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에세이 - '건축학개론'

스무 살 가을에 시작된 첫사랑 그리고 15년 후…

  • 웹출고시간2012.10.21 17:54:1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어린 사랑, 서툴기에 아름다운

정말이지 딱 요즈음의 날씨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과 승민이 처음 만난 날은. 첫사랑에 설레는 얼굴처럼 발그스레 물들어가는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지는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 우연한 피사체로 걸어들어온 그녀……. 건축과 1학년인 승민과 피아노를 전공하는 음대생 서연이 만난 곳은 건축학개론 강의실에서이다. '자신이 사는 동네를 사진에 담아 관찰'하라는 과제를 받은 그들은 자신들의 동네인 '정릉'을 함께 탐구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서연은 동네의 잡풀이 무성한 한옥 폐가로 승민을 데려간다. 주저하면서도 발을 들여놓는 승민과 달리 '멋있다'며 스스럼없이 집을 손보는 서연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서연은 멈춰 있던 시계에 밥을 주고 작은 화분에는 씨앗까지 심어 둔다.

"가을에도 꽃을 심어? 무슨 꽃인데?"

"궁금하지? 무언가를 심어 놓고 봄을 기다려도 좋을 것 같아."

서연이 심어 놓은 것은 과연 가을을 지나 길고 혹독한 겨울을 견딜 만한 것이었을까. 서연이 심은 것은 어리고 서툰 그들의 사랑을 대비하여 먼 후일의 만남을 기약하는 사랑의 마음은 아니었는지.

첫사랑의 재구성

영화의 첫 장면, 작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바닷가와 노란 들꽃, 마치 영화 '시네마천국'의 처음 화면이 연상될 정도로 제주 바다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맑고 소슬한 공기가 화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대학 때와 달리 완연히 성숙해진 서연이 공사를 하다 중단한 듯 황폐화된 집안을 둘러본다. 제주의 고향집은 결혼 3년만에 막 이혼한 서연의 마음을 대변하듯 헝클어지고 어지럽다.


그녀는 대학시절 친구 승민을 찾아가 건축을 의뢰한다. "누구세요?" 그는 못 알아보는 척 이렇게 묻는다. 그토록 짝사랑했던 첫사랑 그녀를 못 알아볼 리 없다. 하지만 그녀의 현재 처지를 모르는 그로서는 대학시절 자신의 자존심을 무참히 뭉개버린 그녀를 모르는 척, 좋아하지 않았던 척하는 것이 유일한 복수가 아니었겠는가. 돈 많은 선배와 술에 취해 나란히 서연의 자취방으로 들어가던 그들의 모습을 15년이 흐른 그때까지 승민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그 선배와 반드시 잤다고는 볼 수 없다. 집에 들어가기 전 골목길에서 서연은 그 선배의 입술을 몇 번이나 피했었으니까.... 하지만 서연이 직접 그린 미래의 집이 붙어 있는 건축 모형을 들고 밤새 추위에 떨며 그녀를 기다린 승민의 마음은, 그 장면을 목격한 그 순간으로 냉동되어 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외로운 마음에 첫사랑으로써 삶에 대한 디딤돌을 놓고자 했던 서연은 의기소침해지며 승민에게 소소한 시비를 건다. 승민이 그때 어리고 서툴지만 않았더라면, 남자의 쓸데없는 자격지심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승민은 서연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첫눈 오는 날의 빈집

서연은 첫눈 오는 날 승민에게 한옥의 빈집에서 만나자고 먼저 제안을 하였다. 제주 여자인 서연은 도시내기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나이답지 않게 한옥의 마루를 쓸어보며 버려진 그 집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서연의 참모습을 좀더 깊이 들여볼 수 있었다면 승민은 서연과 헤어지는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밤늦어 흰 눈이 어둠을 밝힐 때까지 승민을 기다리던 서연은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승민은 사랑을 표현하고 실행하는데 있어 자신의 마음 속에 갇혀 있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승민이 15년이 지나 건축가가 되어 서연의 집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빈집에 온기를 불어넣어준다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서연의 고향집 공사를 맡기로 한 승민은 서연과 함께 제주의 집을 찾는다. 그 집에는 서연의 키를 재던 벽돌이 있고,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놓은 수돗가가에 시멘트가 미처 마르기 전 굳어버린 여섯 살짜리 서연의 발자국도 찍혀 있다. 승민은 그러한 집의 추억을 그대로 살려 증축하기로 결심하고 세심한 열정을 쏟아 붓는다.

기억의 습작

집이 다 완성되던 날, 서연의 이삿짐에서 자신이 그 옛날 그녀의 집 앞에 버렸던 건축 모형이 들어 있음을 보고 승민은 그제서야 서연도 자신을 좋아했음을 깨닫는다. 수줍고 어린 대학 1학년생 소녀는 남자가 자신에게 직접 다가와주기만을 고대했던 것이다. 뒤늦게 서연의 사랑을 깨달은 승민은 그녀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한다. 하지만 서로의 사랑이 확인되었어도 승민에게는 이미 유학을 약속한 약혼자가 있다. 서툴러서 어긋나 버린 그들의 사랑이 제주 바다의 반짝이는 파편이 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산란시킨다.


제주의 집에서 늙고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아가는 서연에게 어느 날 소포가 하나 배달된다. 승민이 보낸 것이다. 대학 시절, 서연이 첫눈 오는 날, 끝내 승민을 만나지 못하고 빈집의 마루에 놓고 나왔던 음악 CD이다. 결국 늦게나마 승민도 그 약속을 지켜 서연을 찾으러 왔었던 것을 서연도 알게 된다.

서연은 승민이 보내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란 노래를 들으며 햇살 아래 부시게 푸른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평온한 미소를 머금는다.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 속으로 쓰러져 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