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0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조선·중국인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한중 침략을 선동한 일본의 선각자, 개화파 만남은 비극의 시작
교토의 고쇼(御所)는 실권을 갖지 못한 천황이 세월을 낚은 공간
그러나 일본에서는 지금도 1000년 사이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존경

  • 웹출고시간2012.11.27 17:27:4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8. 후쿠자와 유키치, 아시아인을 멸시하다


1881년 4월 조선에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상을 보고 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때 일본 정부가 만나게 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다음해 1882년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에 가서 문물 시찰을 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풍부한 서양지식과 식견으로 매료시킨다. 조선의 젊은 관료는 일본의 변화상에 놀라며, 유키치의 언설에 세뇌되었다.

조선 사절단으로 간 개화파는 경험이 적었다. 연장자인 김옥균(1851년생)은 30대 초, 철종의 부마로 실권자인 박영효(1861년생)는 20대 초였고, 홍영식(1955년생) 유길준(1856년생) 서광범(1859년생)도 역시 20대였다. 이들 젊은 명문 양반가의 자제들이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난 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만세일계

만세일계(萬世一系)가 신앙의 대상이라면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국제관계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요소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천지개벽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의 혈통이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라는 것이 만세일계이다. 『고사기(古事記)』 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가 근거라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황통과 국체가 연면히 내려온 것이 외국과 다르다고 하면서 이러한 정권을 유지해서 문명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되 만세일계의 천황이 존재하는 국체가 그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는 군주제를 유지해도 일본처럼 신화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과학은 충분히 이런 오류를 해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라면 어떤 신화를 사실로 보든지 거론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본은 문제가 된다.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국가를 멸시하는데 만세일계를 이용하였다. 더구나 구일본제국의 헌법에 이런 내용이 명시되어 있고, 침략전쟁에 악용하였다. 아시아인은 이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 교토 고쇼(御所)의 허전한 정경

교토에는 메이지유신 후에 도쿄로 이전하기 전까지 천황이 살던 궁궐이 있다. 일반에게 건물 외부와 정원의 일부를 공개한다. 단체로 보아야 하는데 안내하는 여직원의 어투가 독특하다. 마치 옛날 연극을 보는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된 발성이 계속된다. 고쇼가 갖는 의미가 그러했다. 그 공간에는 무언가 비어 있었다.

교토 고쇼(御所)의 자신전(紫宸殿). 천황 즉위나 태자 책봉식과 같은 의식용 건물이다.

자신전(紫宸殿)은 즉위식과 같은 의식을 치룬 격식이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 앞에서 한참 동안 소개하는데 내부 공간은 볼 수 없고 밖에서만 보도록 한다. 한 바퀴 돌아보는 일행 좌우에는 감시가 엄격하다.

교토 고쇼의 연못과 정원

도쿠가와 막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천황은 허세였다. 고쇼의 연못과 정원에는 허전한 공기가 떠도는 듯했다. 수백 년 간 천황이 유폐되듯 살아온 공간이 바로 여기였다.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정갈한 마당과 수수한 건물 구조가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대를 이어왔건 아니건 천황사의 공백이 그림처럼 확인이 된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을 에도성으로 옮겨갔다. 도쿠가와막부를 압도하는 방법이 수백년 막부가 채웠던 에도성의 공간을 천황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권력은 메이지 정권의 실력자가 온전히 대신하였다. 막부의 재도전은 이로써 불가능하게 되었다.

■ 조선의 개화파는 이용 대상

막부의 토대는 사무라이 세력이었다. 갑자기 힘을 잃은 사무라이들은 메이지정권에 반감을 가졌다. 드디어 반란까지 일어나 전국이 소용돌이쳤다. 이른바 일본의 선각자들이나 실권자들은 저항세력의 힘을 밖으로 분출하도록 유도하였다. 메이지유신은 침략이 전제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침략이 성공하면 왜구처럼 막대한 재물을 빼앗아올 수 있었다. 임진왜란의 약탈은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것은 서양제국주의 국가가 가져가는 재물을 복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구상을 널리 퍼뜨린 사람들이 바로 요시다 쇼인,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또 그것을 실행한 인물들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그들의 제자들이었다.

개화파가 일본에 사절단으로 오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회로 생각했다. 이들을 손바닥 위에서 부릴 수 있는 침략의 도구로 본 것이다. 윤치호는 아직 어린 10대였고, 유길준은 20대 중반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미국과 유럽을 견문한 것을 써놓은 『서양사정』이나 『문명론의 개략』은 젊은 개화파의 마음을 녹여낸 미끼였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은 개화파를 이용하는 꿈에서 깨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개입한 것이다. 이용가치가 줄어든 김옥균은 버림받았고 일본 각지를 떠돌았다.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본색을 드러낸다. 탈아론과 함께 노골적인 조선 침략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청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갑신정변 후 일본은 국력을 기울여서 10년 동안 전쟁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청일전쟁이 선전포고 없이 일본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 왜 그처럼 죽였는가?

일본군이 조선과 중국에서 왜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이들을 사람으로 보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사람처럼 보지 않았다.

그의 탈아론은 요점이 이렇다. "서양문명의 유행은 막을 방도가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이념이 '탈아(脫亞)'다. 근대화를 거부하는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 압박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일본은 이웃과 헤어져 서양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

그는 1894년 조선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침략 선동을 강화했다. "조선 인민은 소와 말, 돼지와 개와 같다." "조선인의 완고 무식함은 남양의 미개인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청국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드러냈다. "서울에 주둔중인 청국병을 몰살하라."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시사신보」에 공개적으로 막말을 했다. "중국인은 장구벌레, 개돼지, 거지, 오합산적이다." 일본군이 벌레와 짐승을 죽이는데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일본군의 정훈교재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발행한 신문인 「시사신보」였고, 그것이 그가 생각한 문명이었다.

■ 유키치의 문명은 무엇인가

일본은 천황제가 바탕인 국체가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했다. 그런 위에서 서양의 문명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이러한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선동 속에 메이지 유신, 문명화, 부국강명의 길, 침략전쟁,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선 위에서 펼쳐진 역사였다.

일본군이 여러 나라에서 벌인 학살사건의 원인을 군인들 개개인이 가진 야만성에서 찾으면 겉만 보게 된다. 그들의 정신적 이론적 지도자인 선각자의 공개적인 '정훈교재'에 골자가 드러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선각자이다. 1천년을 망라해서 위대한 인물 중 7위로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앞으로도 그러한 존경심은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유키치를 존경하는 일본의 우익세력에게 묻고 싶다. 문명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