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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통용'되는 군대를 만들어라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일본에서 최선의 노력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와 같은 지휘관 배출이 강군의 동력
오야마 육군경의 1884년의 구주순회에서 선진국 군대 시찰

  • 웹출고시간2013.07.16 16:16:3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8. 이와쿠라 사절단

이와쿠라(岩倉)사절단 사진.

■ 메이지정부의 군대 정비

"세계에서 통용하는 군대를 만들어라." 유슈칸(游就館)의 청일전쟁 설명판에 이 같은 말이 있다. 메이지정부의 신식 일본군은 막부 시절의 관군이 아니었다. 유럽국가의 군대를 모델로 해서 대외전쟁을 목적으로 새로운 군대를 길러냈다.

일본에선 전쟁이 잦았다. 번과 번 사이는 물론 막부와 번의 전쟁까지 규모도 다양했다. 쌍방 군대가 커다란 피해를 입고 결판이 날 때까지 싸운 경우도 많았고, 조슈번처럼 서구 열강과 전쟁을 벌인 경우도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벌어진 내전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승패를 결정하였다.

이런 실전 경험이 새 일본군의 기초가 되었다. 우선 사무라이들만이 아니라 서민들이 합세한 혼성부대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정규병의 반대 의미인 조슈번의 기헤이타이(奇兵隊)였다. 메이지유신 후에는 옛 막부를 지지한 아이즈번(會津藩)과 세이난전쟁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런 군대를 조직해서 정부군과 싸웠다.

근대 일본육군의 창시자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1824~1869)였다. 조슈번의 군대를 지휘해서 승리로 이끈 그는 징병제 제정, 진대(鎭台) 설치, 사관학교의 기능인 병학교(兵學校) 설립과 직업군인 육성 등 청사진을 제시했다. 모두 실전 경험에서 나온 결과였다. 국민개병(國民皆兵)이 목표인 그의 의견은 곧 건군의 기본 구상이 되었다.

오무라의 계획을 실현한 주도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였다. 육군과 관료사회에서 그가 갖는 영향력은 대단하였고, 그런 힘을 제국 군대의 토대를 쌓는데 쏟았다. 그는 '원로 중의 원로' 또는 '일본군벌의 비조(鼻祖)라는 말과 함께 '국군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 조선과 청을 압도한 메이지군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청의 양무운동은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강병의 건설은 군사의 수나 무기 성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도자의 역량과 함께 효율적인 국가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메이지정부는 같은 시기의 조선정부와 청 정부를 압도하였다. 1894년 일본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승리는 메이지정부의 강병정책의 성과였다.

일본제국의 군대에 관해서는 말할 거리가 많다.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1859~1930) 등 지휘관에 관한 것도 그렇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한 일본군 지휘관을 보는 시각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일본 인기만화 '진격의 거인'과 관련해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마지막 인류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이른바 지구방위군과 같은 병단을 아키야마 요시후루와 같은 지휘관이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보니 만화인물의 모델이 아키야마 요시후루 사진과 똑 같다. 앞으로 몇 차례의 이 글을 연재하면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다룰 것이다.


■ 구미에서 군사학을 배운 일본군 장교들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은 가장 좋은 사례를 찾아내서 본받는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서구문화를 받아들였다.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이 1871년 11월부터 1873년 9월까지 정부 수뇌부터 유학생에 이르기까지 107명이 사절단을 구성해서 미국과 유럽을 순방한 것은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서양문명을 조사해서 일본에 이식하는 것이 핵심 목적이었다.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해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나카에 쵸민(中江 兆民) 등 일본사회는 물론 한국과도 여러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사절단으로 갔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각 분야별로 유럽문화를 배워왔는데 군사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장교들은 일찍부터 신문물을 익힐 기회가 부여되었다. 병학교 이래 사관학교는 선구적인 교육을 하였고, 그 결과 각 분야에서 앞서가는 인물들을 길러냈다. 육군과 해군의 장교 이력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들에겐 외국 유학기회도 많았고, 공사관의 무관으로 부임해서 국제 감각을 익힐 기회도 있었다.

외국어 교육과 학습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장교로서 출세한 인물들 중엔 자기가 유학한 나라의 언어를 비롯 주요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진 군사지식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비롯 독일어와 러시아어 등 외국어를 모르면 습득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국가들은 자국 군대의 강력함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군사연습에 외국군 장교를 초대해서 관찰시키는 일이 유행이었다. 전쟁 때도 무관들에게 참관을 시켰다. 일본군 장교들은 이를 잘 활용하였다.

■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의 구미순회

1884년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1842~1916)가 구미 여러 나라를 순회하였다. 이미 메이지유신 다음해인 1869년에 프러시아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普佛戰爭, 1870~1871)을 시찰한 일이 있었고, 또 1870년부터 1873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 유학한 경험이 있던 그가 다시 군사시찰을 한 것이다.

이때 수행한 인물의 면면이 놀랄만하다.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가쓰라 타로(桂太郞),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였다. 몇 년 후 육군 최고지휘부에 올라서 침략전쟁을 시작한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그중 미우라 고로는 조슈번 출신으로, 한국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1895년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던 일본공사였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사쓰마번 출신으로 구주순회 후 1886년부터 1년 반 동안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와 같이 또 독일에 군사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 뒤 참모차장으로 청일전쟁을 기획하였고, 조선침략과 청과의 전쟁에서 주요 결정을 내리는 최고책임자가 되었다.

가쓰라 타로는 가쓰라 태프트조약의 조인자로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조슈번 출신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보좌해서 군제개혁의 실무자로서 일했고, 3사단장으로 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10년 조선의 국권이 완전히 탈취될 때는 총리가 되어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

노즈 미치츠라는 한국 침략과 청일전쟁에 참여한 핵심사단인 5사단장이었으나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사쓰마번 출신으로 1군사령관과 교육총감을 맡았고, 원수 직위까지 오른다.

이들의 구미순회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선진국가의 군사제도를 샅샅이 조사해서 그 장점을 일본군에 이식시키려고 한 전문 기획여행이었다. 이 순회는 일본군제사에서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 막부 말기부터 프랑스식 신식군대를 지향하고 있던 육군을 독일식으로 전면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프랑스식 육군은 거점을 지키며 방어를 우선하는 진대제 형태였으나 독일식 육군은 사단 형태로 부대를 동원해서 외정을 할 수 있는 편제였다. 한 마디로 침략군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사단 개편이 1893년에 마무리되었고, 다음해 침략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가 1886년에 펴낸 『구미순회일지(歐美巡廻日誌)』.

■ 노즈 미치츠라의 『구미순회일지』

시고쿠의 가고시마시 도심에 고려마치(高麗町)가 있다. 여기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납치한 도자기기술자 등 조선인을 집단 거주시킨 곳이다. 노즈 미치츠라(1841~1908)은 고려마치에서 태어났다. 그런 인연이 있는 그는 1894년 5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으로 조선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노즈 미치츠라가 40대 전반에 이와마 육군경을 따라서 구미를 순회한 과정은 그가 작성한 『구미순회일지(歐美巡廻日誌)』에 잘 나와 있다. 1884년이면 임오군란이 일어난 2년 후이고, 갑신정변이 발생한 해이다. 일본은 이때 선진 군사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중견장교들을 구미로 보낸 것이다.

1886년 6월에 간행된 『구미순회일지』는 모두 3권이다. 상권은 도쿄에서 홍콩을 거쳐 아라비아해와 지중해를 거쳐 이태리와 프랑스에 들어가서 시찰하는 여정으로 시작한다. 중권은 벨기에와 러시아, 그리고 독일 3국을 순회하는 내용이다. 하권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보고 프랑스 영국을 거쳐 미국을 지나 태평양을 통해 돌아오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오야마는 육군경 직위로 방문했다. 그래서 유럽 국가의 참모총장 등은 물론 국왕까지 알현할 수 있었고, 대규모 훈련장을 참관하거나 주요 부대를 찾아가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 전반에 관해 획득한 세세한 정보들은 일본 육군의 편제개혁이나 무기 확보 등에서 즉각 활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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