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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 스파이, 동아시아 고대사를 격동시키다

33.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중)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베이징, 만주 일대 측량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구해 참모본부에 가져와
일본군의 한 스파이가 동아시아 고대사를 격동시켜
중국의 적, 아오키와 반자이기관 그리고 도이하라 겐지

  • 웹출고시간2013.06.11 17:28:4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3.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중)

■ 사이고와 야마가타가 보낸 스파이들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만든 정밀한 중국 지도.

메이지유신 직후 사쓰마와 토사, 그리고 조슈번의 군대가 도쿄에 들어와서 고신페이(御親兵)라는 정부의 직속 군대로 편성되었다. 그 핵심은 4개대대 5천명을 가세시킨 사쓰마번의 병력이었다. 이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부와 군의 중심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주장자였다. 조선에서 천황이라고 기재한 국서 받기를 거부하자 침략을 주장한 것이다. 1872년 그는 외교사절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 1842~1917)의 일행 속에 스파이들을 포함시켰다. 그중 육군소좌 벳부 신스케(別府晋介)가 2개월 간 정탐을 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을 유린하는 데는 일본군 2~3개 중대면 충분하다.”

이때 만주로 간 육군소좌 이케노우에 시로(池上四郞, 1842~1877) 등이 돌아와서 「만주시찰복명서」를 제출했다. 이 복명서는 흑룡회에서 펴낸 『서남기전(西南記傳)』에 수록되었는데, 한국과 만주의 지형 정세 군대 재정 풍속 등을 정탐해온 것이었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세이난(西南)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결하자 메이지 군대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는 1878년 육군경(陸軍卿)이 되어 참모조직을 크게 참모본부로 확충했다. 작전과 정보, 무기와 병참 등 처음 치룬 근대전투에서 보완할 문제가 많았다.

국내 반란을 제압하자 메이지정권은 외국으로 시야를 넓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전 종식 후 조선침략을 노렸던 것과 다르지 않았고,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그 제자들이 따른 것이다. 우선 유럽의 군사제도를 조사해서 군사력 강화의 지침으로 삼았고, 아시아국가의 군사력도 정탐을 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먼저 중점을 둔 것은 군사지도 제작이었다. 일본지도의 측량과 제작 책임은 관동국(管東局)과 관서국(管西局)이 나누어 맡았다. 이 부서에서 외국지도도 함께 만들도록 하였다. 도쿄와 센다이 등 동부를 맡은 관동국은 홋카이도, 만주, 캄챠카, 시베리아의 지도제작을 책임졌고, 나고야와 히로시마 등지를 맡은 관서국은 조선과 청국 연해의 지도를 만들었다.
참모본부는 조선과 청국에 빈번히 스파이를 보내 측량을 시켰다. 1879년부터 청국에 보낸 스파이들이 베이징은 물론 텐진과 만주 일대의 정밀지도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지금 미의회도서관에 있는 「외방도」이다.

■ 일본군 스파이 사코와 광개토대왕비문

조선고적보에 실려 있는 광개토대왕비.

메이지정부가 청국에 스파이를 보낸 시점을 보면 대륙침략 계획이 구체화된 시점을 알 수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파견한 시기는 1872년이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보낸 시기는 1879년이다. 그것을 보면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에게 밀린 뒤에 비로소 군사력을 키웠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청에 보낸 스파이 중에 사코 가게노부(酒匂景信, 1850~1891)가 있었다. 지금 그는 어느 스파이보다 명성이 높다. 1883년에 만주 지안(輯安)에서 광개토대왕비석의 탁본을 가져온 때문이었다. 동아시아 고대사연구에서 핵심이 될 자료 가치를 그가 처음 알아낸 것이다.

사코는 소위 때 베이징에 가서 몰래 지도 제작을 하다가 중위 진급 뒤에도 그 임무를 계속 맡았다. 그는 히유가노구니(日向國)의 번교(藩校)에서 공부를 해서 제법 학식도 있었고, 베이징 부근과 함께 강소성과 산동성 일대의 정밀한 지도를 작성할 만큼 능력도 있었다.

돌아올 때는 만주에서 조선을 거쳐 갈 것을 청원했으나 조선 내의 반일 분위기 때문에 허락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사시 전투지역이 될 것으로 예상한 만주 일대는 상세한 지도를 작성해왔다. 그 과정에서 광개토대왕의 비석을 찾아낸 것이다. 비석 주변에 관한 세밀한 설명을 기록해서 탁본을 뜰 당시의 모습도 전해준다.

■ 특무기관의 전설 아오키와 반자이기관

몰래 들어가 도둑 측량을 했다고 제목을 붙인 잠입도측(潛入盜測).

본래 군대는 평시에 독자적으로 외국에 첩보 모략기관을 설치하지 않는다. 일본이 아오키기관(靑木機關)을 1904년 7월부터 1913년 8월까지 베이징에 운영한 것을 보면 그 침략성을 알 수 있다. 또 반자이기관(坂西機關)도 1911년 10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운영했다.

특무기관이란 명칭은 1918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했을 때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 등지에 설치한 러시아 반혁명 지원을 담당한 공작기구를 러시아의 유사기관에서 이름을 따 의역한 것이다. 아오키와 반자이기관은 특무기관의 초기형태였지만 역할은 대단했다.

아오키 노부즈미(靑木宣純, 1859~1924)는 무려 중국에서 13년 간 지낸 중국통이다. 사관학교 졸업 후 스파이 훈련을 받은 다음 1887년에 청에 파견되어 광동성과 베이징에서 첩보공작을 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청일전쟁 땐 제1군 참모로서 해산시까지 활동을 했다.

아오키가 청국공사관에 무관으로 부임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신군육군(新軍陸軍)의 군사고문으로 위촉한 것이다. 조선이 별기군 교관으로 일본 공병소위 호리모도 레이조(掘本禮造)를 초빙한 것과 같이 일본 스파이에게 군사정보를 통째로 갖다 바친 꼴이다.

신건육군은 청국이 마지막으로 독일과 일본의 군제를 참고해서 양성한 신식군대였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가 선통제 부이(溥儀)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대총통에 오르는 배경이 신건육군이었다. 북양군벌의 무력으로 손문의 혁명군과 내전을 벌이는 이 군대의 내막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것이 아오키기관의 임무였다.

그 소속원 중 또다시 대표적인 스파이가 된 것이 반자이 리하치로(坂西利八郞, 1871~1950)였다. 그는 육사 2기로 청일전쟁에 참가한 다음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베이징에 가서 공작활동을 하였다. 무려 17년 간 베이징에 체재하며 아오키를 계승해서 위안스카이의 고문이 되었으며, 1923년에는 대총통 리위안홍(黎元洪, 1864~1928)의 고문도 된다.

■ 중국 최대의 적인 특무 도이하라 겐지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의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일본군 특무 중 최악의 인물이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1883~1948)였다. 중국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2차대전 종전 후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은 극동군사재판에 보낸 전범자료에서 육군대신과 참모총장을 지낸 그의 이름을 첫 번째로 올려 극형을 주장했고, 결국 A급전범으로사형판결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그는 1912년 육군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베이징 반자이기관에서 공작을 시작했지만, 곧 두드러진 활동으로 승진해서 텐진과 봉천의 특무기관장이 되었다. 그는 모략의 명수로서 여러 사건을 벌여 중국에 치욕을 안겨주었다.

만주사변 이후 그의 활동은 혁혁했다. 만주국을 세워서 일본인 한인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의 ‘5족협화’ 체제로 괴뢰정권을 수립하자고 제안한 것은 도이하라였다. 관동군의 지지를 받자 텐진에 가서 폭동사건을 일으키고 그 기회를 타서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이(溥儀)를 만주로 탈출시켰다. 만주국이 대만과 조선에 이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그의 공이었다.

다음으로 화북 분리공작을 추진해서 국민당 제29군 부사령관인 진더춘(秦德純, 1893~1963)과 협정을 맺고 허베이성의 산해관에서 당고에 이르는 지역을 지동방공(冀東防共)자치정부로 떼어냈다. 중국에서 만주와 허베이성을 갈기갈기 찢어내는 공작에 성공한 것이다.

만주사변을 전후해서 만주 일대를 폭력으로 지배한 핵심세력은 특무기관이었다. 할빈의 관동군정보부는 젠다오(間島), 리에허(烈河), 펑티엔(奉天), 치치할 등 17개 이상의 지부와 출장소를 운영했다. 마적을 매수해서 반일활동을 하는 한족과 조선독립군을 기습하거나 대규모로 아편을 재배해서 중국 전역에 밀매를 한 조직이 특무기관이었다. 또 폭동, 암살, 고문, 위조지폐 살포 등 온갖 범죄도 이 조직이 저질렀다.

■ 일본인이 자랑스럽게 회상하는 특무기관

일본군 특무의 모습이 드러나는 음산한 도이하라 겐지.

일본사회에서 제국일본은 두 가지로 회상되고 있다. 하나는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여러 나라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 것을 반성하는 분위기이다. 다른 하나는 메이지유신 이후 대외팽창을 통해 강대국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전자를 말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후자는 많다.

일본군 특무기관은 역사에서 부끄러운 존재이다. 하지만 당한 쪽도 그런 행위를 막지 못한 역사적 책임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활개를 치며 대륙을 누볐던 사실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갖가지 특무기관에 관한 책에서 이 두 가지가 다 드러난다.

아직은 중국에서 포악했던 특무기관을 내세워서 소설과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다. 스토리텔링 자료로 엄청난 것이 나와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근현대사를 기형으로 만든 시바료타로도 소설 속에서 특무기관을 그리 미화하지 않았다. 잔혹했던 왜구를 미화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특무기관이 포악하게 설치던 중국은 어떠한가. 무도한 특무기관을 주제로 만든 세계적 수준의 문학작품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캐내는 것이 너무 아픈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감춘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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