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감찰 장위항 (…)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인용문 중 '백의'는 과거 낙방, 즉 홍패(과거 합격증)를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남 유생들의 백두대간 고개에 대한 인식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충청도 주민들은 백두대간을 '뒷동산' 쯤으로 여겼다. 반면 경상도 주민은 출세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백두대간 고개를 넘어 홍패를 가져와야 자신의 출세는 물론 가문이 부흥하는 것으로 여겼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양민(평민) 이상이면 누구가 응시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으로, 평민이 과거에 합격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유는 경제력에 있었다.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시대 문과(지금의 고시) 최종 합격자의 평균연령은 35세다. 이는 5살부터 글을 읽기 시작할 경우 30년 후에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평균 6만3천명이 응시해 소과 2단계(초시, 복시)
'임자 당신 날 싫다고 울치고 담치고 배추김치 소금치고 열무김치 초치고 / 칼로 물벤 듯이 그냥 싹 돌아서더니 이천 팔십리 다 목가고서 왜 또 날 찾아 왔나.' '당신이 날마다 울치고 담치고 열무김치 소금치고 오이김치 초치고 / 칼로 물친 듯이 뚝 떠나 가더니 평창 팔십리 다 못 가고서 오니 되돌아 왔나.' 두 민요 가사는 같은 듯하지만 다른 면이 있다. 전자는 '서울제' 정선아리랑이고 후자는 '지방제' 정선아리랑이다. 아리장은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변하는 특징이 있다. 중국만주 정암촌의 청주아리랑이 좋은 예가 된다. 서울제 정선아리랑도 정선아리장이 남한강을 타고 내려와 서울에서 변한 것이다. 변화를 이끈 주체는 역시 뗏목꾼이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우리고장 충주 등 북부지역과 경기도 여주 주변에도 정선아리랑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뗏목꾼은 물품거래 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문화의 전파자 역할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건·사고에 얽힌 얘기까지 등장한다. 성종 3년(1472) 우리고장 제천의 정병(正兵) 김중선 등 여섯명이 한강 하류에 이르러 3명은 익사하고 3명은 겨우 목숨을 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땅길이 아닌 뗏목을 이
조선시대에는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 등 이른바 삼금(三禁)정책이 자주 반포됐다. 우금은 농우(農牛) 도살을 금지하는 것, 송금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금년같이 큰 가뭄이 찾아올 경우 삼금정책의 하나인 금주령이 선포됐다. 실록을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한 결과, 조선시대 경우 총 175건의 금주령이 포고됐다. 역대 왕별로는 성종(31건), 영조(29건), 세종(17건), 중종(14건) 순으로 많았다. 금주령은 △근신 절제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 절약의 목적을 지녔다. 금주령은 가뭄이 심한 봄ㆍ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됐다. 또 보통은 중앙 조정의 결정으로 직접 반포됐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도 반포됐다. 그러나 금주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ㆍ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됐다. 금주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같은 내용의 국가법령이
조선시대에는 수년마다 기근이 찾아왔고 수십년에 한번씩은 이른바 대기근 현상이 나타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사는 기상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조선 조정은 그때마다 진휼정책을 실시했다. 그 기본은 인접한 도(道)의 진휼미를 기근이 발생한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가령 강원도에 기근이 발생했을 경우 충주 경원창의 비축미를 육로를 통해 이동시켰다. 실록은 우리고장 충청도에도 대기근이 심심찮게 찾아왔던 것으로 기록했다. '전라도의 쌀 5만 석을 충청도에 옮겼다. 이보다 먼저 본도 감사가 아뢰기를, "기민(飢民)의 전후 수효의 총계가 70만 1천 2백 89인인데 (…) 비록 전라도의 쌀 9만 석을 조운(漕運)하더라도 진휼하여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인용문은 세종대에 발생한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수치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기민의 숫자가 70만1천여명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들은 구휼하려면 쌀 9만석이 필요하나 전라도에서 방출되는 것은 고작 5만석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세종대에는 기상재해에 따른 대기근이 자주 발생했다. '군자감의 묵은 쌀·콩
조선시대 주막문화는 문헌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인 18세기 들어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조선시대 술과 관련된 표현으로 '甁酒'(병주),'壺酒'(호주), '酒幕'(주막), '酒肆'(주사), '酒家'(주가) 등의 낱말이 있다. 병주는 문자 그대로 병에 담겨진 술을 일컫는다. 신윤복의 그림 '홍루대주(紅樓待酒)'에 등장한 용기가 병주인 것으로 추정된다. 한 패의 한량들이 기녀방에서 술상이 나오기를 기다기고 있는 가운데 아이 딸린 여성이 병주로 추정되는 용기를 지니고 쪽문을 들어서고 있다. 이때의 병주는 분명히 근처 어디인가의 소매처에서 술을 사오는 모습이다. '호주'는 '병주'와 용기 모양이 비슷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 조정은 가뭄이 크게 들면 금주령을 포고했다. 이때 '병주', '호주'가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뭄이 자못 심하니, (…) 무엇이든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랫사람들은 마음대로 태연히 술을 마시니, 이제부터는 甁酒까지도 금하게 하소서.'- '어리석은 백성이 우연히 한 병의 壺酒를 마시고서 이로 인해 죄를 입는 자가 많으니, 매우 가긍(可矜)
정부가 매장문화재 업무를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지역 문화재계와 학계가 크게 반발하고 있다. 10일 도내 문화재계에 따르면 대통령 직속의 지방분권촉진위원회는 최근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대한 국가 사무를 지자체에 이양키로 결정하고 관련 개정안을 곧 국회에 상정할 예정이다. 이양 내용은 매장문화재의 발굴 허가권, 조사기관의 등록 관리권, 발굴된 유물의 국가 귀속 처리권 등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문화재청은 국가, 지방자치단체, 민간 등에 의해 진행되는 각종 개발사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매장문화재를 보존하는 노력을 해왔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기업은 그 속성상 문화재 보존보다 지역개발에 관심이 더 많아 매장 문화재가 발굴·수습될 경우 이를 탐탐치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방으로의 이양 소식이 알려지자 도내 고고학계와 발굴기관 전문가가 대거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한국고고학회, 호서고고학회, 한국고대사학회, 한국청동기학회 등 10개 단체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10개 단체는 성명서에서 '매장문화재 보존 관리는 다른 일반 문화재의 보존 관리와 더불어 민족문화 정체성 확립과 유지의
청주 신항서원이 창건 당시에 제향한 인물은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였다. 임진왜란 10년 후에는 김정, 그리고 조금의 시차를 두고 한충, 송준길, 송상현, 이득윤, 이이, 이색 등의 위패를 차례로 추향하게 된다. 이와 관련, 김수항이 지은 신항서원 이건(移建) 상량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같은 당에 각기 따로 신위를 배설한 것은 도덕의 고하의 차이를 나타냄이라. 한 중간에 가장 높이는 신위(위패)를 남면하여 배설하고…'- 인용문은 '도덕의 고하에 따라' 신위를 새롭게 배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중앙에 자리잡은 위패는 율곡 이이(李珥·1536∼1584)였다. 서원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앙 자리가 위계가 가장 높고 중요시됐다. 신항서원은 이후 화양서원이 건립되기 전까지 청주목을 대표하게 된다. 봉안된 위패 중에 김정(金淨·1486∼1521), 한충(韓忠·1486-1521)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생몰 연대뿐만 아니라 사림파라는 점이 같다. 김정은 우리고장 보은, 한충은 청주가 고향이다. 1519년(중종14) 조광조 등 사림파가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동지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중죄
서원(書院)과 사우(祀宇)는 명현과 관련된 전통시대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그 기능은 좀 다르다. 서원은 유학 발달과 관련된 충신이나 사표로 삼을 만한 인물을 제향한다. 반면 사우는 가문의 인물을 주로 모시고 있다. 우리고장 충주 신니면의 박팽년 사우(충북도기념물 제 27호)가 대표적인 사례로, 순천박씨 문중이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청주를 대표하는 서원으로는 신항(莘巷)서원이 있다.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3) 조강 등이 청주지역 여러 사림들과 상의하여 지금의 용정동(속칭 이정골)에 세웠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마을 이름을 딴 '유정'(有定)서원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경연, 박훈, 송인수 등 3위의 위패를 모셨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란 기간중 왜군에게 점령당한 청주도 다른 지역 못지 않게 전화를 입었다. 유정서원도 예외가 아니어서 복구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란후 농경지가 급감하고 유랑자가 많아진 상황에서 복구가 쉽지 않았다. 당시 유정서원의 원장은 서계 이득윤(李得胤·1553~1630)이었다. 그의 문집인 서계집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동향의 院儒가 무려 1백명에 가까운데 지금 참여하는 사람은 불과 11명에 불과
북한 종군 기자들도 한국전쟁 최대 양민 학살의 하나로 꼽히는 영동 노근리 사건을 취재·보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 지휘부는 전군에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 제목의 전시 문서를 하달하는 등 노근리 사건을 선전활동에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얼마전 '한국전쟁 당시 북한자료로 본 노근리 사건'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노근리 사건과 관련해 한국과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문은 다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방 박사의 논문은 북한이 전쟁 중에 배포했던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으로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월북 종군기자인 이태준은 8월 5일 경북 김천에서 발신한 '전선으로' 제목의 로동신문 기사에서 노근리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황간에서 기차터널 속에 피난한 촌사람 백여명에게 굴 양쪽으로부터 박격포를 들러 쏘았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중상자 한 명과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젖먹이 하나 이외에는 모조리 처참한 죽음을 당했고(…)' 또 북한 종군작가였던 전욱은 8월 19일자 '조선인민보' 등에 기고한 글에서 희생자를 2백여명으로 적기도 했다. '나는 인민군대 동무들과 그 굴 안에 들
전통시대 주막의 외형적인 모습은 풍속화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김홍도와 신윤복의 주막그림은 그 사실성이 돋보이고 있다. 주막 내부의 모습도 궁금하다. 이 부분은 옛문헌, 특히 조선후기~일제 강점기의 외국인 일기류와 보고서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선교가 샤를르 달레(C.C. Dallet·1829~1878)는 조선후기 주막의 밥상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72~1874년에 작성한 '조선교회사서론'에서 주막의 밥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보통 음식은 쌀과 고추와 남새이다.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거기에서 조금의 육물과 자반을 덧붙인다. 이런 식료품들은 소금물과 더불어 깨나 아주까리나 박하의 기름으로 요리한다. 쇠고기는 서울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고 염소고기는 보기 힘들고, 그 대신 개고기가 있는데 선교사들은 다들 그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채소에 관해서는 순무와 중국배추와 질경이 잎과 고사리 밖에는 별로 없는데, 고사리는 퍽 많이 소비된다.' 당시 주막상에서 4찬 이상이나 고기류의 구경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사리가 많이 소비된 것은 건조화가 가능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국출신 여류 여행가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