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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왕릉과 같은 대형 비석으로 세워져"

구일본군 야마구치 파벌의 핵심, 초대총독에 이어 총리 역임
히로시마대본영 병참참모로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지휘계통 핵심
야마구치시 외곽의 대규모 가족묘지에 육군대장 아들과 함께 묻혀

  • 웹출고시간2012.12.25 16:03:5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2. 데라우치 마사타케, 왕릉과 같은 대형 비석으로 세워져

메이지 초기 일본육군의 파벌싸움에서 조슈파가 완벽히 승리하였다. 경쟁자 사쓰마 파벌은 밀려났고, 다른 번 출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슈파의 두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 육군대장으로 제1군사령관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작위는 공작을 받았다. 정치면에서도 두드러져 27년 간 귀족원 의원으로 지내면서 내무대신(3회), 사법대신(1회), 총리대신(2회), 추밀원 의장(3회)에 올랐다.

그는 일본 제국의 육군을 만든 핵심인물이었다. 심지어 공금 관련 독직사건으로 낙마했을 때 경쟁파벌인 사쓰마파까지 육군을 위해 복직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는 일찍이 조슈번 내부의 강온파 투쟁을 경험해서 파벌의 중요성과 그 운영을 잘 알고 있었다.

야마가타의 인맥 관리는 철저했다. 경쟁체제인 군과 관료 조직에서 승진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주요 자리에 자기 인맥을 심은 뒤 실력을 쌓고 공을 세우도록 기다렸다. 그런 다음 요직을 맡기고 철저히 뒤를 봐줬다. 군과 관료 조직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말 그대로 '일본 군벌의 원조'가 되었다.

야마구치 출신 중 그의 비호 아래 실세로 성장해서 육군을 10년 이상 지배한 인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였다. 그는 육군대신을 겸임하면서 제3대 한국통감이 되어 1910년 국권을 탈취한 다음에 초대총독에 올랐다. 그리고 1916년 10월 내각 총리로 갈 때까지 무단통치로 조선 땅을 암흑의 시기로 만들었다. 그는 바로 야마구치 인맥의 황태자였다.

■ 야마구치시에 묻힌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 모습.

데라우치 마사타케! 한국인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 무지막지한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한국인의 가슴과 머리에 아직도 그의 이름이 험악한 글자와 함께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국권강탈! 무단통치! 헌병경찰!

일제 침략은 메이지정부 아래서 온갖 계층의 일본인들이 거국적으로 벌인 사건이기 때문에 어느 특정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침략을 처음 발상해서 퍼뜨린 사람과 그 생각을 이어 받아서 주도해나간 사람들은 밝혀내야 한다.

요시다 쇼인이 일본의 부국강병책과 조선침략을 처음 연결시켰고, 그의 학동들인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혁명 후 이 주장을 받아 실행에 나섰다.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종하는 속에 마침내 침략을 완수한 인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이들은 모두 메이지유신의 공로자인 야마구치 인맥에 속해 있었다.

야마구치 현청 앞에서 동북쪽 큰길을 따라 가면 작은 야산 다음에 야마구치현립대학 간호학부가 나온다.

묘지 중앙에 있는 '데라우치 마사다케' 비석과 석등

이 야산 귀퉁이에 사람 어깨 높이의 팻말이 서있다. 이 돌팻말에는 데라우치 원수 묘지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고, 바로 옆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묘'를 가리키는 붉은 화살표가 있다. 그 앞에 서게 되자 갑자기 섬뜩해진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무덤을 찾는 발길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통감과 총독으로 군림했던 그는 무서운 존재였다.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죽은 그를 이제 93년만에 찾아가는 것이다.

■ 일본에 드문 왕릉같은 묘지

원수 육군대장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묘(元帥 陸軍大將 伯爵 寺內正毅之墓).

화살표 방향으로 올라가자 시멘트 비탈길 위로 계단이 나오고, 그 위에 여러 기의 비석이 줄지어 있는 공간이 나온다. 한 가운데 커다란 비석이 눈에 띈다. "원수 육군대장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묘(元帥 陸軍大將 伯爵 寺內正毅之墓)."

한 달음에 다가가 비석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데라우치의 묘가 있구나!" 한국근대사 기록에서 그는 철저한 가해자였다. 어떤 경우에도 부드럽게 표현된 적이 없었다. 제국주의 침략은 폭력을 앞세운다. 그는 일본제국의 폭력을 대표했다. 그러한 인물이 조용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사후의 안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데라우치의 비석은 여느 일본인 것과 달랐다. 우선 크기가 차이가 났다. 양쪽 비석들이 작기 때문에 더 우람해 보인다. "스스로 왕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조선총독 시절 그의 위세는 퇴위한 고종이나 순종보다 높았다. 혹 조선 왕릉을 보고 제왕의 지위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역대 일본 총리의 무덤은 도쿄의 아오야마레이엔(靑山靈園)과 같은 공동묘지에 있거나 사찰에서 관리하는 묘지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데라우치는 일본제국 총리 역임자로선 유일하게 가묘를 만들고 그 안에 묻혔다.

비석 뒷면에 날짜를 쓰고 훙거(薨去)라고 적었다. 이 역시 다른 귀족의 비석에서 보기 어려운 글자이다. 천황의 경우 붕어(崩御)라고 쓰지만 황족이나 공경(公卿)이 사거했을 때는 훙거라고 한다. 총리를 지냈기 때문에 훙거라는 말을 쓸 자격은 되나 대개 그런 용어를 쓰지 않지만 데라우치는 비석에 당당히 새겨놓았다.

도쿄 시나가와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묘.

데라우치 묘지는 언뜻 보면 왕릉 규모처럼 생각된다. 제일 높은 곳에 세운 '데라우치가의 가묘'라는 비석부터 중심부에 있는 마사타케의 묘와 앞줄의 석등까지 포함해도 전체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하지만 다른 일본의 가족묘와 비교하면 월등하게 크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보다 묘지 권역의 규모가 더 크다.

비석엔 살아생전에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총독 직함과 일본 최고관직인 총리대신 직함을 새기지 않았다. 군대 계급과 귀족 작위만 이름 위에 새겼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육군대장은 모든 남자아이들이 선망하던 인생의 목표였다. 황족 다음 서열인 화족(華族)은 '서양 따라 하기'를 숭상해서 유럽의 귀족제를 본딴 새로운 제도였다. 이것이 관료와 군인들에게 최고의 명예가 되었는데 비석에 그 작위를 또렷이 나타냈다.

묘지 앞에 두 줄로 나란히 세운 석등. "왜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필요했을까"

데라우치는 백작이었다. 그가 남작에서 백작에 오른 것은 조선의 국권을 탈취한 공적을 인정받은 때문이었다. 묘비 앞에 두 줄 석등이 나란히 세워졌다. 어둠을 밝히는 석등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했을까·

■ 무단통치의 핵심은 헌병경찰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6월 24일 허수아비에 불과한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해서 경찰 사무를 위탁하는 약정서를 맺었다. "한국의 경찰 제도가 완비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경찰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경찰권까지 빼앗긴 조선은 전혀 대응할 공적 기구가 없는 상태에서 그 두 달 후인 8월 29일 나라를 잃었다.

일본측 공식문서는 달랑 두 장이었다. 일본 천황 메이지가 '동양평화'와 '제국안전'을 위해 '보호'해오던 조선을 이제 '병합'하겠다고 한 조서와 데라우치 통감이 "각도 요처에 주둔한 제국 군대가 변란에 대비하고 있으며 헌병경찰이 서울과 지방의 치안을 장악했다."는 포고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권한은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장악하였다. 천황 직속이라서 일본 정부나 의회도 간섭할 수 없었다. 이미 조선주차군과 헌병경찰은 전국을 장악해서 망국에 분노한 조선인이 봉기할 여지를 없앴다. 이런 무력을 장악한 최고 책임자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헌병경찰은 의병 진압 같은 군사 성격 외에 정치·사법·경제·외사·위생 등 건드리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헌병분대장에겐 벌금·태형·구류 등 즉결심판권을 주었는데 악명 높은 무단통치의 수단이 곧 이런 폭력이었던 것이다.

1910년 5월 30일부터 1916년 10월 16일까지 7년 4개월 동안 데라우치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었던 조선의 압제자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내각 총리로 그를 불러들일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서울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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