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승억(孫承億, 1893~1934)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될 만큼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1919년 충주에서 비밀결사 독립단(獨立團)을 조직하였고, 4월 1일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이다. 또한 출옥하던 당일에 옥문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어 재차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결국 자결로써 불굴의 항일의지를 표출하며 장렬히 순국하였다는 사실 정도이다. 많지 않은 자료이지만, 손승억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온 몸으로 항거한 항일투사라 할 수 있다.불의를 참지 못하는 아이 손승억은 1893년 10월 21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화석리 방추마을에서 아버지 손석우(孫錫祐)와 어머니 안산김씨(安山金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해손씨(平海孫氏) 39세손이다. 그의 가문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병조판서(兵曹判書),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 등을 배출한 명문 양반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잘 알 수는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참모 홍림(洪霖) 등이 저항을 거의 못하고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그만큼 이인좌 반란군의 기습작전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 '곧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문이 청주목과 경기도 일대에 쫙 퍼져있었다. '윤순이 아뢰기를, "무신년에 신이 감호사로 내려갈 때에 용인·광주·양지·죽산·청주에서는 술을 많이 빚어 놓고 역적들의 군사를 기다리는 자가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을 보면 지금의 사단장격인 당시 충청병사 이봉상은 이인좌의 참모 목함경(睦涵敬)에게 청주읍성 안에서 살해당했다. '임금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목함경을 문초하니, 목함경이 공초하기를,(…) "이배가 병사(兵使)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에게 대문 안에서 베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때 닭이 울자 이인좌가 신에게 환도와 군복을 주었습니다. 낱낱이 모역한 것이 사실입니다."- 인용문의 병사는 이봉상, 신은 목함경 등을 의미하고 있으나 청주읍성 4대문 중 어느 문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이봉상은 첫닭이 울 때 쯤 목함경에 의해 대문 안에서 살해당한 것은 분명하다. 남연년을
속보= 2일 여성가족부가 일본군 위안부 내용을 다룬 충북일보의 '미즈키 시게루 라바우루 전기'(1면) 기사와 관련해 이날 본보에 해당 출판물을 접하게 된 경위 등을 문의했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이날 "책이 출간된지(1997년)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고, 여성가족부도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따라서 해당 책을 접하게 된 경로, 현재 보관처 등을 알 수 있느냐"며 이메일로 문의했다. 충북일보는 이에 대해 △책 겉표기 △책속의 관련 사진 △미즈키 시게루의 목격과 당시 체험이 중점적으로 수록돼 있는 30쪽 67쪽 내용을 스캔, 이메일로 송부했다. / 조혁연 대기자
태평양전쟁 당시 현장을 실제로 경험·목격한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부터 강제로 끌려온 종군위안부들이 야자림 움막에서 1명이 하루에 50명 정도의 군인을 상대했다"라고 책을 통하여 증언한 것을 본보가 처음 확인했다. 현재는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미즈키 씨의 이같은 증언은 전장에서 목격했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실제 모습을 일본인 스스로 기록으로 남긴 것이어서, 향후 종군위안부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주요 증거가 될 전망이다. 본보는 최근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접하고 국내 언론사의 기사화 여부를 확인했으나 아직까지 이를 인용하거나 보도한 사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일본인 미즈키 시게루는 지난 1943년 남태평양 '라바우루'(ラバウル) 전장에서 목격하고 체험한 기억을 바탕으로 1990년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우루 전기'(水木しげるの ラバウル戰記)를 문고판 형식으로 출간했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지난 1943년 11월 스무살 나이에 징병을 당해 고향 돗토리현을 떠나 라바우루에 배치됐고, 그후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왼쪽팔을 잃은 채 귀국해야만 했다. 라바우루는 태평양 비스마르크 군도의 주도(主島)인 뉴브리튼 섬의 주요 거점으로, 태양양전
[충북일보] 청주시 수동에 충북도기념물 제 17호인 표충사(表忠祠)가 위치하고 있다. 한자 '表'가 동사로 쓰이면 '나타내다', '밝힌다' 등의 뜻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표충'은 '忠을 밝힌다'라는 뜻이고, 따라서 전국에는 사당 표충사가 많이 존재한다. 밀양에는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있고, 우리고장 옥천에도 같은 이름의 조헌 표충사가 있다. 1728년 무신란 때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 등이 청주읍성에서 희생됐다. 청주 수동의 표충사는 이들 3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사당 옆에는 기생 해월(海月)의 열녀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는 홍림의 애첩이었다. 표충사는 1728년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부터 당시 조정 차원의 건립이 검토됐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라 사호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그러나 사당 표충사가 완공된 것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731년(영조 7)이었다.
'간판어는 세상을 변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다.' 충북대학교 오영미 씨가 석사논문 '충주시 간판어 연구'를 통해 충주지역 상업건물에 내걸린 상호명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이를 위해 구시가지인 성서동과, 성내동 그리고 신시가지인 연수동, 칠금동 등 4개 동 1천5백32개(63개 업종) 간판어를 수집했다. 분석 결과, △혼종어 간판어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구시가지에는 한자어 간판어가 많은 반면 신시가지에는 외래어 간판이 많은 점 등이 충주지역 간판어의 주요 특징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 혼종어는 고유어+한자(예: 까치방), 고유어+외래어(예: 얼짱몸짱 피부관리), 한자+외래어(예: 삼일커텐), 고유어+한자+외래어(예: 원두커피 볶는 집)가 결합된 간판어로 전제 49.7%를 차지했다. 혼종어 간판어 중에는 고유어+한자어가 25.7%로 가장 많았다. 후자의 경우 구시가지인 성내동은 한자어 간판이 48.6%를 차지 매우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는 가구, 술집, 병원, 음식점, 다방 등 중장년층이 이용하는 업종이 많이 분포하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반면 구시가지이지만 차 없는 거리, 패션거리 등으로 인해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성서동은 외래어 간판 비율이 3
권병덕(權秉悳, 1868~1944)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동학 입도와 동학농민운동 참여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고, 1907년에는 시천교에 가입하였다가 1916년 천도교로 귀의하였다. 이후 손병희를 보좌하며 천도교의 주요 직책을 수행하였고, 3·1운동 이후에도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영원한 천도교 지킴이였다.◇청주에서 태어나다 권병덕은 1868년 당시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부친 권문영(權文永)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윤좌(潤佐)이며,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을 사용하였다. 그의 선대는 경북에서 살았는데, 문경 호계면에 증조부모와 조모의 묘소가 있고, 조부의 묘소는 상주 화서에 있다. 그가 청주에서 태어난 것은 모친 신문화(申文嬅)가 청주 일원에 세거하던 고령 신씨의 후예로서, 외가에서 출생하던 관례 때문으로 이해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북 상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 신문이 그를 상주 출생이라고 잘못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주에서 그는 종숙으로부터 《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오늘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꼭 105주기가 되는 날이다. 또한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한 지도 꼭 5년이 되는 날이다. 그런데 거리 곳곳에 천안함 46용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여럿 나부끼건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대북전단 살포를 둘러싸고 조성된 험악한 형국은 치킨게임을 방불케 한다.'밸런타인데이'와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지난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날의 의미가 변질되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인식되고 있다. 이날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던 논쟁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니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고쳐 부르자는 논쟁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별 감흥이 없는 필자이지만, 구태여 그날을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로 부르자는 것은 국수적 애국심의 억지 발동인 것 같아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밸런타인데이에 연인 사이에 초콜릿을 주고받더라도,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그날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로 새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월 14일, 한 TV 프로그램이 '안중근 의사 사망선고일'이라고 대문짝만한 자막을 내보내며 방송하는 것을 보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충북일보] 최근 청주시 미호강변에서 아주 기묘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다. 새벽에 수백여 명의 인파가 강변 공원 앞에 줄을 서있는 낯선 장면이 목격되고 있다. 젊게는 30대에서 많게는 70대 노인까지 행렬에 참여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예 돗자리를 펴고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충북일보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미호강 파크골프장에서 '2025 생활스포츠지도자' 실기·구술 시험을 보러온 응시자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야심한 시간에 줄을 서고 있었을까. 그 이유는 파크골프 종목 생활스포츠지도자 2급 자격증을 따기 위한 공식 시험장이 전국에서 청주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3천여 명의 응시자들이 서로 연습기회를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 응시자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이냐고 묻자 "밤 11시부터 줄을 서도 새벽 5시 30분 파크골프장 개장시간에 대기번호 후순위를 받을 정도"라며 "줄을 서지 않으면 입장조차도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춘천에서 왔다는 또 다른 응시자는 "사람이 너무 몰려서 하루 1번 겨우 연습하는 상황인데 이마저도 전날부터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청주시가 청주시설관리공단을 도시공사로 전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16일 시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열리는 청주시의회 정례회에 '청주도시공사 설립 및 운영 조례'를 상정할 예정이다. 시가 시의회에 상정한 조례안에는 기존 청주시설관리공단의 기능을 확장해 도시개발사업과 위수탁·대행사업을 수행하는 통합형 공사를 만드는 방안이 담겼다. 시가 공사 전환을 추진하는 것은 앞으로 지역에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다양한 개발사업을 타 기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추진하기 위해서다. 현재 청주시는 개발사업을 주도할 주체가 없어 대부분의 개발사업을 LH나 충북개발공사, 민간사업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또 시설관리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현재의 청주시설관리공단으로는 각종 개발사업을 처리할 여건이 안된다는 것도 시가 새로운 컨트롤타워 조직 구성을 서두르고 있는 이유다. 더욱이 청주시는 반도체와 이차전지, 바이오 등 첨단 산업의 중심지역이고 공항과 철도, 도로 모두 발달해 앞으로의 개발 수요는 차고 넘치기 때문에 도시공사 전환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시의 주장이다. 시는 시설공단이 도시공사로 전환되면 도시개발에 따른 이익이 지역에 환원할 수 있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