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행궁이 국가 숙박시설인 '椒井院'(초정원) 인근에 위치했다는 사실은 궁의 정확한 위치와 관련해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종대왕의 행궁이 좁은 골짜기가 아닌 '넓은 골짜기의 교통로' 주변에 위치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회에 "이 곳은 동학(洞壑)이 널찍하고 행궁 터가 안온하며 군사들의 환위(環衛)와 초소(樵蘇, 나무를 베고 풀을 깎는 것에도 모두 편리하옵니다"라는 문장을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도승지 이승손(李承孫, 1394∼1463)이 아뢰는 말이었다. 그 뒤에는 "더군다나 초수의 나오는 근원이 멀되 길게 흐르니 이러한 곳은 얻기 쉽지 않습니다"(국사편찬위원회 번역)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 이 문장의 원문은 '況椒水之出 源遠而流長 如此之地 未易得也'로 돼 있다. 해석한 문장 중 '멀되 길게 흐르니'(源遠而流長)는 △행궁이 원탕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그런데 그곳까지 '길게 흐른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 경우 세종대왕 행궁은 원탕 주변이 아닌, 그곳서 먼 곳에 위치한 것이 된다. '源遠而流長'이라는 문장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중 앞 표현 '源遠'은 '根深'과 짝을 이뤄 고문헌에 간간히 등장하는 표현이
1444년 2월 28일, 세종대왕이 한양 도성을 떠나 닷새만에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 행궁에 도착했다. 조선시대 왕은 이념적으로 이 땅과 백성의 주인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머무는 곳은 모두 궁궐로 불렸다. 그 종류는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장전(帳殿) 등으로 표현됐다. 정궁과 이궁은 격이 다르지만 모두 도성 안에 위치했다. 이에 비해 '행궁'은 도성 밖에 지은 임시 궁궐로, 온천이나 왕릉 주변에 많았다. '장전'은 임금이 휴식 등을 위해 임시로 머무는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임시 천막에 해당한다. 세조가 진천을 지날 때 '장전'을 이용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가가 진천 광석(廣石)에 머물러 종재 및 승지 등을 불러서 장전(帳殿)에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종대왕의 초수리 행궁터가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어 왔다. 자주 거론됐던 곳은 지금의 '내수읍 초정리 원탕 일대'와 '북이면 선암리 주왕이' 마을 등 두 곳이다. '주왕이'가 원탕에서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왕 행궁지로 거론되는 것은 지명 때문이다. '주왕'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주)이 왕래했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간행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24일 62회 충북일보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회원 40여명이 탄 버스 안에서 들리는 정호승 시인의 강변역에서가 곽영희(56 재능시낭송협회 청주지회원)씨의 목소리를 타고 순간 버스 안의 고요함을 이끌어 낸다. 함우석 충북일보 주필 겸 클린마운틴 아카데미 교장의 "오늘만큼은 모든 것을 자연과 계곡 속에 모든 것을 풍덩 내려 놓읍시다"란 말에 와 하는 함성을 외친다.김웅식 대장의 계곡 트레킹에 대한 주의사항과 "자연의 순리를 배우는 클린마운틴에서 오늘은 인간의 약함과 또 다른 깨달음, 계곡물에 몸을 맡기는 진리를 깨닫기 바랍니다"라는 말이 끝나자 작은 웅성거림이 들린다.이윽고 4시간을 달린 버스가 방동 약수터 주차장에 우릴 내려놓는다.간단하게 삼삼오오모여 점심을 먹고 드디어 말로만 듣던 방태산 계곡 트래킹이 시작됐다.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에 들어서 슬슬 숨이 거칠어지자 어디선가 속세의 어려움과 풍진을 내려놓으라는 듯 스님의 염불소리가 숨
가마는 집모양 처럼 생겼으면서 누군가를 태울 수 있는 기구를 말한다. 고구려 안악고분의 '주인도'(主人圖)와 '부인도'(婦人圖)에 가마가 등장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오래 전부터 가마를 이용했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고려 가마의 한 종류인 채여(采輿)를 설명하는 내용이 장문으로 수록돼 있다. '위에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 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공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인용문의 '인갈'은 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임금이 탈 수 있는 가마로는 연(輦), 여(輿), 가교(駕轎) 등 3종류가 있었다. 왕실에서는 '덩'이라는 가마도 사용했으나 이는 공주나 옹주가 타던 것이었다. 1444년 세종대왕이 우리고장 청주목 초수리(지금의 초정)를 찾았을 때 어느 가마를 이용했는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은 약간의 '예습'이 필요하다. '연'은 임금이 궁궐 밖으로 먼길을 거둥할
고려시대 우리고장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현종, 공민왕 등이다. 태조는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후 청주를 찾았다. 반면 현종과 공민왕은 거란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피난갔다가 귀로에 청주를 들렸다. 고려 목종과 충렬왕도 각각 강조의 난과 순행 중에 우리고장을 찾은 바 있으나 이때는 청주가 아닌 충주였다. 특히 충렬왕은 순행 중 용안역(지금의 충주 신니면)을 찾았다. 조선전기 청주를 찾은 임금은 태조, 세종, 세조 등이다. 이들은 계룡산, 초수리(초정약수), 속리산 복천암 등을 가는 도중에 각각 청주목을 방문했다. 이와 관련, 세 임금의 어가행렬 모습을 살펴보면 재미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어가행렬 자체를 최대한 간소화하려 했다. 지방관리가 도계(道界)까지 마중 나오는 것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충청도도사(都事) 한질이 와서 문안을 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초수 행차에는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는데, 충청도 도사가 지경을 넘어 왔으므로 번거로운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뒤로는 삼가서 이같이 하지 말라" 하였다."- '참으로 간편한 것을 따르려 하였다'(務從簡便)
경기도 죽산-진천-청주에 이르는 길(지금의 17번 국도)은 조선시대에는 10대 대로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남대로와 더불어 일본 사신들이 자주 왕래했다. 부산에 도착한 일본사신은 영남대로인 문경-수안보-달천을 거쳐 한양 도성으로 들어갔다. 반면 남해안 내이포(乃而浦)로 도착한 사신은 창원-성주-옥천-청주-죽산-용인을 경유한 뒤 한강을 건넜다. 내이포는 지금의 진해를 말한다. '내이포에서 오는 자는 창원·성주·옥천·청주·진천·죽산·용인·한강을 경유하여 입경(入京)하게 하고…'(由乃而浦來者 經昌原 星州 沃川 淸州 鎭川 竹山 龍仁 漢江入京).- 세종대왕이 탄 어가는 3개 대로 중 세번째 대로를 이용, 죽산을 거쳐 1444년 3월 1일 진천 북평천 가에 도착했다. '거가가 진천현 북평천 가에 머물렀다(駕次于鎭川縣北平川邊).- 인용문에 등장한 북평천은 고유지명은 아닌 진천 읍치의 북쪽 하천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워낙 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들판에서 휴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종대왕 어가가 진천에서 초수리(지금의 초정)까지 가는 데 있어, 어느 길을 이용했는지 실록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지형과 당시 도로현황 등을 감안할
조선시대 지방의 도로는 형식상 공로(公路)와 사로(私路)로 구분됐다. 공로는 관료가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니는 길을 말한다. 가령 충청도관찰사가 청주에서 충주를 순력하려면 청주-청안-괴산-음성-충주 등의 공로를 택했다. 반면 사로는 장돌뱅이들이 오갔던 길로, 상로(商露) 혹은 간로(間路·샛길)라고 불렀다. 국가의 동맥으로 오늘날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은 '대로'(大路)라고 표현했다. 시대별로 기준은 다소 달라, 6대로, 9대로 혹은 10대로 등으로 분류됐다.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1770년·영조 46)에서 전국의 대로를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로 가는 길은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제4로, 제주 제5로, 강화 제6로 등으로 각각 명명했다. 같은 해 홍봉한(洪鳳漢)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서 전국의 대로를 국왕이 있는 한양을 중심으로 의주 제 1로, 경흥 제 2로, 평해 제 3로, 동래 제 4로, 상주→통영 제5로, 삼례→통영, 제 6로, 해남→제주 제7로, 갈원→보령 제8로, 강화도 제 9로 등으로 분류했다. 반면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한양∼의주 제1로, 경흥 제2로, 평해 제3로, 동래
세종은 재위내내 여러 질환을 앓았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안질을 심하게 앓았다. 때문에 세종은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부활해 정사의 상당부분을 3정승이 처리토록 했다. '의정부서사제'는 3정승이 국정을 논하고 또 왕의 재가를 받아 정치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첨사(詹事)제도라는 것도 신설해 세자(후에 문종)의 정사 결재권을 크게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조회를 할 때 세자에게 '남면수조'(南面受朝)하도록 했다. 남면수조는 말 그대로 남쪽을 바라보면서 조회를 받는다는 뜻으로, 사실상 국왕에 준하는 대우였다. 모두가 세종의 건강 때문에 비롯된 것들이었다. 세종 재위26년(1444) 청주에서 '호초맛 나는 물이 있다'는 첫 보고가 올라왔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아뢰기를, "청주에 물 맛이 호초(胡椒) 맛과 같은 것이 있어 이름하기를 초수(椒水)라 하는데,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목천현과 전의현에도 또한 이러한 물이 있습니다" 하니.'- 그 다음은 '임금이 이를 듣고 장차 거둥하여 안질(眼疾)을 치료하고자 하여 내섬시윤 김흔지를 보내어 행궁을 세우게 하고, 이 물을 얻어 가지고 와서 아뢴 자에게 목면 10필을 하사하였다'(〃)라는 문장이 이
원나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속국 고려의 임금을 자국영토 후미진 곳으로 귀양보내기도 했다. 고려 27대 임금인 충숙왕도 그런 신세가 됐다. 그는 원나라 조정의 미움을 사 수도 연경에서 1만5천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야했다. 익재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世事는 시끄러워 귀담을 수 없는데 / 다리 위에 말 멈추고 할 말을 잊었노라 / 언제나 태양은 내 마음 밝힐지 / 푸른 산 바라보며 눈물지누나 / 내 언제 믿음을 저버렸던가 / 이국에서 헤매어도 은혜는 아네 / 내 몸 날개 없어 날아가지 못하고 / 슬프다 나 홀로 애만 태우네.'- 이처럼 익재는 고위 관료로서 뿐만 아니라 명문장을 남긴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원작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나머지 8점의 익재영정을 그린 사람과 시기는 각각 다르다. 보은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보관돼 있던 익재 영정은 한번 도난을 당한 후 현재는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보관돼 있다. 자산영당 익재영정은 그의 직계후손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사균(李思鈞·1471∼1536)이 화공에 의뢰해 제작했다. 연산군 10년(1504) 이른바 폐비윤씨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연산군은 이 시기기에 이르러 생모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시문에 두루 능해 대가풍(大家風)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9개의 초상화를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른바 그의 호를 딴 '익재영정'들이다.이처럼 이제현의 초상화가 많은 것은 경주이씨 후손들이 그의 인물됨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많이 이모(移模)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원작을 본떠서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9점의 이제현 초상화는 국립중앙박물관본(국보 제 110호), 가산사 소장본(전남 문화재자료 164호), 구곡사 소장본(전남 유형문화재 189호), 수락영당 소장본(청원군 미원면 가양리·비지정), 구강서원 소장본(경북 문화재 제 90호), 장산영당 소장본(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72호), 용암영당본(충남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도동영당본(경남 산청군 신안면 신기리), 도론영당본(전남 진도군 고군면 도섬리) 등이 있다.원작으로 평가받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을 제외한 8점의 작품중 우리고장 보은군 탄부면 하장리 장산영당에 소장돼 있던 초상화가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현재 경주이씨 장산문중에서 국립청주박물관에 기탁한 이제현 초상화는 가로 96㎝, 세로 165㎝의 크기로 비단바탕에 그렸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강 이름을 구간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당연히 우고장 문화 젖줄의 하나인 금강도 이 범주에 속하고 있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은 금강의 각 나루, 즉 津(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물은 옥천에 이르러 호진(虎津)이 되고, 또 북쪽으로 흘러 적등진이 된다.상주 중모현 물은 황간ㆍ영동을 지나고, 속리산 물은 보은ㆍ청산에서 합류해서 북쪽으로 화인진(化仁津)이 되고, 회인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문의에 이르러서 이원진(利遠津)이 되는데, 이것을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대개 구역별 강이름은 나루의 이름의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작등강은 옥천군 이원면 적등진 앞을 흐르던 강이고, '化仁江'(화인강)은 화인진 앞으로 흐르던 강이었다. 지금의 안내~안남면 수계로 볼 수 있다. '화인'이라는 예쁜 이름은 조선 전기의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등장한다. '대천(大川)은 적등진이 이산현에 있고, 화인진(化仁津)이 군의 동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보은에 이르기 29리, 서쪽으로 회덕에 이르기 13리, 남쪽으로 무주(茂朱)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청주(淸州)에 이르기 13리이다.' 세종실
사라진 북한 지명 중에 '덕원'(德源)이라는 곳이 있다. 지금의 문천시로 강원도 북부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잘 모르면 원산 북쪽을 생각하면 된다. 1674년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시어머니인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남인은 1년(기년복), 송시열은 9개월(대공복)을 주장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런 논쟁은 하찮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입장에서 보면 형(소현세자)을 잃은 효종을 장자(長者·맏아들)로 볼 것이냐, 차자(次者·둘째)로 볼 것이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른바 2차 예송 논쟁으로, 1차와 달리 송시열은 이 논쟁에서 패배했다. 그 결과 유배를 간 곳이 서두에 언급한 함경도 덕원이다. 그러나 우암은 이 유배 때 그리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동생 '時燾'(시도)와 時杰(시걸)이 그곳까지 따라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진천(鎭川)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철령(鐵嶺)을 넘어 덕원(德源)에 이르러 함께 있다가, 4월에 성보(誠甫·송시도 지칭)는 일이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 수보(송시걸
[충북일보] 민선 8기 청주시 출범 이후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던 여름철 꿀잼 물놀이장이 올해도 운영된다. 특히 올해는 오창읍 각리공원과 오송읍 정중근린공원에 물놀이장을 새로 개장해 더 많은 시민들이 물놀이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방침이다. 이에따라 기존의 문암생태공원(문암동), 생명누리공원(주중동), 유기농산업복합서비스지원단지(남일면) 등을 포함하면 청주지역에는 총 8곳에서 물놀이장이 운영된다. 물놀이장은 오는 26일부터 8월 24일까지 60일간 개장한다. 지난해 55일보다 운영 기간을 5일 늘렸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일 3회로 나눠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등 2시간씩 운영하며 월요일은 물놀이장 청소 및 수질관리를 위해 휴장한다. 회차별 이용 가능 인원은 △대농근린공원 300명 △망골근린공원 100명 △장전근린공원 200명 △문암생태공원 200명 △생명누리공원 200명 △각리근린공원 200명 △정중근린공원 200명이다. 이용 방식은 사전예약(30%)과 현장 선착순 입장(70%)이 병행되며 개인은 '청주여기' 앱(APP)으로, 유아단체는 청주시통합예약시스템에서 6월 16일부터 예약할 수 있다. 각 물놀이
[충북일보]경기침체와 고물가 영향으로 설 선물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충북도내 유통업계에 따르면 백화점의 경우 물가 상승 영향으로 10만 원 미만 선물 물량은 지난해 설 보다 5%가량 줄어든 반면, 대형마트들은 5만 원 미만 선물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보이는 백화점 선물세트는 물가 상승 영향으로 구성 상품들의 시세가 전반적으로 오른 영향이 크다. 설 성수품인 배 가격은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다. 6일 청주지역 기준 배(신고) 평균 소매 가격은 10개에 4만2천900원 이다. 지난해 보다 27.37% 비싸다. 지난해 배 생산량 감소와 저장단계에서 고온 피해로 인해 유통 가능 물량이 줄어들면서 가격 상승에 여파를 미쳤다. 이에 기존 사과·배에 더해 샤인머스캣이나 애플망고를 섞은 혼합세트가 증가했다. 명절 주요 선물 상품인 한우의 경우 포장 중량을 줄여 가격 부담을 낮추는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대형마트는 '가성비'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고 있다. 지난해 설 보다 '5만 원 미만' 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커피·차 세트, 김·양말 등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선물 세트가 인기를 끈다. '1
[충북일보] 바이오산업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를 목표로 청주 오송 국제도시 조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충북경제자유구역청과 청주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주 환경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오송은 주변 지역인 오창, 옥산 등과 연계해 오는 2033년 인구 35만5천 명 규모의 도시권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15일 충북경자청에 따르면 오송을 산업과 문화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들기 위한 28개 사업을 발굴해 청주시에 제안했다. 이들 사업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주여건 개선에 초점이 맞춰졌다. 시는 내부 검토를 거쳐 바로 추진이 가능하거나 시급하다고 판단한 현안 10개를 협력 사업으로 정했다. 충북경자청과 시는 최근 협력 사업의 현황과 추진 방향을 공유하고 향후 연계와 협업 방안도 논의했다. 양 기관이 추진할 협력 사업을 보면 먼저 오송 국제도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오송이 '국제도시'라는 인식을 유도하기 위해 시내버스 정보시스템(BIS)을 활용해 홍보에 나선다. 국내 바이오산업 중심지 오송과 첨단산업 집적화와 다목적 방사
[충북일보] 지난 1961년 출범한 사단법인 대한가족계획협회가 시초인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우리나라 가족계획, 인구정책의 변화에 대응해오며 '함께하는 건강가족, 지속가능한 행복한 세상'을 위해 힘써오고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조경순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장을 만나 지회가 도민의 건강한 삶과 행복한 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하고 있는 활동, 지회장의 역할, 앞으로의 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봤다. 조경순 지회장은 "인구보건복지협회 충북세종지회는 지역의 특성에 맞춘 인구변화 대응, 일 가정 양립·가족친화적 문화 조성, 성 생식 건강 증진 등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33년 공직 경험이 협회와 지역사회의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충북도 첫 여성 공보관을 역임한 조 지회장은 도 투자유치국장, 여성정책관실 팀장 등으로도 활약하고 지난 연말 퇴직했다. 투자유치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지역의 경제와 성장에 기여했던 그는 사람 중심의 정책을 통해 충북과 세종 주민들의 행복한 삶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비상임 명예직인 현재 자리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조 지회장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