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회에 중종대의 충주목사 안위(安瑋·1491∼1563)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사실 그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다. 실록은 그가 한 쪽 눈이 멀었다고 적었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간원(諫院)이 아뢰기를, "예조 좌랑 안위(安瑋)는 한쪽 눈이 멀었는데 본조(本曹)는 조정의 예모(禮貌)를 맡는 곳이고 또 객인(客人)을 접대할 때에 보기에 민망하니 가소서." 하니…'- 중종은 이에 대해 "다른 직임이라면 오히려 할 수 있거니와 객인이 보는 곳에는 예모에 합당하지 않다. 아뢴 대로 갈라"고 이직을 하명한다. 그러나 그는 신체 장애를 극복하고 구황행정을 잘 펼쳐 조선시대 특별 진급의 일종인 '가자'(加資)를 받았다. "충주목사 안위는 관직에 부지런하고 검소하였고 일 처리가 자세하고 익숙하여 진휼하는 일이면 다 강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조치해서 때맞춰 구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내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안위는 구휼행정만 잘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손수 구황음식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바로 '충주구황절요'다. 이 책은 1541년(중종 36) 안위가 충주목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기관(記官) 홍윤창(洪胤昌)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내용
충주 고구려비(국보 제 205호)를 보존할 전시관이 공사 2년만에 준공돼 오는 19일 문을 연다. 충주시는 충주고구려비(구 중원고구려비)가 본래 위치하던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이날 개관식을 갖고 관람객을 본격적으로 맞을 예정이다. 공무원이자 예성동호회 회원이었던 고 김예식(신니면 출신) 선생은 '중원 고구려비 발견 경위' 글을 지난 1979년 '예성문화' 창간호에 기고한 바 있다. 기고문에 따르면 지난해 서거한 황수영(전 동국대총장) 박사는 충주 고구려비가 발견되기 2년전 이미 충주에 고구려 석비가 존재할 가능성을 예견했다.이와 관련, 충주고구려비가 지난 1979년 발견된 데는 노학자의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견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년 전인) 1977년 동국대 황수영 박사께서 충주를 방문하셨다. 황 박사님은 '충주에서 진흥왕순수비류가 발견되어야 하는데, 만약 고비(古碑)가 발견되면 꼭 연락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황 박사가 충주에 고구려 석비가 존재할 가능성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충주가 지니고 있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충주는 고구려비 발견 이전부터 봉황리 마애불상군(보물 제 401호), 건흥5년명 금동불상, 장미
이문건(李文楗·1494∼1567)이 쓴 '묵재일기'에는 양아록 주인공 숙길(淑吉) 외에 맏손녀 숙희(淑禧·1547~?)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이문건은 대를 이을 손자 숙길이가 태어났을 때는 축배를 드는는 등 부산을 떨었다. 맏손녀 숙희가 태어났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점차 숙희의 행동이 맘에 들었는지 여러 행동을 촘촘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숙길이 누나 숙희도 여느 아이와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많았다. 이문건은 1553년 일기의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아이는 약질로 태어났으며 성품이 밝고 명랑하나 조급하고 잘 울었다. 계축년(7살) 8월 풍열을 앓는 것이 경기와 같았는데 약을 썼더니 차도가 있었다. 그해 9월에 아랫니를 갈기 시작했다." 이문건은 성주에 두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숙희는 할어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주로 위채에서 생활했고, 이때 일기를 매일 쓰고 또 편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인지 숙희는 할아버지 이문건에게 "나도 글을 가르쳐달라"고 자주 졸랐다. 이문건은 묵재일기 한 부분을 이렇게 적었다. "어제부터 천자문을 쓰기 시작하였다. 숙희의 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희는 9살 때 육갑, 13
조선시대 사헌부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검찰에 해당한다. 그 수장은 종2품의 대사헌이다. 그 밑으로는 종3품의 집의(執義), 정4품의 장령(掌令), 정5품의 지평(持平) 등이 이었다. 사헌부 벼슬아치는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했기 때문에 그 직위에 관계없이 '대간'(臺諫)이라고 통칭되기도 했다. 성종 연간에 사헌부 집의를 지낸 인물로 안위(安瑋·1491∼1563)가 있다. 사료를 보면 그는 1539년 사헌부 집의가 되어서 소세양(蘇世讓)과 함께 당시 세도가인 대윤 윤임(尹任·1487-1545)을 탄핵하다가 오히려 미움을 사서 1542년 우리고장 충주목사로 좌천됐다. 이를 두고 조정에는 쑥덕공론이 많았다. 당시 사관이 '이해되지 않는 인사'라고 생각됐는지 실록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사론(史論)을 적었다. '사신은 논한다. 전에 소세양(蘇世讓)이 윤임(尹任)을 탄핵하려고 장령 안위(安瑋)에게 부탁하여 대론(臺論)을 유발하려다가 끝내 실행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후에 안위가 충주 목사로 나가고 안위의 아우 안현(安玹)이 전라 감사로 나가게 되자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했었다.'- 조선시대 도적이 창궐은 탐관오리의 횡포 외에 가뭄, 홍수 등 자연재해와
지역 성주이씨 문중이 얼마전 묵재 이문건(李文楗·1494∼1567) 부부의 묘를 경북 고령에서 문중산이 있는 괴산문 문광면 대명리 송면산 자락으로 이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원피스인 철릭(帖裏), 지석의 일종인 묘지명 등 부인 안동김씨 '돈이'(敦伊·1497-1566)의 유품이 다량으로 발견됐다. 명종 때 장조카 이휘가 을사사화에 연루돼 극형당할 상황에 놓였다. 이때 이문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 신주를 본인 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이때 일기를 이렇게 적었다. '누님이 새벽에 오셨다. 함께 울었다. 밥과 국과 술잔을 가지고 신주 앞에 차려 놓고서 통곡하였다.'- 능지처참을 당할 정도의 대역죄를 지었으면 삼촌인 이문건도 중형에 처해졌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문건이 고향유배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았다. 김언묵의 딸인 돈이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사촌간이었다. 이문건과 부인 안동김씨의 부부금슬은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한번 대판싸운 내용이 묵재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문건이 외박을 하고 들어오자 안동김씨 돈이가 이렇게 바가지를 긁는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조선 전기에도 전통운반 수단으로 수레가 긴요하게 사용됐다.수레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되는 세곡(稅穀)은 물론 서민용 소금 운반에도 사용됐다. 세종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우리고장 충주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단월역(丹月驛)에서 양재역(良才驛)까지 도로(道路)를 정비하게 하고 수레를 사용하여 수송을 원활하게 하라는 계가 있었다. '충주 단월역에서 양재역까지 도로가 평탄하여 수레가 다닐 수 있으니 선공감으로 하여금 수레를 4대씩 만들어 주게 하여 잡물을 수송하게 하고…' 그러나 수레는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레는 예로부터 바퀴 둘레에 철판을 입히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조선후기 기록인 정조실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여러 고을들이 모두 한두 마리의 우차(牛車)를 사용하여, 곡식을 운반하고 시탄(柴炭)을 실어나르느라 수백 리의 사이를 오고가고 했는데, 제작이 거칠고 둔하여 멀리 가기는 불가능했음은…' 이처럼 조선시대의 교통여건이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한 데는 도로관리도 한 몫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웃을 일이지만, 당시 조정은 도로가 너무 잘 관리되면 자칫 외적 침투로로 악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청주시민들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곳을 '작천'(鵲川) 또는 '까치내'라고 부르고 있다. 언뜻 '까치내'는 조류 까치를 연상케 하나 그렇지는 않다. 현재 두 개의 어원설이 제기돼 있다. 하나는 '까치내'를 '아치내'의 변형으로 보는 견해다. 이때의 아치'는 '작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설날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한다. 이때의 '까치'도 '작다'라는 뜻의 '아치'가 변한 말이다. 또 하나는 '가지내'가 '까치내'로 변했다는 설이다. 이때의 '가지'는 '갈래' 즉 '지천'(支川)을 의미한다. 미호천이 큰 하천이라면 무심천은 갈래 하천, 즉 지천으로도 볼 수 있다. 두 어원 사이에 정설은 아직 없다. 까치내 일대에 형성된 들이 '팔결들'이다. 대략 오근장역 북쪽에 위치하는 들로 보면 된다. 어문학자들에 따르면 팔결들의 한자식 표기는 '八結坪'(팔결평)이었다. 팔결들은 의외로 농경지 면적을 측정하는 방법인 '결부법'(結負法)과 관련이 있다. 결부법은 경무법(頃畝法)과는 달리 토지의 비옥도를 토지 면적에 반영한 측량법으로 조선시대 세수(稅收)의 기준이 됐다. 이 경우 '八結坪'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여덟 결(結)의 들' 정도가 된다. 조선시대 1결의 넓이는
전회에 미호천의 어원이 '미꾸지'(한자 표기는 彌串)라는 지명에서 유래됐다고 밝힌 바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미꾸지'에서 물고기 '미꾸라지'를 연상하고 있다. 미호천에는 얼마 전까지 천연기념물 제 454호인 미호종개가 서식했다. 미호종개도 미꾸라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사촌격인 '미꾸리'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종 분류상은 분명히 다르다. 한지 표현으로도 미꾸라지는 '추어'(鰍魚), 미꾸리는 진흙 미꾸라지를 뜻하는 '이추'(泥鰍)로 적고 있다. 그러나 '미꾸지'는 '미꾸라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명이다. 미호천에 미꾸라지가 많이 살아 '미꾸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순우리말 '곶'(串)은 해안가나 내륙하천의 툭 튀어나온 지형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경북 포항의 호미곶, 북한 황해도의 장산곶 등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과장하면 닭의 며느리발톱처럼 돌출된 모습을 하고 있다. '미꾸지'(彌串)도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에서 서쪽으로 승용차를 몰면 궁현리, 산단리, 사곡리를 거쳐 삼거리에 도달한다. 반면 부강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면 명학리, 내판리를 거쳐 역시 삼거리에 도달한다. 이곳이 전회에도 언급한
청주·청원이 통합됐다. 이와 관련, 벌써부터 미호천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호천의 어원은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복잡하고 의외로 '문화 권력'과 관련이 있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미호'(美湖), 즉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과는 관련이 없다. 미호천이라는 지명은 세종시 동면 예양리 '미꾸지'라는 지명에서 시작됐다. 한국교원대 김순배 박사의 논문에 따르면 이 '미꾸지'는 1864년의 대동여지도에는 한자 '두루 미, '곶 곶' 자를 쓴 '미곶(彌串)으로 표기돼 있다. 이후 1872년의 연기현지도에는 '아름다을 미', '곶 곶', '나루진' 자를 쓴 '미곶진'(美串津)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지금의 지명인 '아름다울 미', '호수 호' 자를 쓴 '미호'(美湖)로 변했다. 그러나 '미호'라는 지명은 지금은 세종시(구 충남 연기지역)보다 청원군 강내 지역에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나름의 사연이 있다. 조선후기 연기군 동면 예양리 일대의 유력한 재지사족은 이른바 '결성張씨' 문중이었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시대 양반가는 유교정신으로 무장된 계층이다. 따라서 결성장씨 가문이 '미꾸지'라는 투박한 지명보다, 일대를 '양인동'(養仁洞·仁을 키
1785년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북경에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李承薰)이 서울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기도회를 갖다가 순찰 중이던 포졸에게 적발됐다. 이때 교인으로는 남인계 집안인 정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와 10여명의 교인들이 김범우의 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결국 "서학(西學)에는 좋은 곳이 많고 그른 곳을 모른다"며 종교적 양심과 신념을 굽히지 않은 김범우는 우리고장 단양(일부에서는 밀양 단장 주장)으로 유배된 끝에 장살(杖殺) 후유증으로 1년만에 사망했다. 현재 한국 가톨릭은 김범우를 첫번째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한국 가톨릭에 대한 박해의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사건을 계기로 충북 중·북부 지역과 원주, 영월 등 강원 남부지역의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올라온 후 괴산, 연풍, 제천, 단양 , 강원도 남부지역 등 백두대간 서쪽 산골로 대거 숨어들었다. 이들은 산자락 토굴 등에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굽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신앙 네트워크를 갖췄고 그것은 교우촌으로 성장
[충북일보] 전교조 충북지부와 전국공무원노조 충북지역본부·충북소방지부·충북교육청지부는 19일 "정부는 공무원 생존권 보장을 위해 임금을 대폭 인상하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충북도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무원 임금은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2023년 기준 83.1%까지 하락해 역대 최대로 격차가 벌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한국행정연구원의 지난해 공직생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 직무 만족도는 하락하고 이직 의향은 지속해서 상승하고 있다"며 "5년 이하 재직 공무원의 72%, 6∼10년 재직 공무원의 75%는 이직 의향의 이유 1순위로 '낮은 보수'를 꼽았다"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우리의 요구는 최소한 실질임금이 삭감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라며 "정부는 내년도 공무원 임금을 6.6% 인상하고, 공무원 임금이 100명 이상 민간사업장 대비 100%에 도달하도록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집행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기본급 인상과 함께 공무원 하위직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며 "정액급식비 3만 원 인상, 6급 이하 직급보조비 3만5천 원 인상, 초과근무수당 단가 감액률 인상, 명절 휴가비·인상을 요구한다"고 했다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충북의 핵심 전략이자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클러스터 구축이 추진될 전망이다. 도내 반도체 기업이 집적화한 지역에 조성해 충북 반도체 산업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충북도는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계획 수립을 위한 기획 연구용역에 들어갔다고 19일 밝혔다. 용역 기간은 오는 11월까지 6개월이다. 용역을 맡은 업체는 충북 지역 반도체 앵커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 분포와 국내외 반도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한다. 도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진단하고 다른 시·도의 우수 사례 등을 통해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충북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의 필요성과 논리를 개발한다. 클러스터 지정에 따른 전략과 로드맵을 마련한다.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핵심 분야 선정과 산업 생태계 강화 전략도 수립한다. 경제적·정책적 타당성을 분석해 당위성을 검토한다. 다목적 방사광가속기와 기회발전특구와 연계하는 방안도 살펴본다. 가속기는 청주 오창에 구축 중이며 특구는 지난해 11월 제천과 보은, 진천, 음성 지역의 5개 산업단지가 지정됐다. 면적은 109만6천500평(362만4천986.2㎡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