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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한인·만주·몽골인 등 '오족협화(五族協和' 망상

48. 일제, 동아시아를 화약고로 만들다
동북공정의 역사 탈취 모델은 일본제국의 만주역사 분리서 시작
러일전쟁 후 세력을 펼친 만주에 관동군을 주둔시켜 침략 확대
관동군의 폭주는 제어 불가, 일본 최고 인물들이 만주국 경영

  • 웹출고시간2013.12.22 18:53:47
  • 최종수정2013.12.22 18:53:47
48. 일제, 동아시아를 화약고로 만들다

■ 러시아와 경쟁했던 일본제국

동북공정의 내용은 간단하다. 만주에 살던 여러 민족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사업이다. 여진족은 물론 고구려, 발해, 금, 후금의 역사를 변방사로 수용해서 중국사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사의 주류 중 하나인 고구려와 발해사가 들어가 문제가 커졌다. 이런 역사 왜곡은 어디서 시작되었나. 일본제국의 유산에 침탈의 역사가 들어있다.

조선 침략에 성공한 일본제국은 만주로 눈을 돌렸다. 로마노프왕조의 러시아는 아무르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한 뒤 만주까지 차지하려고 시도하였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나갔다. 삼국간섭으로 차지한 랴오둥에 요새를 구축해서 비수처럼 활용하였다. 일본제국이 청국에게 빼앗은 이권을 지키려면 러시아와 싸워야 했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활약이 필요하였다. 청일전쟁보다 더 큰 전쟁을 예상한 스파이들이 러시아와 유럽에서 암약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꺼려한 영국과 미국 등 지원세력도 구하였고, 유태인 갑부도 일본제국을 후원하였다. 결국 일본제국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이제 랴오둥과 만주까지 세력권에 넣게 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예언자 같았다. 그가 구상한 침략전쟁의 원형은 제국 군대가 실천해나갔다.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오키나와를 일본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조선을 속국화하며, 만주와 대만 그리고 필리핀을 지배하라." 이제 만주가 일본의 이익선 안에 들어왔다.

■ 일본제국의 중국 침략

중국이 처절히 당한 조약침탈사를 불평등조약이란 제목으로 정리한 책.

중국근대사는 한국근대사와 비슷하면서 다르다.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지는 않았지만 반식민지의 고통도 심각하였다. 열강의 침략은 중국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선두에 일본제국이 위치했고, 마침내 대륙 전체로 야욕이 확대되었다. 『중국 근대 불평등조약 연표』엔 침랙상이 집약되어 있다.

이 책의 연표는 끔찍하다. 1842년 8월 29일 영국과 체결한 '난징조약'부터 시작된다. 무역장정과 관세 협약 그리고 조계 설치 등이 이어진다. 19세기 40년대부터 20세기 40년대까지 무려 한 세기 이상 열강은 조약 형태로 중국을 뜯어먹었다.

중국인이 배우는 중국근대사를 모르면 현재의 중국을 모르는 것이다. 한국근대사가 가장 아프다는 주장은 우물 안의 소리에 불과하다. 대륙의 처절한 침략사를 알아야 동아시아 역사를 객관화할 수 있다.

그 정점에서 가장 악랄했던 것이 일본제국이었다. 청일전쟁의 막대한 배상금, 타이완 탈취, 베이징 점령, 만주철도 장악, 만주사변, 상해사변, 만주국 수립, 노구교사건, 중일전쟁, 화북분할, 난징대학살, 난징정부 수립 등 끝이 없다.

일본제국은 중국을 분할해서 삼키려고 했다. 그 방법은 모략전술과 대량 살육이었다. 처음엔 만주를 떼어냈고, 다음은 화북을 분리했으며, 마지막엔 난징 괴뢰정부를 세웠다.

일본제국은 침략을 감행하면서 후세의 심판을 두려워했다. 사실을 감추거나 축소하고, 역사를 왜곡시켰다. 지금도 군사박물관 유슈칸(游就館)에 전시된 만주국 패널이 역사 왜곡을 상징하고 있다.

■ 만주사는 중국사와 별개의 역사

유취관의 만주국 건설구상도.

지도에 5세기 중엽 만주는 고구려로 채색하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이 일본제국에 부속되었기 때문에 만주는 일본 연고지라는 의미였다. 조선은 임나일본부나 일선동조론으로 일본제국의 일부라고 했다.

9세기는 발해가 만주를 차지했고, 13세기엔 금이 만주와 산동반도까지 차지했으며, 14세기에는 원제국의 영토였고, 17세기에는 후금의 땅이라고 표시하였다. 18세기에는 만주에서 일어난 청국이 몽골과 티베트까지 대제국을 만든 것을 그려놓았다. 문제는 1932년이었다. 청제국이 중화민국과 몽골 그리고 만주국으로 분립했다는 것이다.

유취관의 만주사변 전투지도

이 지도만 보면 만주국은 역사발전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흑룡강과 장백산맥 사이의 광대한 지역은 시대에 따라 호칭은 달랐지만 퉁구스계 만주민족의 요람지였다. 만주에는 부여를 시작으로 고구려, 발해, 요, 금, 후금(청) 등의 국가가 있다. 만주사변 후에는 청조의 선통제(宣統帝)를 원수로 한 만주국이 건설되었다." 이것이 주요 설명이다.

만주국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다. 면적 113만 평방미터에 인구 4천만의 국가 형태를 갖고 있었다. 건국이념은 오족협화(五族協和)으로 일본인, 한인, 조선인, 만주인, 몽골인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이었다.

오늘날 중국은 만주국을 위만(僞滿), 또는 위만주국(僞滿洲國)으로 표기한다. 가짜라는 뜻이다. 가짜인 사실은 오족 가운데 일본인을 앞장세우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특무기관이 선통제 부의(溥儀, 1906~1967)를 빼돌려서 황제로 올렸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 만주국을 지배한 關東軍

러일전쟁 후 일본군은 1개사단을 파견해서 남만주철도와 조차지를 경비하도록 했다. 관동군이 배치된 것이다. 1928년 관동군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883~1955) 대좌가 만주군벌 장작림(張作林)을 폭살시킨 후 군대가 증파되었다.

만주를 주제로 쓴 문고본

만주사를 중국사에서 분리하려는 의도가 일본의 만주연구에 나타난다.

1931년에는 이른바 류탸오후(柳條湖)사건을 일으켜서 만주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일본으로선 장장 15년의 긴 전쟁을 시작한 사건이었다. 다음해엔 상하이사변을 일으켜서 국제도시 상하이를 점거하였다.

중국이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제소하자 리턴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파견하였다. 영국의 리턴 백작 등이 둘러본 만주와 상하이의 사태는 심각하였다. 중국과 만주의 실정, 중일 분쟁, 만주국 수립, 상하이사변 등을 살펴본 조사단은 1932년 만주국이 괴뢰정권이라는 보고서를 공표하였다. 국제연맹 총회도 투표를 통해 보고서를 인준하였다. 일본제국의 대응은 연맹 탈퇴였다.

1936년 관동군은 4개사단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병력 증파가 시작되어 1941년에는 14개사단으로 증강되었다. 관동군은 최대 74만 명 이상 증강되었다. 그래서 '정예 백만' '무적 관동군'이란 말까지 나왔다.

만주는 넓었고,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참모본부는 가장 우수한 장교를 골라 보냈다. 관동군 출신이 패전 이후의 일본현대사에 자주 나오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만주국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관료를 보내 운영하도록 했다. 일본제국으로선 전력을 다해 만주경영에 나선 것이다.

■ 만주국은 전쟁의 화약고

일본제국의 엘리트 장교가 되는 길은 일정했다. 육군유년학교를 나온 후 사관학교를 졸업해서 참모본부에 근무하여 모략전을 익히고 육군대학교에서 참모장교로 양성된 뒤 실병력을 지휘해서 전투경험을 쌓는 것이다. 군국주의의 길은 유년학교 시절의 세뇌작업에서 출발하였다. 10대의 소년에게 강조한 교육은 정신력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하기시의 한 귀퉁이에 10대 소년들을 세뇌시킨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전국 주요도시로 확대된 실체가 유년학교였다. 일본제국 육군의 장교는 유년학교에서 길러졌고, 일본제국 군대의 정신력도 유년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유년학교 출신들이 관동군의 핵심참모로 군국주의 노선을 고수한 까닭에 중일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이어져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세계대전의 결과 한국은 일본제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될 수 있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당시 전쟁 확대에 반대하였다. 『제국주의론』을 써서 식민지의 비참한 상태도 파악했다고 한다. 만일 전쟁이 확대되지 않고 만주국과 조선이 일본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야나이하라 교수는 시코쿠의 에히메현 이마바리 출신이다. 최대의 왜구 세력인 노시마 무라카미(村上)파의 근거지였다. 그가 과거의 역사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수군박물관이란 이름을 단 왜구박물관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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