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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직전의 히로시마, 군막 즐비한 병영도시

24. 히로시마 대본영
이곳서 훈련받은 후비보병이 보은·공주 등서 학살자행
전범 진원지임에도 일제 미화할 땐 항상 성스러운 유적
기단석만 남은 118년 역사 대본영, 지금은 비둘기떼만

  • 웹출고시간2013.04.09 18:46:3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4. 히로시마 대본영

■ 대본영 터의 기단석들

히로시마대본영 건물.

히로시마성에 들어서자마자 대본영 터를 급히 찾았다. 중앙부로 올라가니 작은 정원 건너 기단석이 즐비하다. 그 앞에 「히로시마대본영(廣島大本營)」이란 돌말뚝이 있다.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어느 역사 유적지에서도 이렇게 전율한 적이 없었다. 포로로마노나 페르세폴리스에서도 그렇지 않았고, 아부심벨이나 아잔타석굴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하찮게 보이는 기단석 무더기 앞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이 대석 위의 건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894년 조선의 치욕은 대본영에서 시작됐다.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원병을 청하자 이틈을 타서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히로시마의 5사단 소속 9여단이었다. 조선정부는 퇴거를 요구했으나 7월 23일 경복궁을 기습 점령했다. 이날 조선왕조는 망한 것과 다름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명백해졌을 때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결정했다. 히로시마대본영은 후비보병 제19대대를 증파하면서 동학농민군 학살령을 내렸다. 공주 우금치, 장흥 석대들, 김제 원평, 진주 고승당산, 홍주성, 연산, 보은 북실 등에서 자행된 학살은 무자비했다. 그런 학살령의 발원지가 바로 이 기단석 위에 있던 대본영이었다.

"얼마나 무서운 곳이었는가." 조선 국왕도 대본영의 명령 하나에 인질이 되었다. 강제로 동맹조약을 맺은 조선정부는 관청과 막사를 일본군에 제공해야 했고, 행군로의 지방관은 일본군 장교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대본영은 조선 국토를 철저히 유린시켰다.

이제 118년이 지나 기단석만 남은 대본영엔 비둘기와 참새가 번갈아 날아든다. 한적한 느낌까지 든다. 외롭게 찾아온 한 한국사연구자는 대본영 앞을 쉽게 떠날 수 없었다.

■ 청군 무기를 전시했던 천수각

1934년 청군에게 노획한 전리품을 전시한 천수각 2층 남쪽 통로.

원폭은 히로시마성의 천수각도 부셔놓았다. 이 천수각은 1958년에 복원해서 4개층 모두 전시관으로 꾸몄다. 2012년 여름 기획전 주제가 마침 「청일전쟁과 히로시마성」이었다. 과거의 모습을 전해주는 옛사진에서 군사도시 히로시마와 군사기지 히로시마성이 생생히 드러난다.

천수각 동쪽 아래 있던 5사단 본부, 곧 대본영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겉모습은 참하다고 표현할만한 아담한 건물이었다. 그러나 전쟁 지휘부가 거기에 있었다. 주변에 있는 건물엔 보조기관들이 배치되었다. 뒤쪽에는 해자까지 메이지가 산보하던 정원이 이어졌다.

청일전쟁은 일본 근현대사에서 러일전쟁 다음으로 자랑스러운 사건으로 평가된다. 제국을 칭했던 1934년에는 더 자랑이었을 것이다. 전쟁 발발 40주년을 맞아 전리품 전시를 천수각 2층의 남측 통로에 한 적이 있었다. 흑백사진 한 장에 그 장면이 들어있다.

청군의 깃발인 용기(龍旗)는 매우 컸다. 대들보 위로 길게 못을 박아 걸어놓았다. 커다란 군영에서 휘날리던 깃발을 일본군이 탈취한 것이다. 삼지창이 늘어선 앞에는 각종 신식소총을 세워놓았다. 청군은 서양에서 여러 형태의 소총을 사들여 병사들의 총이 제각각이었다. 일본군은 제식 무라타소총으로 무장하였다. 전투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메이지천황이 히로시마에 온 것을 기념하는 전람회 그림엽서.

2012년 히로시마성 천수각의 전시 주제는 전쟁범죄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조선과 청에서 벌인 침략과 잔인한 행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랑거리만 전시하였다. 메이지천황이 히로시마에 온 것을 기념했던 전람회사진첩 이름이 '성스러운 유적 히로시마대본영 그림엽서'였다. 제국일본을 미화할 경우 히로시마대본영은 성스러운 유적이 되는 것이다.

■ 군사기지 히로시마성

히로시마성 일대의 밀집된 군사시설.

히로시마성 안팎은 온통 각종 부대가 빽빽이 배치되었다. 성안은 5사단 사령부 그리고 경리부와 통신대가 있었고, 해자 주변에는 각 연대와 지원부대가 늘어섰다. 육군유년학교를 비롯해 4개연대와 포병 및 병참대의 막사도 2층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미군 항공기가 원폭 투하 직전에 찍은 사진이 섬뜩하다. 사방 해자 주위가 전부 긴 막사와 연병장들이다. 이런 연병장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이 조선에 건너와서 경복궁을 기습하고, 성환과 평양을 공격했던 것이다. 천수각이 바라보이는 앞에서 포병부대가 야포를 거치하고 사격 연습을 하는 사진도 있다.

메이지정권은 이런 사단을 도쿄를 비롯한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구마모토에도 두었는데 1893년 12월의 전시편제에 따르면 각 사단의 정원은 18,492명이었다. 청일전쟁 직전에 무려 6개 사단 11만 명 이상의 동원병력을 갖춰놓았다.

사단은 4개연대와 포병연대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기병대대와 공병연대와 함께 탄약대대와 치중병대대(병참대대)가 있었다. 또 위생대와 야전병원도 딸려 있었다. 이때 조선정부의 신식군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규모였다. 양무운동의 열기 속에 양성한 청국의 육군도 전투력에서 압도하였다.

천수각에서 찍은 히로시마성 주변 현재사진.

지금 히로시마성 일대는 히로시마시 합동청사와 현립미술관 그리고 고층아파트로 변했다. 군사도시를 탈피해서 평화의 도시를 지향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1894년의 폭력성이 현재 유물 수장고에 들어가 있는지, 아니면 지금도 진행 중인지 이웃국가들은 마음을 놓지 못한다.

■ 대본영 기단석 위의 단상

열기가 치솟는 속에서 대본영 기단석 위를 걸었다. 갖가지 단상이 떠오른다. 당시 참모총장인 황족 육군대장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小松·彰仁)는 이른바 정청대총독(征·大·督)이 되었으나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실제 지휘권은 사쓰마번 출신인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 육군중장이 장악했다. 가와카미는 대본영에서 육군상석참모 겸 병참총감을 맡아서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을 기획한 인물이었다. 1895년 3월에는 정청총독부 참모장까지 겸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최고 병참과 통신책임자인 운수통신장관을 맡았다. 일본군의 병참과 군용전신망이 깔린 조선은 후방 병참기지에 불과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재기한 후 그 진압은 병참 지휘계통이 진압을 책임졌다.

메이지, 아키히토, 가와카미 소로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894년에 오르내린 대본영 건물은 원자폭탄의 열풍에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한국사의 기록에서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여전히 들려온다.

히로시마대본영 터의 기단석. 멀리 복원된 천수각이 보인다.

기단석 위로 올라서 한 바퀴 돌았다. 다시 돌고 또 돌았다. 비둘기와 참새가 떠나지 않고 먹이를 구한다. 천수각을 보고 다시 기단석으로 왔다. 새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메이지와 가와카미 소로쿠의 혼령도 새처럼 대본영을 지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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