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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건조한 군함, 한반도 해도작성 등에 활용"

1875년 조선 연안에 불법 침입해서 군사정보를 뽑아간 일본해군
강화도에 침입한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는 사쓰마 출신 정한론자
메이지정권의 초기에 해군을 이끈 대장은 사쓰마 출신들이 독점

  • 웹출고시간2013.10.01 18:39:33
  • 최종수정2013.10.01 18:39:44
47. 조선 침략에 앞장선 사쓰마 출신 해군지휘관과 군함들

■ 조선에 일본 군함을 보내 위협

운양함 병사가 조선 강화도 전투를 벌인 장면을 그린 전투도. 실제와는 차이가 많은 상상도이다.

일본제국의 조선 침략에 앞장을 선 것은 해군이었다. 메이지 정부가 시도한 첫 단계 도발은 군함을 보내서 조선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고위 실권자들이 내렸겠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짠 것은 해군성이었다.

‘조선국 연해도서 측량 수칙’에는 조선에 파견될 군함의 함장은 준비를 마치면 2개월 전에 외무성에 그 내용을 미리 보고하도록 했다. 처음부터 국제문제로 비화할 것을 예측하고 외무성과 협조체제를 갖췄다. 그리고 군함이 가서 측량할 조선 지방이 어느 곳의 해안과 도서인지 그 개략과 함께 기한을 전해서 추진하도록 했다. 해안 측량을 위해 상륙할 때 그 지역 지방관과 조선에 일본 군함을 보내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잊을 수 없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의 경험을 조선에 주자는 것이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 1794~1858)제독이 이끌고 온 대형 군함들은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바다를 통해 외세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일본에서 도쿄만에 정박한 서양증기선이 준 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더구나 그 배에 설치된 커다란 대포에는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식의 충격을 조선에 기대한 것이었다.

다음은 군사정보를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최고의 군사기밀은 해도였다. 바닷길을 측량해서 세밀하게 작성한 해도가 있어야 군함을 보내서 침략을 감행할 수 있었다. 조선은 섬이 많고 해안이 복잡해서 쉽게 대형선박이 들어올 데가 아니었다. 암초에 걸려 좌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침략을 위해서는 해도 작성을 선행해야 했다.

1875년 5월 조선에서 보유하지 못한 커다란 군함이 부산에 들어왔다. 운요호(雲楊號)와 다이니데이보호(第二丁卯號), 그리고 가스가마루(春日丸)였다. 그러나 조선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서양군함 때문에 조선은 호된 시련을 겪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함대가 침입한 신미양요를 치룬 것이다. 도성 방어의 역할을 기대한 강화도가 포격을 받아 무너져서 해안 방어가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해방 대책의 성과는 크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해군력 양성과 군함 보유에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었다. 서양에서 군함을 건조해서 편대를 갖추는가 하면, 직접 증기선을 제조해서 군함으로 편입하였다.

■ 일본 군함들의 제원

운요호 모습.

조선을 침범한 일본 군함은 운요호가 대표한다. 한국 사람조차 강화도조약을 배우는 과정에 나오기 때문에 운요호 또는 운양함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어떤 배인지 자세히 아는 사람도 드물다.

운요호 함장으로 조선 침범을 즐겨한 이노우에 요시카.

운요호는 그리 큰 배가 아니었다. 배수량이 24톤인 소형 포함으로 길이 37m, 폭 7.5m에 불과했다. 조슈번이 1870년에 영국에서 구입해서 보유하다가 다음해인 1871년 메이지정부에 헌납을 해서 운양함으로 개명을 했다. 일본에서는 운양함으로 표기하는데 조선에서는 윤요호로 전해져서 지금도 역사기록에 그렇게 쓰고 있다.

조선을 침범한 운요호의 선장은 사쓰마 출신인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響, 1845~1929)였다. 조슈번 출신으로 조선 침략을 선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와는 이름이 비슷하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노우에 요시카는, 사쓰마 출신들의 성향과 똑같아서,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를 추종하는 자였다. 부산에 와서는 포격훈련을 빙자해서 무력시위를 하거나 무단측량을 하는 등 도발을 즐겼다고 한다. 1875년 9월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며 도발을 계속해서 이른바 강화도 포격사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충돌에 주요 책임을 져야할 인물이 바로 이노우에 요시카였다.
다이니데이보호도 본래 조슈번이 영국 런던에서 건조하여 보유했던 군함이었다. 이름은 정묘년인 1867년에 만든 두 번째 배라는 의미이다. 배수량 236톤, 길이 36.58m, 폭 6.4m로 5.9인치 포와 5.5인치 포를 달았다. 강화도 포격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가스가마루(春日丸)는 1,015톤 배수량의 목제 외륜선이다.

가스가마루는 사쓰마번이 영국 선적의 화물선을 사들여서 1868년부터 군함으로 사용한 목제 외륜선(外輪船)이다. 배수량이 1,015톤, 길이가 74m, 폭이 9m인 배로 6문의 대포를 장착하였다. 가스가마루에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이 포술사관으로 승선해서 이야기거리가 되고 있다.

■ 일본제국의 사쓰마 출신 해군대장들

메이지정권의 초기에 육군 지휘부를 조슈번 출신이 장악했다면 해군은 사쓰마번 출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첫머리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생인 사이고 쥬도(西鄕從道, 1843~1902)가 있다. 가고시마의 가지야에서 출생한 그는 종형인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巖)과 함께 세이난전쟁 이후에도 메이지정부의 실세로 지냈다. 문부경과 육군경 그리고 해군대신과 내무대신으로 메이지정부 내의 사쓰마 중진으로 군림했다.

가바야마 스케노리(樺山資紀, 1837~1922)는 해군대신과 해군군령부장을 지내고, 초대 대만총독으로 나갔으며,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 1843~1914)는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해군조련소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항해술을 배운 인물로 1894년 연합함대사령관으로 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들과 더불어 강화도에서 도발을 감행한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響)도 해군대장에 올라 메이지정부의 해군을 좌우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야마모토 곤베에의 만년 사진.

그러나 사쓰마 출신 해군대장으로 손꼽히는 두 인물이 도고 헤이하치로와 야마모토 곤효이다. 도고는, 말할 것도 없이, 섬나라 일본에서 해군을 상징하는 최고 신격화된 영웅이다. 야스쿠니신사의 전쟁박물관인 유슈칸에 가장 큰 초상화로 받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일본의 해전사는 러일전쟁의 동해해전의 승리와 도고의 지휘력을 일치시켜서 평하고 있지만 청일전쟁에는 나나와호의 함장으로 참전해서 고승호 격침사건을 일으키는 판단오류를 범하는 것을 보면 썩 좋은 지휘관은 아니었다.

야나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1852~1933)는 해군에 미친 영향력이 더욱 큰 인물이었다. 육군이 지배한 참모본부에서 해군군령부를 독립시키도록 한 인물이 야마모토였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해군강화론에 따라 군무국장으로서 대거 구조조정을 단행해서 해군을 변모시켰다.
해군 전체의 체질을 개혁한 야마모토는 해군대신에 취임해서 약 8년 동안 러일전쟁 종료까지 해군의 정상에서 군림하였다. 소장장교들의 해외유학을 권장해서 아키야마 사네유키 등을 미국 영국 러시아 등에 파견하였다. 일본 내 조선소도 충실하게 정비하는 한편 영국과 미국에 군함을 발주해서 일본에 협조하게 만드는 일도 그의 꾀에서 나왔다. 도고 헤이하치로를 러일전쟁 직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발탁한 것도 그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 조선침략에 동원된 해군 함정들

일본제국의 조선침략사에서 해군 지휘관들은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일본공사관 호위를 명목으로 처음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은 해군 육전대였다. 나가사키항과 우지나항에서 조선에 건너온 일본군은 해군 함정을 타지 않으면 올 수 없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가 조선에 드나들며 무력시위를 했을 때 타고온 군함이 가스가마루였다.

해군 지휘부를 사쓰마 출신이 독점했다는 말은 정한론자들로 채워졌다는 말과 다른 것이 아니다. 왜 조선 침략을 목적으로 삼고 그렇게 바라고 있었나. 그것은 역사 속에 답을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 왜구의 전통인가. 정유재란의 횡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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