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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대포(長州大砲), 시모노세키에서 서양군함을 포격하다

실전의 나라 일본의 대포 주조·흑선 위협에 즉각 대처
지방관의 서양기선 출몰 보고에 말로만 떠들던 조선과는 달라
시모노세키전쟁서 영국·프랑스·미군이 조슈대포 100문을 노획
파리 앵발리드 군사박물관·런던 울리치 군사박물관에 전시중

  • 웹출고시간2012.11.13 18:40:0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7. 조슈대포(長州大砲), 시모노세키에서 서양군함을 포격하다

조슈대포(長州大砲)를 주조하는 상상복원도

일본은 끊임없이 내전을 치룬 실전의 나라였다. 축성할 때에도 실전 경험을 반영해서 커다란 돌로 살벌하게 성벽을 쌓았다. 중요 성내 건물의 방어 구조를 보면 끔찍하기조차 하다. 야마구치시 하기에는 외부 침입자를 몰아넣는 T자형 길과 막다른 골목이 있다. 실전 경험에서 나온 함정이었다.

일본에선 실전에 필요하면 무엇이든 즉각 확보해서 응용했다. 1543년 규슈 남부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중국배에 철포(鐵砲, 화승총)를 가진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다. 섬의 영주인 토키타카(時堯)는 놀라운 무기로 판단하여 거금을 주고 철포 2정을 구입해서 복제에 성공했다. 경이로운 속도로 보급된 이 철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과 1592년 조선 침략의 원인이 되었다.

유럽에서 이양선이 오자 조선의 조정은 걱정만 하고 대처 방도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각 번이 경쟁하던 일본에서는 금방 서양의 무기를 배웠다. 서양식 대포를 제조한 것은 실전에서 나온 노력의 성과였다.

■ 한일 간 군대와 무기 관심도

한국에서 군대의 역사와 무기의 발달사는 교양의 영역에서 비켜나 있다. 국가와 사회사에서 군대가 갖는 비중이 매우 크고, 과학기술의 발전은 무기의 발달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전쟁 위협이 그치지 않는 나라에서 군대와 무기에 관심이 적은 것은 신기한 일이다.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까닭은 군대와 무기에서 격차가 났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한 1차 원인도 군대와 무기 때문이었고, 6.25 초기에 낙동강 선까지 국군이 밀려난 것도 똑 같은 이유였다.

평화는 우리가 원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해야 평화를 지킬 수 있고, 개인은 물론 나라의 발전이 가능하다. 국가 간의 교섭도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개인의 역량 발휘도 그 나라의 군사력에 좌우되는 것이다.

평화헌법을 가진 일본에서 군대와 무기에 갖는 관심은 매우 높은 편이다. 수준 높은 전문서적이 속속 출간되고 있고 인터넷 망에서도 다양한 정보가 교류된다. 구일본군에 관한 정밀한 조사 연구나 각종 신무기와 전술도 상세히 소개된다. 항공모함 편제와 장착무기를 분석한 일본 전문가의 설명은 놀랍기만 하다.

■ 조슈번의 대포 제작

야마구치현 하기에 복원한 주물사 군지기헤이지(郡司喜平治)의 대포 제조소

하기의 요시다 쇼인 신사로 들어가는 네거리에 조슈번에서 대포를 제작했던 장치를 복원한 야외 전시장이 있다. 용광로 3기를 돌로 쌓은 높은 대 위에 설치해서 쇳물을 녹여내고, 그것을 한 군데로 흘러내리게 한 다음에 대포 형태의 틀을 채우도록 한 장치이다. 쇠가 단단히 굳게 되면 꺼내는 데 요즘 제철소의 제련과 성형과정을 축소한 형태이다.

조슈번의 청동제 대포는 구경 8.8cm, 길이 1.85m, 무게 약 1톤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기술로 서양식 대포를 제조하려고 시도하고, 청동제 복제품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기에서 대포를 주조한 곳은 솥이나 쟁기 등 생활도구나 사찰에서 주문한 범종을 생산하던 주물공장이었다.

아편전쟁 소식은 일본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실전에 강했던 일본 사무라이들은 서양의 군사력을 파악하면서 재래식 대포로는 구미 열강의 군함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막부와 각 번은 서양식 대포 도입을 서둘렀다.

반사로(反射爐)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학문인 난학이 기술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서양식 포술을 배우거나 반사로(反射爐)를 설치해 총포를 주조하기도 했다.

반사로는 연소와 가열하는 방을 분리시켜 화염을 노(爐)의 상층으로 지나가게 해서 열을 반사시켜 광석을 용해시키거나 정련하는 용광로를 말한다.

대포 확보는 막부의 승인 아래 진행되었다. 개항장 나가사키와 가까운 사가번에서는 처음 반사로를 만들어 영국의 암스트롱포까지 모방 제조했고, 군함을 네덜란드에 발주하면서 신식군대를 길렀다. 그 때가 1850년대 말에서 60년대 중반으로 조선의 철종 시기이다.

긴 해안선을 지켜야 하는 조슈번은 신식 대포가 더 필요했다. 세토내해를 들락거리는 서양 함정은 시모노세키를 바짝 지나가고 있었다. 해안가에 포대를 설치하고 조슈번이 제작한 대포와 막부가 보낸 대포를 대거 배치했다.

■ 시모노세키전쟁의 교훈으로 신식 군사력 강화

서양 배척을 천황까지 강력히 요청하자 도쿠가와 막부도 양이운동의 실행을 약속했다. 앞장 선 것은 조슈번이었다. 1863년 5월 간몬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함선에 통고 없이 포격을 가하고 해협을 봉쇄했다. 보름 뒤 보복에 나선 미국과 프랑스 군함은 해협 안의 조슈군함을 박살내고 해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조슈번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포대를 수리하고 봉쇄를 계속했다. 1년 넘도록 봉쇄가 계속되자 영국이 분노했다. 그래서 1864년 8월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네덜란드와 함께 4개국이 연합하여 17대의 함선을 이끌고 시모노세키의 포대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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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포대를 점령한 4개국 연합군의 기념 촬영 사진

이때 구식군대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화승총과 함께 창이나 활로 응전한 조슈군은 신식 라이플을 가진 연합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해안 일대와 히고시마(彦島)의 포대는 포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었고, 연합군은 상륙해서 조슈번과 막부가 만든 약 100문의 대포를 노획해갔다. 영국군함을 타고 온 종군사진사의 포대 점령 기념사진은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결국 일본은 항복했다.

막부는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포대를 철거하며 해협통행 자유를 보장해야 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카오루가 영국 유학중 급거 귀국한 것은 이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유럽 사정에 밝게 된 이들은 강화를 주선하면서 서양 군사력의 우월함을 알렸다. 조슈번은 이후 무력 대항을 포기하고 서양 기술의 수용과 군사력 근대화에 적극 나섰다. 이 조치로 인해 실력을 키운 조슈번은 두 차례의 막부 정벌을 막아내고, 사쓰마번과 힘을 합해 막부 타도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 조선은 신식 일본군 무력에 속수무책

시노모세키의 단노우라 옛전장터에 복제한 조슈대포가 해협을 향하고 있다.

시모노세키에서 가져간 일본 대포들은 지금도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전시되고 있다. 프랑스에선 나폴레옹 유해 안장지로 유명한 파리의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다. 전리품 반환을 거부한 프랑스는 1984년 교환전시 방식으로 시모노세키 초후박물관에 1기를 보냈다. 지금 간몬대교가 바라보이는 단노우라 옛전투장에 그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영국 울리치의 군사박물관(Firepower Royal Artillery Museum)에 있는 조슈번의 대포는 2008년 영일통상조약 체결 150주년을 맞아 하기박물관에서 1년간 귀향특별전을 가졌다.

일본은 열강에게 배운 나쁜 방법을 조선에서 그대로 써먹었다. 1875년에 강화도에 군함 운요호를 보내서 포격을 유도했다. 그리고 함포사격을 해서 해안포대를 파괴하고, 다음 해에 강제로 강화도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시모노세키전쟁 후 12년만이다.

서양 이양선이 연안에 연속 출몰했지만 걱정만 하던 조선 조정은 적절한 대응 방도를 찾지 못했다.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는 서양군함과 대포의 위력을 알게 된 계기였으나 역시 기회를 놓쳤다.

한 세대에 걸쳐 허송세월을 한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1894년에 불법 침입한 일본군이 도성을 방위하는 병영을 기습해서 무장해제를 해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경복궁을 기습점거해서 국왕을 인질로 잡아도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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