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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상선에 난사하고 물에 빠진 병사 향해 총격

20. 일제의 고승호 격침 미화
고승호 격침 사건은 일본군 잔인성이 드러난 최초의 학살사건
국제사건으로 비화한 고승호 사건을 무마하려고 일정부 고심
일본의 정보력은 알아줄만…청나라 군대의 움직임 손금보듯

  • 웹출고시간2013.02.26 17:56:1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0. 일제의 고승호 격침 미화

야스쿠니신사의 유슈칸에 전시된 나니와호의 선장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 초상화.

고승호(高陞號, The British steamship Kowshing)는 영국 국적의 1,355톤 상선이었다. 일본 군함 나니와호가 이 상선을 격침한 사건은 외교문제로 비화하였다. 당시 고승호는 청국에 고용되어 병력을 수송하는 중이었다. 이 병력은 일본군을 적대하기 위해 파병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진압하러 가는 길이었다.
 
고승호 격침 사건에는 확인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우선 청의 대고항에서 고승호가 출발할 때는 물론 침몰될 때까지 청일 양국의 어느 나라도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전쟁 상태가 아닌 시기에 군함이 상선을 침몰시킨 사건이었다.
 
고승호에 대한 배상금은 매우 큰 금액인 75만 달러가 거론되었다. 국제 해사위원회는 영국의 인도차이니즈 기선회사가 제기하는 배상금 문제를 다뤄야 했다. 이런 요인 때문에 큰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관련법을 다룰 때 주요 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고승호 사건은 동승했던 독일인 교관 한네켄 콘스탄틴 폰(漢納根, 1855~1925)의 진술로 전모가 드러났다. 독일 귀족 출신인 한네켄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독일군에서 육군대위로 전역한 뒤 베를린 주재 중국공사인 리펑바오(李鳳苞, 1834~1887)의 요청으로 청국에 와서 회군(淮軍) 교관을 맡았다. 그러다가 이홍장의 군사고문이 되어 여순 대련 위해위의 포대 구축에 관여하였으며, 1894년에는 조선 형세를 보고 오겠다고 이홍장에게 자청해서 동승을 허락받았다.
 
수영에 익숙한 그는 섬으로 피신한 뒤 인천에 가서 영국부영사 W.H. 윌킨슨에게 상세하게 전후사정을 진술하였다. 그 내용이 서구 언론에 소개되자 일본은 역공을 폈다.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였다고 강변한 것이다.

■ 메이지 일본의 정보력과 전쟁 결정

 

일본측이 그린 청일전쟁 전황도이다.

청일전쟁과 조선침략 기록을 보면 일본제국의 정보력은 놀랄만하다. 더구나 획득한 정보의 활용은 더욱 놀랄만하다. 끊임없이 내전을 치러온 일본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19세기 말 일본에게 조선은 침략 대상, 중국은 가상 적국이었다. 일본은 외교관, 무관, 기자, 상인, 여행자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침략 대상국과 적국의 정보를 파악해갔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청국의 군사력을 파악한 정보가 있다.
 
"청나라 해군은 적함에 대담한 저항을 하기 어렵고 육군은 전투의 기력이 없다. 무기고·조선소 및 금고는 모두 비어 있어 그 상태는 실로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다." "근래 청나라 정부에서 주문한 무기는 제각각 일정치 않고 혹은 수백 또는 수천 또는 수십 정, 이것들은 각 장교가 이번 전쟁 때문에 특별히 주문한 것 같다." "청군은 기아 때문에 매우 곤란에 빠졌다. 텐진과 베이징에서도 군량 공급에 관하여 확연한 처리를 하지 못했다. 군량은 인부와 당나귀로 운반하므로 도중에서 거의 4분의 1을 소비하였다." 일본의 전쟁 결정과 전격전은 이런 정보가 토대가 되었다.
 
조선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후 벌어진 사건은 일본이 속속들이 파악하고 즉각 대처하고 있었다. 날짜를 보면 놀랍다. 고종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 것은 1894년 6월 3일이었다. 다음날인 6월 4일 일본정부는 육해군회의를 열어 대본영 설치를 결정했다. 대본영은 "메이지 이후 전시 또는 사변에 천황 직속으로 육해군을 통수하는 최고기관"이다.

 

청일전쟁 당시 희생된 북양해군의 장병 600여명의 이름과 직함을 새겨놓은 담장 비석.

6월 5일 히로시마에 주둔한 제5사단에 동원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5사단 소속 혼성제9여단이 6월 9일 우지나(宇品)항에서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청국군 선발대가 섭사성(·士成)의 지휘 아래 대고(大沽)항을 떠나 조선으로 출발한 3일 후였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은 인천에서 서울로 직향했지만 청국군은 아산 백석포에 상륙하였다.
 
청국군 지휘관 엽지초(葉志超) 제독은 늦장을 부리다가 북양대신 이홍장의 질책을 받고 늦게 출발하였다. 엽제독은 일본군 파병 소식을 듣고 증원을 요청해서 7월 21일 증원 병력이 대고항을 출발하였다. 일본 해군은 7월 19일 연합함대를 구성해서 조선으로 밀려왔다.

■ 풍도전투의 실상

중국은 갑오전쟁박물관을 세워 갑오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다.

일본의 전쟁 도발은 경복궁 기습이 시작이었다. 7월 23일 경복궁 수비병은 일본군 혼성9여단의 기습을 받고 반격하였으나 패산하였다. 경복궁과 서울 도성은 일본군이 장악하였고, 갑오개혁은 그런 와중에 진행되었다. 청일전쟁 이전에 조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경복궁 전투가 벌어진 7월 23일 청 군함 제원, 광을함 등이 아산에 도착해서 병력과 무기 그리고 군량과 군마를 내렸다. 그때 경복궁 전투 상황이 전달되고 급히 귀환하라는 명령이 나왔다.
 
일본 연합함대 제1유격대가 아산 인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함정 제원함과 광을함 그리고 보조함인 조강함을 공격한 것은 7월 25일이었다. 전혀 전쟁을 생각하지 못한 청국의 군함은 기습을 당했다.
 
고승호 격침 직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네켄은 이렇게 진술했다. "일본 군함이 다가와서 정확히 우리 배의 좌측 약 150미터 거리에서 멈춰 섰다. 나는 그 군함에서 어뢰 하나가 발사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즉시 모든 대포들이 불을 뿜었다. 그들은 어뢰가 그 목표물에 도달되기 전에 대포를 두 번 발사하였다. 어뢰는 아마도 석탄 창고가 있는 배의 중앙을 정확히 맞춘 듯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석탄 조각과 물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더 처참한 사건은 그때 일어났다. "단단히 무장한 군사들을 태운 일본의 보트 하나가 군함에서 내려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오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것은 슬프게도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침몰하고 있는 고승호의 선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목적에서였는지 알지 못한다. 일본 군인들은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발사하였다."

 

가고시마의 도고 헤이하치로 탄생지 표시.

오가사와라가 편집한 『도고 헤이하치로전집』 제1권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영국 런던 인도차이나 기선회사 대리점인 이화양행(怡和洋行) 소유선인 고승호가 청국정부에 고용되어 청병 1,100명 대포 14문, 기타 약간 무기를 대고에서 아산으로 운송하고 있었다. 도고 함장은 유럽인 선원만 나니와호로 옯겨타라고 했으나 청군이 저지하였다. 그래서 한 점의 주저 없이 격침을 명령하였다." 그런 뒤 선장 가르스 웰스와 유럽인 선원만 구조해서 데려갔다.

■ 나니와호의 선장 도고 대좌

도고 헤이하치로를 성장(聖將)으로 칭송하는 가고시마의 비석.

한네켄은 청국으로 돌아간 뒤 북양해군의 교관 겸 부제독이 되었다. 황해해전이 벌어질 때에는 정여창 제독의 기함인 정원함에 승선해서 지휘부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진술한 고승호 격침사실은 서구인의 유력한 증언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도 고승호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와 책들이 쏟아졌다. 메이지 36년 5월 다카하시(高橋作爲)가 쓴 『영선고승호지격침(英船高陞號之擊沈)』를 보면 한네켄 때문에 사실을 감추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은 전시에 나포한 적국 병력을 태운 배가 예인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격침시킬 수 있다고 강변하였다. 도고는 영국에서 국제법을 배워 정당하게 명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느 것도 맞지 않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전쟁 상태가 아닌 시기에 다른 나라 상선을 격침시킨 행위는 정당할 수가 없다. 더구나 침몰하는 배 위에 있는 사람들과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사격해서 학살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시킬 수 없는 문제이다.
 
고승호는 매우 많은 은괴와 금괴를 군자금으로 실었다는 소문 때문에 다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서해의 험한 조건 때문에 탐사가 어려웠다. 2001년 한국의 민간업체가 침몰선 고승호를 확인했으나 얼마간 은화와 은괴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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