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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 에세이 - '만추'

고달픈 삶을 감싸는 안개

  • 웹출고시간2012.06.17 17:56: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상처를 덮어주는 안개의 도시 시애틀

제목을 보고 영화 속 늦가을의 풍경을 기대한다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먼 산의 단풍과 함께 낙엽이 바람에 쓸쓸히 날리는 가을의 정취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어떤 가을 영화보다도 가을로 가득찬 영화이다. 다만 그 가을이 자연의 풍경으로 나타나지 않고 인물들의 얼굴에 스미어 있다.

7년을 복역한 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 동안 모범수로서 일시 출소한 여자는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 표정으로 교도소 문을 나선다. 갈색 트렌치코트, 감옥 속 헛된 삶의 껍질처럼 아무렇게나 두른 목도리, 대강 묶어 올린 머리,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가을 햇살 속에 말라가는 과육처럼 건조해 보인다. 마치 그녀가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가을이 시작되는 듯하다. 세상과 다시 마주하는 그녀의 얼굴 자체가 바로 하나의 정경으로써 상황에 따라 그녀의 얼굴 위에서 가을 풍경이 변주(變奏)된다. 버스 창가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애나의 얼굴 위로 어른거리는 미세한 햇살, 추위에 몸을 웅크리며 뜨거운 커피로 적셔 보는 마른 입술, 귓불 근처에서 흔들리는 몇 올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불안한 표정으로 퍼석거리는 비스켓을 그냥 삼키듯 먹으며 애나(탕웨이 분)는 시애틀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찰나 훈(현빈 분)이 차에 뛰어 오르며 모자라는 차비를 애나에게 빌린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신이 돈을 갚을 때까지 자신의 시계를 차고 있으라며 손목에 채워준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며 서서히 펼쳐지는 비와 안개의 도시 시애틀……. 호수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빌딩을 감싸 돌며 대기와 뒤섞여 애나의 눈동자에 젖어들 때, 시애틀이라는 이 도시야말로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는 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용서를 구하지 마세요, 당신의 사랑을 원해요

훈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돈을 갚을 테니 꼭 연락하라고 하지만 애나는 헤어져 혼자 걸어오며 번호를 그냥 버린다. 죄수번호 25737로 불리는 그녀에게 세상에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약속은 부질없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은 낯설다. 감옥과 집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深淵)은 혈연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크나큰 간극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태어나 자란 낯선 얼굴의 조카들, 잘해 주려 애쓰지만 식구라기보다 감옥에 다시 돌아가야 할 죄수로서 어렵고 서먹서먹하게 대하는 형제자매들. 차라리 애나에게는 그들보다 정원의 고양이가 더 편하다. 우연히 마주친 고양이를 부를 때 애나의 목소리와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를 띤다. 그리고 그 정원에서 옛사랑인 왕징을 만난다.

"그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훈에게 왕징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는 이 장면에서 사실 애나 남편의 살인범은 애나가 아니라 왕징이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살해 현장에 있던 종이를 허겁지겁 씹어 삼켰던 것도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를 위해 감옥까지 갔지만 애나가 왕징에게 바란 것은 그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징은 이미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애나의 마음은 감옥 바깥에서 더욱 외롭고 춥다.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애나와 훈, 애나는 충동적으로 훈에게 잠자리를 제안하지만 갑자기 남녀의 육체적 사랑을 감당하기에 애나의 몸과 마음은 너무도 지쳐 있다. 돈 많은 연상의 여자와 대가성 성을 주고 받던 훈에게는 이런 애나가 색다른 매력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만족하지 못한 손님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며 훈은 애나를 도시의 이곳저곳으로 데려간다.

둘은 레스토랑에서 부부처럼 스테이크를 먹기도 하고,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타며 어린아이처럼 놀기도 한다. 중국어 '하오'가 '안 좋다'는 뜻으로 알고 있는 훈에게 애나는 '하오(좋다)' '화이(안 좋다)'를 구별하여 알려 준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하오(좋다)'와 '화이(안 좋다)'로 변주되는 삶

감옥까지 가게 된 삶의 내력을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애나에게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훈은 '하오'와 '화이'를 추임새처럼 넣어 준다. 그러다보니 '하오'와 '화이'가 들어갈 자리가 뒤바뀌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상징성이 각별하게 다가온다.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 그 당시에는 좋았던 것이 지나고 보면 불행의 시발점이었을 수도 있고, 또 나빴던 일이 사실은 행복의 전조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평범한 진리가 결코 헛말이 아닌 것이다.

이제는 감옥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둘은 애틋한 마음이 되어 이별을 나누고 애나는 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떠난 줄 알았던 훈이 애나의 옆자리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다. 둘은 버스에서 우연히 처음 만난 젊은 남녀처럼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만나서 반가워요. 훈입니다."

"애나라고 해요."

안개가 너무도 심해 잠시 정차한 사이, 둘은 몽환적 안개 속에서 격정적 입맞춤을 나누며 애나가 출소하는 날 다시 이 장소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애나가 커피를 사러 간 사이 훈은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인근 숲 속으로 끌려간다. 전에 사귀던 여자의 남편이 납치한 것. 남편은 피묻은 아내의 가방을 내밀며 훈이 아내를 죽였다는 살인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로부터 2년 후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애나는 훈과의 약속 장소였던 부둣가 까페에 앉아 있다. 훈은 나타나지 않고 주변의 미세한 소음에도 애나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도 무심한 듯 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가 입을 열어 마치 누군가에게 말하듯 인사한다.


"안녕! 오랜만이야."

그것은 애나 앞에 나타난 훈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훈을 기다리고는 있지만 훈이 나타나지 않아도 애나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와 더불어 스스로에게 건네는 희망의 인사일 것이다. 또한 세상 속 일상의 감각을 회복시켜준 훈에 대한 기다림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에서 훈이 애나에게 시계를 건네 주거나 채워주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일상의 시간을 선물한다는 것은 곧 생명을 채워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인해 죄수가 되었었던 애나의 사랑은 그렇게 다시 회복되었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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