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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헌법을 가지고 장난치다

천황 군통수권 허상…조슈번·사쓰마번 군벌의 권력욕 표현
도쿠가와 막부를 대신한 군벌이 부상…군과 국가를 지배
전범 도조 히데키도 사실상 이토 '장난 헌법'의 사생아

  • 웹출고시간2012.11.06 19:12:4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6.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헌법을 가지고 장난치다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는 격변이 아니라면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출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이토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겨우 하급 사무라이가 되었고, 그는 요시다 쇼인에게 배운 후 존왕양이파 테러조직에서 암살활동을 자행하던 하수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메이지정권의 실권자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신뢰를 받아 출세 가도에 오르게 되었고, 그때부터 승승장구했다.

그가 일본에 적합하다고 본 프러시아헌법을 모델로 만든 것이 '대일본제국헌법'이다. 1889년 동아시아에서 처음 제정된 이 헌법에는 함정이 들어 있었다. 천황의 군통수권을 민간 정치인이 통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천황의 군통수권은 형식뿐이었다. 군대는 조슈번과 사쓰마번 출신이 핵심인 군부가 지배했다. 헌법을 가지고 장난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얄팍한 생각! 의회 통제가 불가능했던 막강한 군부의 권력이 결국 300만명 이상의 일본인을 전란 중에 죽게 만든 원인이었다.

■ 일본 국회의 개헌 논의 함정

일본 중의원이 지금 개헌 논의에 들어갔다. 첫 검증회의에서 자민당은 이른바 '밝은 메이지'를 떠올리는 주장을 했다. 현 헌법에서 국민통합의 상징이었던 천황을 개정헌법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로 바꾸자고 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떤 주장이 나올까? 지금 천황은 국회와 내각의 결정에 따라 총리와 최고재판소장을 형식적으로 임명하고, 외국과의 조약을 비준하거나 대사를 맞아들이는 의전 활동에 그 역할이 그치고 있다. 패전 후 맥아더 점령군사령부에 애원해서 전범 처리 대신 만들어낸 조치였다. 앞으로 메이지유신처럼 대권을 돌려주자는 이른바 제2의 대정봉환(大政奉還) 주장까지 나오지 않을까?

평화헌법은 교전권을 부정하는 단순한 조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내의 호전적인 세력이 국민 주권을 박탈하는 가능성이 없도록 해야 평화헌법이 된다. 메이지 헌법에서 천황은 통치권, 입법권, 군통수권, 외교권, 계엄권 등을 가진 불가침의 존재였다. 이를 근거로 천황을 업은 군벌이 일본국민을 침략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우려하는 외국의 시각을 일본은 무시하고 있다. 전범들까지 들어간 신사에 총리와 각료가 줄지어 참배하면 그 전범들의 행위를 기리고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인데 수상한 일이 아닌가.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에 한 개인이 세습에 의해 국가의 상징이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고, 그런 제도를 이용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수상하다.

■ 지명도 최고의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집(왼쪽)과 도쿄에서 가져온 이토 히로부미 별장. 내부는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야마구치현 하기에 메이지헌법 제정을 주관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 요시다 쇼인의 신사 근처이다. 동상 모습은 그리 볼품이 없지만 오래된 외투에서 메이지 원훈의 모습이 배어나온다. 쇼인의 학동 가운데 가장 어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과격했던 선생의 가르침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그래서 이 두 인물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모양이다.

동상 바로 옆 건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고택이고, 그 다음이 별장 건물이다. 별장은 1907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주인장이 죽은 모양이다. 도쿄에 있던 것을 2001년에 옮겨왔다고 하는데 방안에는 메이지천황의 하사품과 많은 사진을 전시해서 방문객이 그의 생애를 기리도록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동상(왼쪽)과 사진을 함께 찍은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한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일본인을 찾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토 히로부미가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안중근 의사를 배울 때 꼭 나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제 침략의 상징이 곧 그였다.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자 혹독하게 핍박하였다.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시킨 후 철저히 감시해서 손발을 묶어놓았다. 그런 뒤 사랑했던 막내아들인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인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린 영친왕과 같이 찍은 1907년의 사진을 보면 전율이 온다. 병정처럼 차린 10세 소년 영친왕 옆에 군복을 입고 칼을 찬 노회한 이토 히로부미가 서있다. 산채로 먹이를 잡은 의기양양한 늑대의 화상으로.

■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헌법

'사진으로 본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안내판.

메이지헌법은 준비 단계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참여하였다. 1882년에 메이지정부의 명을 받고 유럽에 가서 도이치 헌법을 배워왔다.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맞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초대내각의 총리가 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각 조문을 작성해서 검토했고, 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을 설치한 후에는 스스로 의장이 되어 헌법초안을 심의하였다.

1889년에 드디어 메이지헌법이 공포된다. 이때 「제국헌법의해(帝國憲法義解)」라는 해설서를 같이 펴내서 그 구성과 특징을 널리 알렸다. 헌법의 핵심인 천황 관련 조항도 황실전범 해설서를 펴내서 논란을 막았다. 바로 여기에 이토 히로부미의 꾀가 집약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메이지정권의 원로였다. 만 27세에 임명직인 효고현 지사가 된 이후 공부경, 내무경, 궁내경을 역임하고 1885년 12월 초대내각부터 1901년까지 4회에 걸쳐 8년 여 동안 총리를 지냈다. 1890년에는 상원격인 귀족원의 초대의장이 된다. 그의 헌법 해설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메이지헌법은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규정했다.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자문기관에 불과했다. 법안제출권과 예산동의권은 있었으나 주권을 가진 천황이 재가해야 효력이 발생했다. 입법권이 그러하니 행정권과 사법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부문은 민간 정치가가 간여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군 통수권자는 천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군부가 전권을 가졌고 의회와 정부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더욱이 육군대신이나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으로 임명되어 군 예산이나 병력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군 작전도 군부 마음대로이니 전쟁 여부도 군부의 결정에 따를 뿐이었다. 이것이 비극이었다.

■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다

천황의 통수권은 허상이었다. 궁궐 속에서 차단된 채 군대 인사와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구 사단을 증설하고 예산을 증액시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막부를 쓰러뜨린 뒤 그를 대신한 정권 담당자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신흥 세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이 중심인 군부가 대대로 실권을 장악하는 방법을 헌법에서 찾았다. 청국과 러시아에 승리한 전쟁까지 일본 국민은 그 실체를 잘 모르면서 부화뇌동하였다. 그것이 '밝은 메이지'였다.

1926년 5월에 황태자(쇼와)가 방문했다고 돌비에 새겨놨다.

그러면 군국주의로 나간 '어두운 쇼와'는 무엇인가· 그것은 메이지의 연속일 뿐이었다. 일제 말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장난한 메이지헌법에서 나온 존재였다. 도조 히데키는 2차대전 막판에 총리와 육군대신 그리고 참모총장 3직을 겸직해서 천황의 통수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 그래서 도조막부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처럼 실권을 장악한 세력은 유사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겉으로는 요란하게 메이지천황을 떠받들었지만 군 지휘권과 같은 실권을 가진 존재는 따로 있었다. 메이지나 쇼와나 인질로 잡혀간 영친왕과 무엇이 크게 달랐을까 싶다. 이제 천황이란 인질이 필요한 세력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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