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동요 미나토, 전쟁의 참혹성에 눈귀를 멀게 하다

히로시마의 우지나군항(宇品軍港)
작사자 요시다 신타, '부산항' 노래도 지은 음악교사 출신
우지나항의 일본군 5사단… '이익선' 조선침략 선봉역할
야스쿠니신사를 미화하는 우파 역사인식에 출구가 절실

  • 웹출고시간2013.04.23 16:13:3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6.히로시마의 우지나군항(宇品軍港)

동요 '미나토(港)'의 연통 형태 노래비.

■ 교과서에 실린 항구노래

우지나(宇品)군항을 노래한 창가가 있다. 1896년에 나온 '미나토(港)'란 곡이다.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 동요는 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오래된 초등학교 음악책의 동요가 이런 곡조였기 때문이다.

우지나중앙공원에 이 노래비가 있다. 육군선박사령부 터에 세운 이 비는 군함 연통에서 본 딴 원통 형태이다. 글씨는 우지나의 초등학교 4학년생들이 한자씩 가사를 써서 새겼다.

작곡자는 히로시마고등사범 음악교사인 요시다 신타(吉田信太, 1870~1953)로서 3박자 노래를 처음 작곡한 일본인이라고 한다. 부산항이란 노래도 지었고, 유명한 연작 노래인 철도창가 작곡에도 참여했다.

'미나토'는 우지나항의 활기를 노래한 것이다. 이 활기는 1894년 6월 9일 혼성 9여단의 선발대인 11연대 소속 1개대대 1,024명이 우지나항에 도착해서 시작되었다. 오시마 요시마사 여단장과 11연대 주력은 6월 11일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우지나는 핵심 군항으로 부각되었다. 이해 8월 긴급작업으로 히로시마역에서 오는 도로를 놓았고, 군용철도도 완공시켰다. 전쟁터로 보낼 군량과 말먹이 창고는 1897년에 세워졌고, 1902년엔 육군운수부가 들어왔다. 1911년에는 일본 최대의 통조림공장도 건설되었다.

우지나항은 메이지정권의 대외침략을 위한 전진 병참기지였다. 아시아인은 이 항구에서 출정을 한 일본군의 잔인함에 전율했지만, 일본학생들은 소학교에서 배운 동요 '미나토'를 씩씩하게 불렀다. 그러면 전쟁의 참혹성은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고 승전보와 갖가지 노획물에만 환호를 하게 된다.

우지나항 축항공사 장면.

■ 우지나의 개발과 군항 축조

히로시마는 북쪽에서 치받아 내려온 듯 오오타(太田)강이 흘러서 조각조각 삼각주를 만든 곳에 위치해 있다. 히로시마만으로 빠지는 큰 강줄기가 무려 5개나 된다. 그 중간인 모토야스(元安)강 어귀에 우지나섬이 있다. 발원지에서 103Km를 흘러온 강물은 여기서 바다를 만난다.

히로시마엔 수심이 깊은 항구가 없었다. 그래서 기선으로 우지나섬에 내려서 목선을 갈아타고 와야 했는데 그것도 밀물을 기다려야 했다. 배가 중요한 운반수단인 섬나라에서 견딜 수 없는 불편이었다.

1880년 봄 삼각주를 개발, 간척지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1884년에는 삼각주와 우지나섬을 연결하는 항구 건설을 결정했다. 그러면 제방 양쪽에 수심 깊은 정박장이 나온다. 메이지유신으로 실직한 사무라이들에게 이 사업은 일자리 확보를 의미했지만 어민들은 넓은 어장과 김 양식장을 잃게 되었다. 축항을 주관하던 당시 지사는 죽창을 가지고 찾아온 어민들 설득에 곤욕을 치렀다.

축항 기술은 간척의 나라 네덜란드의 선진기법을 도입하였다. 내무성 촉탁기사 안토니 토마스 L.R. 물더(A.T.L.R.Mulder, 1848~1901)가 현지에 맞게 설계를 했다. 물더는 11년간 도쿄항과 오사카항 개축을 비롯해 여러 지역의 하구제방과 운하 건설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우지나항은 5년여 공사 끝에 1889년 11월 완공되었다. 처음엔 출입 선박이 적어 '쓸데없이 만들었다'면서 비판을 받았다. 전쟁이 터진 후 항구가 번잡해지자 이번엔 '앞일을 미리 내다봤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이런 평가는 섣부른 것이었다.

우지나항을 떠나가는 페리선. 일본군도 이런 모습으로 조선을 향해 떠났다.

■ 전쟁을 발신하던 우지나군항

군용열차를 타고 온 병사들은 육군부두에서 수송선을 타고 떠났다. 연이어 병력과 함께 포병 장비가 선적되고, 각종 병기와 군수물자가 실려 나갔다. 1894년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 1911년 만주 주둔, 1919년 시베리아 출병, 1937년 중일전쟁, 1940년 태평양전쟁. 한창 땐 30분 간격으로 군용열차가 밀려왔다.

조선과 중국에서 귀국한 병사들은 육군 개선관에서 환호성을 질렀지만 수많은 유골함도 같이 들어왔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곤 갈수록 돌아오는 병사들이 줄어들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엔 인도네시아 섬을 방어하던 마지막 5사단장 야마다 세이이치(山田淸一, 1893~1945) 중장이 참모장과 함께 자결했다.

히로시마시 중앙부에는 그 10일전인 8월 6일 원자폭탄이 떨어져 9만명에서 12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외곽이던 우지나항의 군사시설에는 수많은 부상자로 들끓었다. 5사단 사령부와 예하부대 건물이 완파하면서 5사단도 역사에서 사라졌다.

우지나항은 아이들이 동요 '미나토'를 부르고, '청일전쟁개선비'를 세울 땐 활기찬 군항이었다. 군사도시 히로시마에서 침략군을 송출하는 현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반격과 함께 원폭이 떨어질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히로시마엔 원폭 유적과 함께 일본 군국주의 유적이 널려있다.

낚시꾼 건너 보이는 부두가 옛군항 부두자리.

■ 우지나 신항의 출구 표시

우지나섬 야산에 올라 북쪽을 보면 오른쪽에 옛 군항이 나온다. 지금은 히로시마항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군용철도 종착지와 각종 병참부대도 거기에 있었다. 옛 군항이 보이는 제방에선 더운 여름날 오후에도 낚시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왼쪽에는 구레와 마쓰야마로 페리선이 떠나는 '히로시마항 우지나 여객터미널'이 있다. 여객터미널은 시원했다. 땀을 식히기에 그만이었다. 매표소에 계속 사람이 찾아들어 표를 산다. 페리선 출항시간은 정확하다. 인근 섬 주민들에겐 긴요한 발 노릇을 한다.

부두로 나갔다. 멀리 연무로 흐릿하게 보이는 섬 사이로 배가 빠르게 들어온다. 한 떼의 승객들이 쏟아져 내린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타자 곧 떠나간다. 페리선 승객도 노인이 많다. 젊은이가 있으면 눈에 띈다. 1894년 조선으로 출정한 5사단 병사들은 모두 젊은이였다.

메이지정권은 시종 침략으로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일관했다. 그리고 궤변을 내세워 합리화했다. 제3대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1890년 12월 제1회 제국의회에서 밝힌 시정방침이 대표적이다.

"독립을 지키려면 첫째 '주권선', 둘째 '이익선'의 방호가 필요하다. 일본의 '이익선'은 조선이다."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말이었다. 1894년 우지나항에서 군함에 승선한 5사단 병사들은 이런 침략의 선봉대였다.

지금 침략의 깃발 욱일승천기가 다시 나부끼고 있다. 일본의 극우파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는 그 깃발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겠다. 극우성향 각료들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서 또 말썽을 일으켰다. 제국일본의 망령을 자꾸 불러오는 중이다. 아시아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일본제국 5사단 병력이 출항한 우지나 신항의 출구표시. 우파가 득세한 일본의 출구는 어디인가.

히로시마 신항 우지나 부두에 커다란 출구표시가 있다. 노란 바탕에 크게 쓴 표시이다. 이 화살표를 따라 승객들이 길을 찾아나간다. 우파가 득세한 일본 정계에도 국제관계를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출구표시가 필요하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