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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

분할된 중국에 일본군의 어두운 모략전이 집중
청일전쟁부터 비밀전을 시작한 스파이의 원조들
특무기관이 주도한 아편장사로 중국은 만신창이
침략전쟁의 화신들이 전후 일본 정치를 주도

  • 웹출고시간2013.06.18 18:07:0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4.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하)

■ 과분중국(瓜分中國)과 일본군

강희제 이후 전성기를 맞은 청국의 판도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와 거의 비슷하다. 흑룡강부터 신강성까지 넓혔고 남으론 티베트와 접경하였다. 이 넓은 땅이 19세기 말에 들어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갈가리 찢겨졌다.

결정적 계기는 청일전쟁이었다. 청이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자 열강이 아귀같이 달려들었다. 만주와 몽골은 러시아가 선점했고, 산동성은 독일이 차지했다. 영국은 양자강 유역을 빼앗았고, 프랑스는 광동성과 광서성을 세력권에 넣었다. 조차지도 늘어나서 뤼순과 따렌은 러시아, 칭따오는 독일, 영국은 홍콩에 이어 구룡반도를 차지했다. 1896년부터 1898년까지 중국을 분할했던 이른바 과분중국(瓜分中國)이다.

1899년 의화단의 봉기는 이런 침략에 대한 처절한 항거였다. 하지만 8개국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중국의 분할은 더 빨라졌다. 청은 대제국의 위신을 상실했고, 더 이상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군사력이 없었다.

8개국연합군은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일본에서 보낸 군대로 구성되었지만 주력은 일본군 제5사단 11연대와 42연대의 8천 병력이었다. 히로시마와 야마구치에서 편성한 이 부대가 중국을 유린한 것이다.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간첩의 원조 후쿠시마 야스마사

일본군을 지휘한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1852~1919) 소장이 여기서 주목된다. 참모본부 2부장이었던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 모두 5개국 언어를 구사하여 연합군 지휘관회의에서 유용한 존재였다. 그는 간첩의 원조였다.

■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의 간첩이력

후쿠시마 야스마사는 정보장교로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다. 도쿄대학의 전신인 「가이세이(開成)학교」에서 미국과 독일인 교사에게 외국어를 배운 그는 육군성 문관으로 있다가 사관등용시험에 합격해서 장교로 임관한 후 참모본부에서 외국 정보를 취급했다. 1879년에 조선과 청에 스파이로 파견되어 정보 수집을 하였고, 텐진조약 체결 당시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으로 배석하였다.

육군대학교에서 독일교관 클레멘스 메켈에게 군사학을 배운 뒤 인도 버마 등지를 둘러본 다음 베를린공사관에 부임해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1849~1940) 공사의 정보보좌관으로 활약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부설 정보도 그에 의해 보고되었다. 일본으로 귀환할 때 베를린에서 시베리아와 몽고 만주를 거쳐 단신 대륙횡단을 해서 단숨에 유명해졌다.

중좌로 진급한 그는 1894년 6월 혼성9여단 병력과 함께 서울에 왔다. 이런 거물이 조선공사관 무관으로 온 것은 군용전선 부설이라는 긴급한 현안이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해 8월 제1군사령부의 참모가 되어 평양전투부터 오가와 마타지(小川又次) 참모장을 돕는다. 오가와도 참모본부 관서국에 오래 근무했던 청국 전문 스파이였다.

참모본부의 1급스파이들은 처음엔 조선에 집중되었다가 다음엔 중국으로 몰려갔다. 중국은 큰 나라였다. 열강의 침략에 허덕이던 중에 야차와 같은 일본 스파이들의 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 아편을 밀매한 일본군 특무기관

1912년 2월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서 청국은 276년만에 멸망했다. 중국은 군벌들이 할거해서 세력다툼을 벌이는 과도기로 들어갔다. 일본군 특무기관은 이틈을 비집고 중국에 들어갔다. 이들의 행태는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가게사 사다아키

가장 두드러진 것이 가게사 사다아키(影佐禎昭, 1893~1948)가 만든 가게사기관(影佐機關)이다. 1938년 국민당 고위층인 왕자오밍(汪兆銘)을 충칭에서 탈출시킨 공작을 해서 이름이 난 기관이다. 일본군이 충칭을 압박할 때 쿤밍(昆明)을 거쳐 하노이로 간 왕자오밍은 장제스에게 평화교섭 전문을 보낸다. 그것은 항복하라는 요구와 다름없었다. 그 뒤 일본에 투항해서 난징에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가게사 사다아키(影佐禎昭, 1893~1948)는 히로시마 출신으로 육사와 육군대학교를 나와 도쿄제국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운 인물이다. 참모본부에 소속되어 중국 정보를 다뤄서 핵심 중국통이 되는데 만주사변 직전에는 전쟁 선동에 앞장을 섰다. 1937년 참모본부에서 중국과장을 맡다가 제8과 모략과가 신설될 때 초대과장이 된다.

그는 역할이 분담된 거대한 아편 밀매조직을 만들었다. 관동군은 만주 점령지에서 아편을 생산해서 공급했다. 만주에서 상하이로 간 아편왕 사토미 하지메(里見甫, 1896~1965)의 사토미기관(里見機關)이 밀매조직을 총괄했다. 하부 판매는 중국인 범죄조직인 청방(靑幇)과 홍방(紅幇)을 이용했다. 아편 판매망이 확장되자 하이난섬의 아편에 이어 인도와 페르샤 그리고 몽골 아편까지 들여와 팔았다.

수많은 사람을 아편중독으로 파멸시킨 이 모략전쟁의 이익은 막대했다. 그 돈은 특무기관 공작비를 비롯해서 관동군과 만주국 그리고 난징정부와 지동방공(冀東防共)자치정부를 유지하는데 썼다. 떼돈이 보이자 일본 기업이 달려들었다. 미쓰이물산·미츠비시상사·오쿠라상사가 공동출자한 쇼와통상(昭和通商)은 아편밀매를 위한 군산 협력 특무기관이었다.

도조 히데키 등 관동군 장교들과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1898~1979),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01~1975) 등 만주국 관료들과 상해의 대륙신문사장 후케 토시이치(福家俊一, 1912~1987)는 아편왕 사토미와 결탁해서 자금을 받아 활동하던 인맥이었다.

이들은 패전 후 정계의 거물로 재등장했고, 그들의 자손이 지금도 정권의 중추에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이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이고, 가게사 사다아키의 외손이 아베 직전의 자민당 총재였던 다니가키 사다가즈(谷垣禎一, 1945~) 현 법무상이다.

육군나카노학교를 다룬 책과 영화

■ 영화 나카노학교가 미화한 스파이

도쿄올림픽을 치룬 2년 뒤인 1966년 스파이영화 「육군나카노학교(陸軍中野學校)」가 개봉되었다. 연속해서 나온 5편 모두 대인기였다. 일본제국을 회상하는 세대가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게 하면서 007시리즈처럼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1탄의 줄거리는 이렇다.

극비명령을 받은 육군 소위 미요시 지로가 야스쿠니신사 부근에 출두했다. 모인 사람은 모두 18명. 함께 1년 간 스파이교육을 받았다. 군복 착용과 군대 용어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무술 연습과 항공기 조종 그리고 정치학 강의를 듣고, 변장과 금고털이 등과 함께 댄스 등 잡기도 배웠다. 첫 임무가 영국영사관에 들어가 암호코드를 빼오는 것. 성공했으나 정보가 유출되었다. 혐의자는 참모본부에서 일하는 약혼자 유키코. 그녀는 영국 첩보기관의 앞잡이였다.

2탄 3탄은 상하이로 무대가 바뀌고 활극이 갈수록 첨가된다. 주인공은 이치가와 라이조(市川雷藏, 1831~1969). 사극 스타인 이치가와 라이조가 출연한 현대물이었다. 더구나 주연배우가 38세로 159편의 영화를 남기고 요절하자 나카노학교 시리즈는 유작처럼 되었다. 그러나 영화에선 모략전쟁이나 아편장사 등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지 않는다. 애국심에 차서 분투하는 젊은이들만 부각된다.

「육군나카노학교」는 1937년 '첩보모략의 과학화'를 주장한 이와쿠로 히데오(岩畔豪雄, 1897~1970)가 주도해서 설립한 스파이학교였다. 참모본부가 직접 관할하여 존재 자체가 극비였다. 1938년에 뽑은 1기생 19명은 군사학과 외국어 그리고 무술과 세균학 등과 함께 기상학 심리학 통계학 법의학 등 갖가지 지식을 배웠다. 러일전쟁의 스파이로 공을 세운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가 이들의 영웅이었다. 2차대전 이후에는 게릴라 양성 필요에 따라 1944년 후타마타(二·)분교에서 150명씩 뽑아 졸업생은 모두 2,500명을 헤아린다.

이 정보학교의 존속기간은 짧지만 졸업생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말레이시아의 F기관은 나카노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고, 아웅산 등 버마의 독립투사들을 일본 침략에 발판으로 이용하려고 시도한 미나미기관(南機關)의 주축도 이들이었다. 또 영국군의 인도병사를 투항시켜 만든 자유인도군도 이들이 이뤄낸 성과의 일부였다. 그런 공작은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독립에 기여했다는 역사왜국의 근거가되고 있다.

아편왕 사토미의 일대기를 쓴 책

■ 정보전쟁의 진화와 나카노학교 출신들

오늘날 정보전쟁은 진화를 거듭했다. 그래도 휴민트(HUNMINT)라고 부르는 스파이를 통한 정보수집이 가장 유용하다. 전파를 탐지하거나 암호 해독으로 통신을 가로채는 방법도 흔히 사용되고 있다. 정찰위성 사진을 해석하는 이민트(IMINT)도 결정적인 정보가 되었다. 요즘처럼 온갖 자료가 인터넷에 넘치면 공개 자료에서 추출하는 정보가 요긴할 것이다.

커다란 나라의 유지에는 대내 대외정보의 획득과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의 특무기관은 해도 너무했다. 침략대상국에 온갖 해악을 다했다. 지금도 이를 미화시키거나 왜곡하는 일이 진행중이다. 가게사 사다아키의 공작이 중일관계의 화평을 위한 사업이었나. 그런 일부 일본인의 주장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아도 부끄럽다.

나카노학교 출신들과 모략전의 비밀전사들이 패전 이후 일본을 일으켜 세운 주요한 동력이라고 한다. 이들이 정계 재계 학계 등을 이끌어온 주축 세력을 이루고 있고, 그 결과 제국일본의 세계사적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미화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지금 그 후예들이 이끄는 일본을 가까이 지켜보는 심사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는 정탐원이 외침 정보를 보내오면 요동반도를 선점하고 산성을 쌓아 전투를 내륙까지 번지지 않게 했다. 수도가 유린되는 경험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당대에 국란을 겪고도 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보기관이 요동친다. 민주화를 위한 과도기로 보기엔 씁쓸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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