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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성대히 재현하는 왜구 축제

16.왜구
왜구소굴, 혼슈 남부·규슈·시코쿠 등 세토 내해에 널리 편재
중국 사료 "노략질 후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아"
'야마토'의 발상지로 인식…왜구소굴 역사보존회 버젓 활동

  • 웹출고시간2013.01.29 20:01:1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6. 왜구
고려와 조선을 습격했던 이른바 전기왜구의 소굴은 쓰시마, 이키(壹岐), 마쓰우라(松浦)와 고토열도(五島列島)였다. 아기발도(阿只拔都)라는 소년두목도 이키 출신이라고 하지만 500척의 배로 침범한 것을 보면 섬 하나만의 세력은 아니었다.

중국 연안을 습격한 후기왜구의 출신지가 『주해도편(籌海圖編)』에 나온다. 사쓰마(薩摩), 히고(肥後), 나가토(長門), 오스미(大隅), 치쿠젠(筑前), 휴가(日向), 세츠(攝津), 하리마(播磨), 기이(紀伊), 다네가시마(種子島), 부젠(豊前), 분고(豊後), 이즈미(和泉) 등지이다. 이 옛 지명을 지도에서 보면 규슈와 혼슈 남부 일대인 가고시마, 구마모토, 나가사키, 후쿠오카, 미야자키, 오이타, 야마구치, 오사카, 효고, 와카야마, 미에, 오이타현에 해당된다.

노시마(能島)의 왜구소굴 상상도

이 책에 연안을 침범한 왜구의 행태를 기술했다. "매일 닭이 울 때 일어나 밥을 먹은 후 두목이 높은 자리에서 장부를 펴 약탈 나갈 대장과 대원을 정한다. 대원은 30명으로 각대가 서로 1 ~ 2리 거리를 두고 소라나팔로 신호한다. 저녁에 돌아오면 각기 약탈한 재물을 바치고 감히 숨기지 않는다. 매번 부녀를 잡아와서 밤에는 반드시 주색에 빠져 지낸다. 노략질한 후에는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았고, 사람들이 그 잔혹함을 두려워하면 적은 모두 빠져나간다."

"어린아이를 기둥에 묶어놓고 열탕에 끓여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기뻐했다. 임산부의 배를 찢고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히는 도박을 했다." 간략한 사료만 보아도 잔혹성은 도를 넘었다. 이런 기록 때문에 일본에서 왜구를 내놓고 추앙하지 못하고 있다. 임란의 원한이 아직 남아있는 것도 이 같은 잔인한 행위가 도처에서 벌어졌던 까닭이다.

왜구 전통을 가진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에서 이런 잔인함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1894년 일본군은 동학농민군과 뤼순 주민을 대거 학살했다. 또 의병 봉기지역의 초토화 등에 이어 중일전쟁 후 대륙 곳곳에서 벌어진 학살과 싱가포르 점령 직후 화교의 대량 학살 등으로 확대되었다.

30만명을 학살한 남경대도살 사건은 당시 나치스의 유태인학살에 버금가는 최악의 학살이었다. 그런 원인은 왜구의 잔인성에서 풀어내지 않으면 설명하기 어렵다.

■ 이제 수군을 자처하는 왜구

왜구의 나라 일본에선 왜구란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구를 복속시킨 다음부터는 수군이란 말을 쓴다. 그러면서 수군을 설명할 때 슬그머니 해적을 같이 끼어넣는다. 요즘 왜구를 주제로 여는 축제를 '수군축제'라고 한다.

섬과 섬을 잇는 해로가 중요한 통행로인 일본에는 곳곳에 해적 집단이 존재했다. 유명한 해적은 동부 해안을 무대로 활약한 구마노(熊野)와 시코쿠의 도사(土佐), 마쓰우라나 히라토수군이라고도 불린 고토(五島)와 세토내해의 최대의 섬이 세력권인 아와지(淡路) 등 13개 집단이었다. 작은 해적은 미에현이 근거인 시마(志摩) 등 20개 안팎의 집단이 있었다.

이중 가장 큰 해적이 전성기에 1만 3천 명의 집단을 과시한 무라카미(村上)파였다. 히로시마에서 시코쿠의 에히메를 연결하는 중첩된 섬이 근거지였는데 나중에는 노시마(能島), 인노시마(因島), 구루시마(來島)에 각기 소굴을 두어 삼도 무라카미라고 불렸다. 노시마와 구루시마는 에히메현 이마바리 앞바다에 있고, 인노시마는 히로시마현에 속한다.

지금 이 섬들은 대교로 연결되어 섬과 섬을 거쳐서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다. 노시마는 무인도이지만 인노시마는 꽤 커서 시를 칭한다. 인근 섬에는 상점과 병원 등의 간판에 무라카미라는 성이 많이 보인다. 해적 후손이 지금도 옛 근거지에 많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왜구 소굴로 납치해온 사람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통신사가 일본에 오면 찾아와서 하소연하던 납치자들이 있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결국 조선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노예나 하층민으로 살아간 모습이 눈에 자꾸 떠오른다. 세토내해 일대에는 납치된 조선인들의 한이 어떤 흔적으로든 남아있을 것이다.

오즈시에 있는 강항현창비

형조좌랑이었던 강항(姜沆, 1567~1618)처럼 3년만에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강항은 정유재란 때 토도 타카토라의 수군에 잡혀서 토도의 영지인 에히메의 오쓰(大洲)까지 끌려가 구류생활을 했다. 뒤에 교토 인근의 후시미(伏見)에서 유학자로 저명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를 만나 교류를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본 주자학에는 납치된 조선인의 흔적이 들어가 있다.

■ 해적축제가 열린다

인기배우 쇼에이(照英)가 세토내해에서 모험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왜구 유적지를 다니며 왜구의 후손을 만나고, 왜구짓을 흉내 내는 장면이 나온다. 오사키가미시마(大崎上島)에 들어가자 소형선을 탄 사람들이 구호에 맞춰서 노를 젓고 있다. 배가 민첩하게 물을 가르며 오는데 곧이어 놀라운 장면이 벌어진다. 쾌속으로 육지를 향해 돌진하다가 갑자기 90도를 꺾어서 부두에 평행으로 접안하는가 싶더니 다시 90도를 꺾어서 오던 길로 돌아갔다. 키잡이의 놀라운 180도 회전 솜씨였다.

왜구가 사용한 쾌속선은 고바야부네(小早船)라고 한다. 이 소형선은 30명 정도의 왜구가 탔는데 전원 일시에 상륙하거나 왜구를 경계하는 배가 나타나면 재빨리 방향을 선회해서 돌아갔다. 임란 때 당포에서 적의 척후선을 발견하고 뒤쫓게 했으나 속력 차이로 잡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토도 타카도라(藤堂高虎)가 지배한 오즈성(大洲城, 에히메현 오즈시)으로 강항이 잡혀온다.

세토내해에선 용감한 왜구를 기리는 갖가지 축제가 여름마다 벌어진다. 그중 왜구 소굴의 본채인 수군성(水軍城)이 잘 남아있는 인노시마에 사람들이 몰린다. 축제는 두목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먼저 칼을 찬 갑옷차림 왜구들이 성안으로 줄지어 들어가 두목 앞에 시립해서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왜구 공동묘지에 가서 참배를 하면 한바탕 축제가 시작된다.

학생들이 참여하는 무인도 항해와 생존 훈련은 강하게 자녀를 키우려는 세태에도 딱 맞는다. 왜구들의 근거지였던 작은 섬을 찾아가 과거를 생각하며 커다란 포부를 갖게 한다.

가장 큰 행사가 고바야부네를 연상하는 소형선 경주이다. 응원단의 함성 속에 일제히 출발을 한다. 신나는 장면이다. 2012년 여름에는 무라카미부터 구마노, 고노, 모리 해적 등의 깃발을 단 16개조가 경쟁을 벌였다. 14명이 노를 젓고 두 사람은 북을 치며 키를 잡았다.

저녁에는 불꽃축제로 이어진다. 봉화를 늘어놓은 해변에서 북소리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춘다. 왜구의 배가 귀환하는 장면에선 아이들과 여자들이 바닷가로 나가 흥겹게 손을 흔든다. 그 자리엔 왜구의 잔학상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단지 값진 재화와 많은 노예를 싣고 먼 바다를 항해해서 돌아오는 아버지와 낭군이 있고, 이들을 반기는 가족들의 사랑스런 춤만 있을 뿐이다.

■ 해적 전통은 일본의 곤혹

세토내해의 섬마을 모습. 이런 섬들에 왜구소굴이 있었다.

왜구들이 탄 배가 쓰시마 해협을 건너 소라나팔을 울려대며 밤바다를 쾌속으로 저어 들어가 남해 연안을 들이친다. 횃불을 밝혀들고 장검을 뽑아 닥치는 대로 살육을 하며 약탈에 나선다. 그런 뒤 남녀 가릴 것 없이 주민을 붙잡아서 배에 태우고 돌아간다. 그것이 왜구였다.

이런 왜구 전통의 계승을 어떤 논리로 합리화할 것인가. 일본의 왜구연구자들은 보복론을 내세운다. 원과 고려의 일본 침공에 대한 보복이라고 했다. 그것을 원구(元寇)라고 말해서 왜구와 원구를 동등하게 기술하고 있다.

세찬 물살이 흘러 접근이 어려운 무라카미 소굴 노시마(能島, 하단 가운데)

일제 하의 과장은 심했다. 일본 국민이 해외발전의 원기를 보인 쾌거라고 했고, 왜구로 인해 결국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며 역사발전의 기여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중국 침략을 왜구의 원정에 빗대 자랑스럽게 여겼다. 또 중국 연안에서 베트남과 필리핀을 잇는 선까지 왜구짓을 한 것이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실재를 보여준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지금도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의 발현으로 왜구를 들거나 왜구소굴 역사보존회를 결성한 인사도 있지만 대개는 내놓고 자랑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매년 여름 왜구놀이에 학생들을 참여시킨 행사를 벌인다. 잔인했던 왜구의 해적 전통을 이런 형태로 계승해서 미래의 일본문화로 삼을 것인가. 밖에서 구경하면서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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