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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08.03 14:55:02
  • 최종수정2023.08.03 14:55:02

운보 김기창 작품 '화가 난 우향'.

[충북일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는 우향 박래현(1920~1976)의 일생과 예술을 담은 전시회가 열렸다. 수많은 작품 중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우향의 배우자인 운보 김기창(1913~2001)이 그린 '화가 난 우향'이라는 작품이었다. '화가 난 우향'은 가사에 쫓겨 밤에 그림 그리는 부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그린 것으로 사람을 닮은 부엉이들이 눈을 치켜뜨고 있다. 뭔가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다. 생전에 운보는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는 아내를 '부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4자녀를 낳은 우향이 집안일을 마친 밤에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늘 고단했고, 무척 예민할 수밖에 없던 아내에 대한 운보의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우향 박래현

우향(雨鄕)은 지난 1944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 졸업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그 당시 최고의 신여성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에 청각장애가 있는 운보와 만나 부부가 된 사연을 보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드라마틱하고 애틋하다.

우향 박래현이 운보 김기창을 처음 만난 건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 서울에서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우향은 시상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운보의 그림에 반해 작가가 보고 싶어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 나이 지긋한 중견 화가일 것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운보가 30살의 젊은이여서 많이 놀랐고, 그의 훤칠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하얀 원피스에 흰 구두를 신은 우향을 본 운보도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다"고 그 당시 느낌을 나중에 털어놓는다. 둘은 한눈에 반한 것이다.

운보와 우향 부부

하지만 운보는 많이 망설인다. 우향은 군산 대지주의 딸로 일본 유학까지 한 신여성, 운보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가난한 데다 청각 장애가 있는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운보에게 우향은 "그림을 배우고 싶은데 편지를 해도 되느냐"며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군산에서 매주 굴비 선물을 보내고 남산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3년 후 우향과 운보는 결혼에 골인하는데 박래현의 부모님은 결혼을 결사 반대해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운보는 부모님이 안 계셔 친구들만 참석했다고 한다. 신문사는 장애 화가와 엘리트 여성의 만남을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박래현의 선택'이다. 그녀는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한 최상류층으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김기창과 어떻게 결혼하겠다는 평강공주같은 대범하고 당돌한 생각을 했을까? 그것에 대해 우향은 "이 예술가와 결혼하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여건을 만들어 줄 것" 그리고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이었다. 이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신체 장애쯤은 별것 아니라 여길 만큼 우향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것이다. 이를 볼 때 우향은 보통 여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래현 작품

부부가 된 두 사람은 1947년부터 12차례나 부부전 를 여는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러한 왕성한 작품활동 이면에는 두 사람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누구보다 박래현에게 남편의 장애는 차츰 현실로 다가왔다. 특히 자녀들이 태어나자 아이들과 대화하지 못하는 운보의 모습은 참담했다. 이에 박래현은 김기창에게 '구화술(口話術)'을 익히게 해서, 사람의 입 모양을 보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 더 나아가 발성을 연습시켜 어눌하지만 말하는 방법까지 터득하게 한다.

이에 운보는 우향을 위해 예술을 계속할 여건을 만들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한다. 운보가 우향에게 했던 가장 놀라운 지원은, 1969년부터 약 7년간 박래현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운 일이다. 아직은 어린 자녀를 데리고 한국에 홀로 남은 김기창은, 박래현이 "실컷 공부하고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오면, 나도 그걸 골라 갖기로 하지"라며 쿨하게 우향을 미국으로 보낸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운보도 우향 못지 않게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운보 김기창 작품 '석류와 다람쥐'.

운보의 작품을 보면 애틋한 부부애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1969년작 '석류와 다람쥐'라는 작품은 석류나무 위에서 다람쥐 한 쌍이 노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운보가 자신의 맘을 담아 우향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향은 귀국 판화전을 계기로 새로운 시도를 전개할 무렵, 1976년 5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죽으면 다 자는 잠, 살아서 왜 자냐"며 밤에도 자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던 탓으로 우향의 사인(死因)은 간암로 나왔지만 엄밀하게 보면 과로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미술사에 남는 걸작들이 더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많이 아쉽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수행의 도구이고 그 수행의 찌꺼기가 그림이다"는 말이있다. 우향은 과도하게 몸과 정신을 소모시키고 그 찌꺼기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 운보는 25년을 홀로 살다가 2001년 88세로 우향의 뒤를 따른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운보의 집에 가면, 고래 등 같은 한옥과 미술관은 남에게 넘어갔지만, 그나마 양지바른 동산에 만들어진 안식처에서 운보와 우향은 나란히 누워있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창작의 길을 함께 걸은 동지이자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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