만 관청에서 제작한 것을 지급받았다. 나머지 대부분의 경우는 백성 각자가 성명, 출생신분, 직역, 거주지 등을 패에 새긴 후 관청에 제출하면 관청이 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낙인을 찍어 발급하는 형식을 취했다. 현재 문신 김희(金憙, 1729∼1800)의 호패가 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그의 호패 앞면에는 '김희(金憙) 기유생(己酉生) 계사문과(癸巳文科)'라고, 뒷면에 '갑진(甲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김희라는 인물은 기유년(영조 5, 1729)에 태어나 계사년(영조 49, 1773, 당년 45세)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갑진년(甲辰年, 정조 8, 1784)에 이 호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조선 전기인 태종 때 처음 도입됐다. 이의
우리나라 최초의 의서는 1236년(고려 고종 23)에 간행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이다. 당시 고려 조정은 약재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향약구급방을 간행했다. 그러나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이후 1417년 7월 의흥현(義興縣)에서 현감 최자하(崔自河)에 의하여 중간(重刊)됐으나 이 역시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일본 궁내청서릉부(宮內廳書陵部)가 소장하고 있다. 향약구급방은 고려 중기의 의약적 지식을 고찰하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본초학, 약용식물, 고려어(高麗語), 이두(吏讀) 표기법 연구 등에 있어서도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이 또 한번 중간된 적이 있었다. 바로 조선 태종 때 인물인 황자후(黃子厚·1363~1440)에 의해서 였다. 의학에 대해서도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었던 황자후는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향약구급방을 증간했다. 그런데 이를 인쇄한 곳이 우리고장 충청도였다. 이때는 충청감영은 충주나 청주목에 위치하고 있던 때였다. '전 판나주목사 황자후(黃子厚)가 계하기를, "향약구급방을 인쇄하여 외방(外方)에 나누어서 생명을 구제하는 길을 넓히게 하소서"하니, 드디어 충청도로 보
440㏄-900㏄-1,400㏄-1,500㏄.오토바이 배기량을 열거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두뇌 크기를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한 것으로, 후대로 올수록 용량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440㏄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쪽 원숭이라는 뜻)의 두뇌 크기로, 대략 400만년전 안팎의 원(猿)인류 모습이다. 900㏄는 호모 에렉투스(직립 인간이라는 뜻)의 두뇌 크기로, 대략 1백만년전의 이른 시기 인류 모습니다. 반면 20만년 전에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슬기사람·네안데르탈인)은 1400㏄,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슬기슬기 사람)는 1,500㏄ 정도의 두뇌 용량을 지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류두뇌는 1차적으로 대략 200만년 전에서 1백만년 전 사이에 2배 가까이 커졌다. 이때 두뇌의 앞머리뼈, 뒷머리뼈, 밑면에 모양의 변화가 찾아왔다. 2차 변화는 대략 50~10만년전 사이에 찾아왔다. 두뇌 용량이 50% 정도 커졌을 뿐만 아니라 모양이 획기적으로 변모했다. 이른바 '높고 반듯한 이마'가 되면서 비로소 '현대인'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옆머리뼈도 팽창했고, 뒷머리뼈는 둥글게 변했다. 인류의 두뇌는 왜 그 용량이 '큰 쪽'으로 진화한 것
춘향전 진양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숲을 울며 불며 나가는디, 치마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씻치면서 농림숲을 당도허여…' 그 뒤에는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거"라는 내용이 이어진다. 인용문 중에 '오리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언뜻보면 어떤 정자의 이름인 듯 하나 그렇지는 않다. 이때의 오리정은 과거 각 지방 고을이 빈객을 영송하기 위하여 군아(郡衙)에서 5리(里) 정도의 거리에 세운 임시 건물을 일컫고 있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처음 부임해오면, 고을 수령이 관복(官服)을 입고, 오리정에 나가 땅에 엎드려 영접했다. 충청도관찰사가 쓴 순력 일기는 전회에 소개한 '충청감영일기' 외에 '금영일기'(錦營日記)라는 것이 또 하나 전해지고 있다. 표제에 보이는 '금영'은 충청도감영의 별칭으로, 공주목에 있던 영문(營門)을 의미한다. 이 일기의 저자는 영조-순조 연간에 관직생활을 한 심이지(沈臣+頁之)라는 인물이다. 그는 정조 때인 1780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했다. 그가 쓴 금영일기에 '오리정'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순력(巡歷)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찰하던 제도를 말한다. 달리 순행이라고도 불렀다. 관찰사의 순력은 왕명을 대신 실행하는 것과 고을의 풍속과 민생을 살피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물론 수령이 행정을 잘 펼치는가 여부를 살피는 것도 주요 임무의 하나였다. 관찰사의 순력 행차는 위용이 대단했다. 행차는 장교·군관·나장·도사·찰방·심약·검률·반당·노자(奴子) 등 많게는 수백인이 수행했다.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등장했다. 나장은 죄인을 다루는 하급직, 심약은 약재 검수관, 율령직, 반당은 호위병 등을 일컫고 있다. 이쯤되면 지금으로 치면 도청직원 전체가 움직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관찰사 행차가 있을 경우 각 고을 연도에는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관찰사는 감사마교(監司馬轎)라고 불리는 말수레를 타고 움직였고,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纛·대형기의 일종), 취라치(吹螺赤)·나팔·대평소 부대를 앞세웠다. 이밖에 사모갑(紗帽匣)·인장, 유서(諭書)·절월(節鉞) 등을 휴대하고 떠났다. 사모갑은 모자, 유서는 임금이 내린 명령서, 절월은 말 그대로 절(節)과 월(鉞)을 일컫는다. '절'은 손에 드는 작은 수기(手旗) 모양으로 관찰사 권위를
근대기 건축물이자 도유형문화재인 청주 양관이 한국기독교사적으로도 지정됐다. 이에따라 국내 개신교 신자들에게 복음순례 코스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최근 청주시 탑동에 위치한 5동의 양관을 각각 한국기독교사적 제 9회, 9-1호, 902호, 9-3호, 9-4호, 9-5호 등으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일신여중고 안과 그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5동의 건물은 각각 포사이드기념관(제 9호), 로위기념관(제 901호), 던컨기념관(제 9-2호), 밀러기념관(제 9-3호), 펄디기념관(제 9-4호)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본래 양관은 6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으나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한개 동(솔타우기념관)은 이번 지정에서 제외됐다. 탑동양관은 한옥식이 가미된 청주 최초의 양옥 건물로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1906년부터 1932년 사이에 건립했다. 이중 가장 이른 1호 양관은 민노아(閔老雅, F.S. Miller) 목사와 그 부인에 의해 지난 1906년 탑동 195번지에 건립됐다. 특히 양관은 전통에서 근대로 변모해가는 과도기적 건축양식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청주
조선 왕조는 대략 5백년간 존속됐다. 이 기간 동안 몇 명의 충청도관찰사가 파견됐을까. 금영공안, 공주감영읍지, 공산지, 충청도선생안 등의 사료에 관찰사 명단이 존재한다. 현재 금영공안과 공주감영읍지는 장서각, 충청도 선생안은 공주향교에 보관돼 있다. 충주감영 시절의 사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으나 이는 조선왕조실록 등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 조선시대에는 정확히 582명이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했다. 성씨와 본관별로 구분하면 전주이씨 30명, 파평윤씨 24명, 암동김씨 19명, 안동권씨 18명, 한산이씨 15명 등의 순으로 많았다. 이중 유명 인물로는 조선 전기의 경우 하륜, 정인지, 맹사성, 남지, 박팽년, 이세좌, 채수, 반석평, 노수신 등이 있다. 조선후기 인물로는 유근, 이안눌, 유백증, 김육, 박세당, 박중양이 등이 있다.충청도관찰사는 재직 기간중 나름의 공과를 남겼다. 재해기간 중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된 안숭효(安崇孝··-1460)는 진휼사업과 함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 과로로 순직했다. 그러자 세조가 이례적으로 부의를 했다.'졸(卒)한 충청도관찰사 안숭효에게 쌀·콩 아울러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