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이 기사는 1번 공유됐고 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日, 서해 풍도에서 전광석화처럼 공격하다

19. 청일전쟁 고승호 격침
일본제국의 군대는 육군이건 해군이건 유례 드문 잔인성이 특징
청 군함 제원함은 피탄 후 도피, 광을함은 침몰, 조강함은 빼앗겨
도고 헤이하치로, 오야마 이와오 등을 배출한 가지야(加治屋) 출신

  • 웹출고시간2013.02.19 16:20: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9. 청일전쟁 고승호 격침

일본군이 작성한 풍도전투도. 붉은색은 청국 함정과 고승호, 파란색은 일본군 순양함 행로 표시.

일본 순양한 나니와호가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의 풍도 앞바다에서 영국 상선 고승호(高陞號)를 격침시켰다. 선전포고 없이 조선 영해에서 청군을 공격한 이 사건은 결코 가벼운 사건이 아니었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여기서 드러난 일본군의 잔인성이다.

메이지혁명 이후 길러낸 일본군은 육군이건 해군이건 잔인했다. 1894년부터 1945년 패전까지 자행한 수많은 학살의 원인이 사무라이건 왜구이건 그 습성을 계승한 것인지 모르나 몽골군 이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이었다. 동시에 지구촌으로 표현되는 오늘날 동아시아가 감내하고 해결해야할 최대의 숙제가 되고 있다.

일본군의 극단적인 잔학행위가 난징대도살(南京大屠殺)이다. '난징대도살기념관'은 학살이란 말로 담지 못하는 이 참상을 도살로 표현하면서 희생자 수를 30만 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한 도시 점령 후 벌어진 살육으론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그런 학살의 시작이 고승호 격침이었고, 그 책임은 도고 헤이하치로에 있다. 그는 지금도 일본에서 군신(軍神)처럼 추앙받으면서 야스쿠니신사의 전쟁박물관인 유슈칸(游就館)에 가장 큰 초상화로 걸려있는 인물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극우파의 애국심 양성소이다. 러시아 함대를 격파해서 세계 5대강국으로 일본을 끌어올린 영웅인 도고의 고승호 격침사건은 무엇인가. 두 차례로 나누어 살펴본다.

■ 일본 전쟁 결정 후 조선 경복궁·청군 함정 기습

일본제국의 정보 획득 능력과 그 활용은 놀랄만하다. 끊임없이 내전을 치러온 일본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19세기 말 조선은 침략 대상, 중국은 가상 적국이 되었다. 일본은 외교관, 무관, 기자, 상인, 여행자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서 정보를 파악해갔다.

조선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관군이 막지 못하자 고종은 1894년 6월 3일 청국에 진압군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 사실은 즉각 탐지되어 일본정부에 보고되었다. 다음날인 6월 4일 일본정부는 육해군회의를 열어 대본영 설치를 결정하였다. 전쟁을 결정한 것이다. 대본영은 "메이지 이후 전시 또는 사변에 천황 직속으로 육해군을 통수하는 최고기관"이다.

6월 5일 히로시마에 주둔한 제5사단에 동원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5사단 소속 혼성제9여단이 6월 9일 우지나(宇品)항에서 인천으로 출발하였다. 청국군 선발대가 섭사성(·士成)의 지휘 아래 대고(大沽)항을 떠나 조선으로 출발한 3일 후였다. 일본군 혼성제9여단은 인천에서 서울로 직향했지만 청국군은 아산 백석포에 상륙하였다.

청국군 지휘관 엽지초(葉志超) 제독은 늦장을 부리다가 북양대신 이홍장의 질책을 받고 늦게 출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파병 소식이 들리자 재빨리 증원군을 요청해서 7월 21일 고승호가 대고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는 과정에 일본 해군도 7월 19일 연합함대를 구성해서 조선으로 밀려왔다.

전쟁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먼저 시작되었다. 7월 23일 경복궁 수비병은 일본군 혼성9여단 의 기습을 받고 반격하였으나 패산하였다. 경복궁과 서울 도성은 일본군이 장악하였다. 갑오개혁은 그런 와중에 진행된 것이다.

경복궁 전투가 벌어진 7월 23일 청 군함 제원, 광을, 위원함 등이 아산에 도착해서 병력과 무기 그리고 군량과 군마 등을 내렸다. 그때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했다는 정보가 무전을 통해 전달되고 급히 귀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경복궁 전투가 일어난 이틀 후인 7월 25일 아산 인근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함정과 일본 연합함대가 조우하였다. 아산의 풍도 앞바다에는 증원군을 호위해온 청국 함정 제원함(濟遠艦)과 광을함(廣乙艦) 그리고 보조함인 조강함(操江艦)과 고승호가 아직 머물러 있었다. 고승호는 청군 수송을 맡은 영국 선적의 상선이었다.

■ 나니와 함장 도고 대좌와 국제법

풍도 앞바다로 들어온 일본함대는 제1유격대 소속 순양함 3척이었다. 그중 4,216톤급 기함 요시노(吉野)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최고시속 23노트를 자랑했다. 일본정부가 북양함대와 대적하기 위해 1893년 9월 건조한 이 최신식 군함에는 15.2cm 속사포 4문과 12cm 속사포 8문 그리고 어뢰발사관 5개가 장착되었다. 기함을 뒤따라서 나니와호(浪速號)도 북상하였다.

가고시마에 세운 도고 헤이하치로의 동상.

나니와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 대좌는 사쓰마번의 가고시마 조카마치(城下町) 가지야(加治屋) 출신이었다. 메이지정권을 만든 중심인 사쓰마에서도 가지야는 대단한 동네였다.

유신 3걸 중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청일 러일 두 전쟁의 육군 최고지휘관인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1842~1916), 해군대신 사이고 쥬도(西鄕從道, 1843~1902), 천황을 호위한 근위사단장 출신인 구로키 다메모토(黑木爲楨, 1844~1923), 육군대장으로 총리를 두 번 역임한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 1852~1933)가 여기 출신이었다.

도고는 이미 10대 말에 사쓰마가 영국군과 싸운 전투에 종군한 경력이 있다. 메이지유신 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에게 간절히 부탁해서 해군사관으로 영국 포츠머스에 유학을 하였다. 그래서 1871년부터 7년 간 체류한 영국에서 국제법을 배웠다고 한다.

도고와 그의 추종자들이 수송선 고승호의 격침을 합리화했던 무기가 바로 이것이다. 상선을 침몰시킨 것이 국제법 위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행위를 커다란 공적으로 평가해서 러일전쟁시 연합함대사령관에 인선되었다고도 말한다.

여하튼 청일전쟁 후 도고는 고속 출세 길을 탔다. 1895년 2월 소장으로 진급해서 상비함대사령관이 되고, 해군대학교장과 사세보진수부사령관 등을 거치며 대장까지 오른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그는 해군 최고지휘관이 된다.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후 일본 근현대사의 최고 영웅이 된 것이다.

■ 선전포고 없는 전쟁 시작


7월 25일 아침 아산 앞바다는 날씨가 쾌청하고 미풍이 불었다. 북상하던 일본군 제1유격대 함정들이 아산만에 들어섰다. 그때 청국 군함이 멀리서 검은 연기를 뿜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군 수송선단과 호위함대의 파쇄명령을 받은 일본 함정이 속력을 높여서 정면으로 접근하였다. 노골적인 도전이었다.

제원함은 1883년 독일에서 건조된 2,355톤급으로 무장도 빈약했고 속도는 15노트였다. 광을함은 양무운동의 성과로 청의 복주(福州)에 있는 신식조선소에서 만든 1,110톤급인데 속도는 느려서 17노트였다.

요시노호의 선제 발사를 시작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제원호는 혼자 일본 순양함 3척과 맞서다가 서쪽으로 도피하였고, 갑판을 철갑으로 두르지 않은 광을함은 피격되어 침몰하였다. 남으로 태안까지 내려가서 좌초한 조강함은 아키쓰시마호가 뒤따라가서 노획하였다. 승조원은 육지로 피하였다.

문제는 수송선인 고승호였다. 도고가 지휘하는 나니와호는 수많은 청군이 탄 배를 나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고승호에 타고 있던 청군이 영국인 선장에게 일본군의 지시를 따르지 말도록 강력히 요구했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 기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관련어 선택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랭킹 뉴스

Hot & Why & Only

실시간 댓글

배너
배너

매거진 in 충북

thumbnail 308*171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

[충북일보] 정효진 충북도체육회 사무처장은 "충북체육회는 더 멀리보고 높게 생각해야한다"고 조언했다. 다음달 퇴임을 앞둔 정 사무처장은 26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체육회의 현실을 직시해보면 자율성을 바탕으로 민선체제가 출범했지만 인적자원도 부족하고 재정·재산 등 물적자원은 더욱 빈약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완전한 체육자치 구현을 통해 재정자립기반을 확충하고 공공체육시설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수반되어야한다는 것이 정 사무처장의 복안이다.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운동부의 위기에 대한 대비도 강조했다. 정 사무처장은 "학교운동부의 감소는 선수양성의 문제만 아니라 은퇴선수의 취업문제와도 관련되어 스포츠 생태계가 흔들릴 수 있음으로 대학운동부, 일반 실업팀도 확대 방안을 찾아 스포츠생태계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행사성 등 현장업무는 회원종목단체에서 치르고 체육회는 도민들을 위해 필요한 시책이나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정책 지향적인 조직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임기 동안의 성과로는 △조직정비 △재정자립 기반 마련 △전국체전 성적 향상 등을 꼽았다. 홍보팀을 새로 설치해 홍보부문을 강화했고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