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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 에세이 - '써니'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꿈

  • 웹출고시간2012.01.15 19:13: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너, 정말 몰라보겠다. 학교 때보다 살 많이 쪘네."

중년의 여인이 스스럼없이 내 팔을 치며 웃는다. 세월 저 편 아스라이 잠겨 있는 얼굴이긴 해도,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나이든 여자가 '너'라 불러도 나 역시 별 스스럼이 없다. 이것이 성장기를 함께 한 동창의 힘이다. 대학 때 보고 우연히 마주 친 지금, 25년여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여리고 미숙한 일상의 시절을 함께 공유했던 내적 연대감은 수십 년 세월의 간극을 또한 아무렇지 않게 훌쩍 뛰어넘는다. 리포트로 고민하거나, 대리출석시킨 것을 들켜 교수님께 혼이 나거나 하는 실수투성이 시절을 함께 겪어왔던 정서적 유대감은 견고한 시간의 벽을 간단하게 부식시켜 버린다. 그리하여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그렇게도 많은 학창시절의 동창카페와 블로그가 넘쳐나는 것이다.

영화 '써니'는 이런 사회적 맥락의 정서를 제대로 짚은 영화다. 학창시절의 우정에서 왜 육친과도 같은 애정이 발현되는 것인지를 아주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교착

평화롭고 안온한 아침, 잘 나가는 남편과 고등학생 딸의 아침 뒷바라지를 마친 나미는 잠시 차를 마시며 지나가는 여고생의 모습에서 자신의 여고시절을 회상한다. 안정된 중산층 주부지만 무엇이든 자신의 책임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남편과 퉁명스럽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딸을 둔 나미는 어딘지 헛헛하다.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의 병문안을 갔다가 나미는 우연히 학창시절의 친구 춘화를 만나게 된다. 처음 춘화의 병실을 들어가는 나미의 첫 마디가 그 상황과 분위기에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아안에 계에시인가요?' 장난스럽게 노래하듯이 조심스럽게 병실을 살피는 나미의 모습에서 그가 장차 조우하게 될 인물이 허물없던 시절의 친구라는 짐작을 떠올리게 한다. 25년이 넘어 갑자기 맞닥뜨리게 될 옛 친구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을 이토록 실감있게 그려내는 감독의 솜씨가 멋지다.


과거 진덕여고 칠공주의 모임 '써니'의 리더였던 춘화는 암으로 인해 두 달 정도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처지였다. 나머지 멤버들을 보고 싶다는 춘화의 마지막 소원에 따라 나미는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장미를 찾고 장미의 도움에 따라 진희, 금옥, 복희 등 나머지 친구들을 차례로 찾게 된다. 친구들은 성인이 된 현재와 학생시절의 여고생, 두 가지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여고생에서 성인으로 이행된 모습이 이질적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다. 여고생을 맡은 어린 배우들과 성인을 연기한 중견 배우들의 연기가 아주 절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 온 나미(심은경)는 진덕여고 의리짱 춘화(강소라), 쌍거풀에 죽고사는 장미(김민영), 욕배틀 대표주자 진희(박진주), 문학소녀 금옥(남보라), 미스코리아를 꿈꾸는 복희(김보미), 얼음공주 수지(민효린)와 함께 '써니'의 새 멤버가 된다. 비록 스터디그룹은 아닐지라도 '본드 흡입'을 하는 불량 소녀는 끼워주지 않을 정도로 그 또래의 꿈과 낭만을 공유하는 소녀적 감성으로 충만한 모임이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가 배경인 이 영화는 소위 386세대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때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대였다. 그러한 시절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보낸 청소년들의 우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써니'가 '핑클'과 한 판 맞짱을 뜨는 장면은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와 진압 경찰과의 한 판과 어울려 코믹하게 묘사된다. 나중에는 소녀들과 시위대 경찰들이 서로 어울려 드잡이를 하는 모습은 시대의 혼란스러움을 희화화하고 있다.

◇아스라한 복고 풍경

그때는 요즘처럼 각자의 휴대폰으로 각자의 세상에 빠져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 사연을 신청하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날들이 많았다. 깊은 밤, 친구들이 모두 이 방송을 각자의 방에서 함께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적 교감을 느끼곤 했다. 나미가 짝사랑하는 준호 선배를 뒤따라가 듣게 되는 DJ 음악다방의 '리얼리티'의 선율……. 준호 선배가 나미의 머리에 씌워 주던 헤드폰을 통해 시끄럽던 다방 안의 음악이 문득 사라지고 잔잔히 울려 퍼지던 팝송 'Reallty', '너에게 전하고 싶어 지금 느낀 이 감정을, 마음 속에 있는 고동이 멈추지 않도록 아직도 먼 길을, 시간이 흐른다 해도 변하지 않는 꿈, 너와 내 안에서 영원히 빛났으면 좋겠어.'

노래의 가사처럼 가슴 속에 꿈을 품고 아직 먼 길을 가야 하는 소녀와 청년의 만남은 또한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것이므로 더욱 빛날 수 있는 것이다. 청년이 들려준 아름다운 선율을 내내 품고 살던 나미는 결국 기차여행에서 수지와 준호 선배의 만남을 목격하고 가슴 시린 첫 실연의 상처를 그림으로 달랜다. 그리고 25년 후 음악다방을 경영하고 있는 준호 선배를 찾아, 이제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그에게 25년 만의 선물을 안기고 홀가분하게 어두운 골목을 내려온다.


영화 '써니'에 음악은 소리의 미장센 역할을 한다. 보니 엠의 흥겨운 음악 '써니', 리처드 샌더슨의 풋풋한 감성 '리얼리티', 조덕배의 '꿈에' 등 장면마다 덧입혀지는 음악들은 이 영화의 디자인적 요소이며 하나의 이야기로 살아있는 캐릭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역사로 살아 있는 개인

"나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걸 알았다"

친구들을 찾고 그들의 현재 삶을 나누며 여고시절을 되돌아보는 성인 나미의 말은 울림이 크다. 어리버리하지만 자신이 마음먹은 것은 당차게 해내고 마는 나미(유호정), 중성적이며 터프한 매력에 삶과 사물에 나름대로의 혜안과 통찰력을 가진, 그래서 사업가로 성공한 춘화(진희경), 우아한 사모님으로 변신한 욕쟁이 진희(홍진희), 그녀의 욕은 거칠고 그악스러운 것이 아니라 욕쟁이 할머니처럼 푸근하게 찰지게 들린다. 작가를 꿈꾸며 순진함 속에 욱하는 다혈질적 성격의 금옥(이연경)도 재미있다. 친정 빚에 어쩔수 없이 술집으로 떠밀려왔지만 여전히 순진한 복희(김선경), 보험설계사로 고군분투하는 장미(고수희) 등 인물들의 개성이 생생하다. 비단 주연급 인물들 뿐만 아니라 한두 번 스치고 말뿐인 조역이나 단역조차도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의 긴 인생을 짐작하게 할 만큼 인물들의 깊이를 드러낸다. 치매에 걸렸어도 손녀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량없는 할머니(김영옥 분)는 또한 그렇게 되기까지의 인생 역정이 느껴지게 한다. '아버지도 이런 더러운 정권에서 공무원 노릇 그만하라'는 소위 민주투사 아들의 말에 '니 등록금, 지금 니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는 가장의 진중한 한 마디 말은 한 개인이 저마다 맡고 있는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못 사는 년 있으면 잘 살 때까지 괴롭혀 줄 것"이라는 여고시절의 다짐그대로 춘화는 친구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떠난다. 그런 춘화의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은 춘화의 바람대로 여고시절의 축제 때 연습만 하고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써니'로 춤추며 화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음공주 수지가 웃으며 나타난다.

작가 이청준은 '축제'라는 소설에서 죽음이 육신의 고된 인생살이로부터의 해방이므로 하나의 축제일 수도 있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친구들 각자의 삶을 다져주고 떠난 춘화의 죽음이야말로 축제의 의식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이른 개인의 죽음이었지만 7가지의 완성된 나머지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도 춘화가 행복한 이유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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