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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면죄부'…스스로 속고 있는 일본의 역사서술

히로시마 원폭,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자기 최면
야스쿠니 신사는 침략전쟁을 기리는 파렴치한 시설
전후 처리 실패로 결국 일본 정치인의 망언 되풀이

  • 웹출고시간2013.05.14 17:04: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9. 야스쿠니신사와 뒤틀려진 역사관

■ 자기역사를 속이는 역사관

인도 아잔타석굴로 올라가는 계단에 거지가 앉아서 구걸을 한다. 평생 동냥하며 살아온 할머니 거지이다. 깊게 파인 눈과 주름진 얼굴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간절히 말한다. "기브미, 원 달러! 원 달러!' 파르스름한 눈동자에 홀려 돈을 주게 되면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동냥을 준 사람을 내려다본다. 무슨 까닭인가.

"내가 너에게 적선(積善)을 할 기회를 주었으니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극락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여행자는 당황해한다. 윤회설까지 올라가는 이런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

야스쿠니신사 앞에 있는 다나카지대 충혼비. 1918년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12사단 72연대의 다나카지대가 아무르주에서 혁명군과 조우해서 거의 전멸했다.

그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자기역사를 속이는' 일본의 역사관이다. 아무리 봐도 스스로 속고 있는 일본의 역사서술은 흥미까지 자아낸다. 시바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반복해서 나오는 구절이 있다. "아주 조그마한 나라가 개화기를 맞으려 하고 있다." 이렇게 불쌍하게 시작한다. TV 연속극에서 자주 나와 일본인을 세뇌시킨 구절이다. 그런 다음 열강이 일본을 침략한다고 엄살을 떨고 있다.

메이지유신으로 군사대국을 꾀했던 일본이 '아주 조그마한 나라'였나· 메이지 1년인 1868년 일본의 추정인구는 3,400만이 넘었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1894년은 4,180만명에 달했다. 러일전쟁을 일으킨 1904년에는 4,720만을 헤아렸다. 한국은 1925년 인구통계가 1,950만 명으로 나와 있다.

유엔 통계에서 2011년 일본 인구는 1억 2,653만으로 세계 10위에 해당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국력도 '아주 조그마한 나라'는 아니었다. 막부 말기의 일본경제는 상업자본의 성장 등으로 그리 불쌍한 상태는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왜 시바료타로는 소설을 엄살로 시작했는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승리한 영광을 크게 보는 방법이었다. 작고 가난하고 불쌍해야 크고 부유하며 강대한 나라에게 승리한 환호를 더 키울 수 있었다. 다음은 잔인했던 침략전쟁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열강이 밀려오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침략이라는 등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아잔타석굴 앞의 거지처럼 일본제국은 조금 앞섰던 근대화 성과를 보여주다가 표변해서 침략을 감행했다. 마침내 총구를 후원세력이었던 미국과 영국에도 돌렸고, 오랜 서양 교류국인 네덜란드도 희생대상으로 삼았다. 아! 히로시마! 패전 후엔 피해자로 둔갑하는 주술이 히로시마였다.

■ 히로시마와 면죄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일본의 침략과 잔학상에 면죄부를 주었나· 어느 나라에서도 면죄부라고 보지 않는다. 오직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원폭 투하는 인류의 비극이다. 피폭도시에서 매년 8월 6일과 9일에 나오는 말처럼 이런 비인도적인 사건이 더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핵무기를 없애고 영구평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그런 활동에 앞장 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피해만 강조하는 말을 들으면 가련한 생각이 든다. '자기역사를 속이는 나라'의 악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임진년의 침략이 원과 고려가 침공한 겐코(元寇)의 복수라며 수백년 전의 사건을 들고 있다. 또 고종과 대신을 협박해서 국권을 탈취했으면서 조약을 통해 나라를 통째로 넘겨받았다고 했다. 자주 이런 말을 하면 스스로도 사실로 믿는 최면효과가 있는 것 같다.

가장 큰 최면은 원폭 투하의 원인을 밝히지 않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평화선언이다. 그 결과가 일본인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제국의 용맹한 군대가 조선과 중국에 진출해서 영역을 넓혔고, 태평양 일대까지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었다. 아시아인의 자랑이다. 그런데 갑자기 원폭이 히로시마에 떨어져서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바뀐다.

일본이 침략전쟁의 가해 전력에 대한 반성 없이 이 세상의 평화를 대변하는 노릇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서 잘 알 수 있다.

■ 야스쿠니신사의 실상

야스쿠니신사 입구의 오도리(大鳥居).

본래 야스쿠니신사는 도쿄쇼곤샤(東京招魂社)에서 시작했다. 유신 10걸 중 하나인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郞, 1824~1869)가 제안해서 1869년에 반란 진압시 죽은 자기파 병사들의 제사를 위해 만든 것이다.

일본육군의 창설자이며 야스쿠니신사 창건 제안자인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郞) 동상. 1893년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다.

그는 야마구치번 출신의 차관급 병부대보(兵部大輔)로 군무를 총괄했다. 가고시마, 야마구치, 고치군 중심의 중앙군 편성과 징병제 실시, 진대(鎭台) 설치, 병학교(兵學校) 설치 등 육군 창설의 산파였으나 교토 군사시설 시찰 중 암살된다. 야스쿠니신사 중앙의 높고 큰 동상이 그의 것이다.

야스쿠니신사로 이름을 바꾼 것은 1879년이다. 1911년 가모 모모키(賀茂百樹, 1867~1941)가 펴낸 『야스쿠니신사지(靖國神社誌)』에 그 설명이 있다. 쇼곤샤(招魂社)가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순한 곳이라면 야스쿠니신사는 "나라에 여러 일이 있을 때 의지할 만세불역신령(萬世不易神靈)이 있는 곳"이란 의미이다. 침략의 역군으로 죽은 자에게 앞으로도 의지하겠다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본전 앞에 있는 배전(拜殿). 보통 여기서 참배한다.

지방에 있던 쇼곤샤(招魂社)도 고코쿠(護國)신사로 이름을 바꿔 해당 지역 출신 전사자의 위령장소로 만들었다. 야스쿠니신사같은 성격의 신사가 호국이란 이름 아래 지금도 곳곳에 존재한다. 서울과 나남에도 이런 신사를 세웠다.

청일·러일·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이어지고, 이른바 군신(軍神)이 신사에 들어오면서 전쟁 고취의 기능이 커졌다. 러일전쟁 때 뤼순항 폐색작전에서 죽은 히로세 타케오(廣瀨武夫) 중좌와 전신에 부상을 입고 죽은 다치바나 슈타(橘周太) 중좌, 상해사변에서 철조망 방어선을 폭파하고 죽은 이른바 육탄 3용사 등이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와 함께 들어왔다.

최악이 1978년에 패전 후 A급전범으로 사형되거나 옥사한 자들까지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한 것이다. 여기에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 조선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만주침략의 화신인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등이 포함되었다. 임진왜란 때 가고시마로 납치된 도공의 후예이면서 패전시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도 들어갔다.

■ 전후 처리의 실패작 일본

야스쿠니신사 이름표시(號標).

2차대전 이후의 일본정치사는 전후 처리의 실패작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침략한 일본제국을 변모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그 후유증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독일 패망 후 나치스의 지도자들인 하인리히 히믈러와 헤르만 괴링 등 일부만 처형하고, 히틀러의 지시를 받아 온갖 패악질을 하던 정부와 식민지 관료, 군인, 경찰 등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이 그런 꼴이다.

독일에서 나치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11년간 지배했다. 2차대전을 일으킨 해가 1939년이니까 6년 만에 패했다. 그런 독일에서도 나치 잔당에게 나라를 넘겨주지 않고 새로운 세력이 나라를 맡아 나치 잔당을 지금까지 추적해 처벌하고 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시작해서 8년 간 침략전쟁을 치뤘다. 이런 전쟁을 책임져야 하는 전범들은 메이지 유신 이래 77년 간 집권한 세력의 계승자였다. 불행히도 일본에선 대체 정치세력이 미약했고, 미군이 물러가자 전범 잔당들이 나라를 이어받았다. 더욱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가 회복되자 그 공을 온통 차지했다.

전쟁 도발의 원죄는 물론 자기역사까지 속이는 행태는 전범과 그 후예들이 판을 치는 그런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전후 세대 정치인들이 빈번히 침략전쟁 피해자들의 오랜 상처를 후벼 파는 말폭력도 결국은 전후 처리의 실패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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