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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국력'참모본부 인재를 각 나라에 파견하다

참모본부를 일신해서 육해군을 통할한 가와카미 소로쿠
가와카미와 함께 소장 장교가 독일에서 근대 군사학 습득
조선침략과 청일전쟁 준비를 마친 가와카미, 조선을 정탐

  • 웹출고시간2013.08.27 18:02:14
  • 최종수정2013.08.27 18:02:34
43. 고종을 알현한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세당전투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사로잡은 비스마르크

■ 참모본부를 일신한 가와카미 소로쿠

베를린에 있던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 소장이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1891) 참모총장을 만난 날은 1887년 4월 6일 수요일이었다. 독일군 참모본부의 리하우즈 대위에게 요청한 면담이 받아들여졌다.

몰트케 원수는 프러시아와 독일제국의 참모총장으로 무려 31년간 재임하면서 독일군을 유럽의 강군으로 육성시킨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몰트케는 87세, 가와카미는 39세.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와카미는 독일 생활을 일기에서 꼼꼼히 적어놓았는데 그날 기사만 빠져있다. 내밀한 이야기라 쓰지 않았는지, 별도의 문서로 정리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각급 부대를 시찰하고 전투연습 현장을 찾아가 독일군의 조직과 전략을 치밀하게 빼내갔다.

가와카미가 독일군에서 배운 가장 큰 수확은 참모본부의 운영 방법이었다. 근대 군대의 원형은 18세기 나폴레옹이 조직한 프랑스군으로 각국의 군대는 자국에 맞게 이를 변형시켜서 운영해왔다.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군은 참모본부를 강화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래서 군 통수권자인 국왕 아래 군 지휘 명령권은 참모총장이 장악했다.

근대 군대에서 장군이 병사들을 지휘해서 전투에 나서려면 이전보다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것은 작전 계획 수립과 정보 획득, 그리고 통신과 병참 지원이었다. 작전 부대도 전투 규모에 따라 참전 부대의 편성과 함께 전투 서열을 정해야 했다. 강력한 지휘권을 행사하려면 상하관계가 명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조치는 참모본부에서 수행하는 업무였다.

가와카미는 귀국해서 1889년 참모본부 차장으로 복귀했는데 육군의 한 부서가 아닌 육해군을 통합한 것이다. 권한은 막강하였다. 육해군의 군사에 관한 계획을 관장할 뿐 아니라 각 병과와 근위사단을 물론 함대 참모부와 육군대학교 그리고 군용전신대를 통괄하였다. 첫 참모본부장은 황족 타루히토(有栖川宮 熾仁, 1835~1895) 친왕이 취임했으나 실제 1889년부터 청일전쟁 시기를 거쳐 1898년까지 가와카미가 참모차장으로 전권을 휘둘렀다.

가와카미는 육군중장 계급으로 1898년 1월에는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명실상부한 참모본부를 장악했던 그는 다음해 5월 현직에서 급사하게 된다. 그 후 대선배인 오야마 이와오 대장과 야마가타 아리토모 대장이 잇달아 참모총장이 되는 것을 보면 가와카미의 군대출세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가 알 수 있다.

이지치 코스케(伊地知幸介, 1854~1917)

가와카미가 자주 어울린 장교가 이지치 코스케(伊地知幸介, 1854~1917)였다. 조슈번 출신인 노기보다 사쓰마 출신인 이지치가 동향으로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이지치는 청일전쟁에는 2군 참모로, 러일전쟁에선 3군참모장으로 활약했고 여순을 점령한 후 여순요새 사령관이 되는 인물이다.

가와카미가 수행한 일은 전쟁 준비와 실행이었다. 그 전쟁은 우선 조선과 청국을 겨냥한 것으로서 참모본부 각 부서를 일신시키고 철저히 분담해서 그 일을 맡았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루면서 효과를 인정받은 시스템을 이식한 것이었다.

■ 가와카미와 함께 전쟁을 준비한 장교들

가와카미의 일기에 베를린에서 함께 유학한 장교들의 이름이 나온다. 우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가 눈에 띈다. 노기는 가와카미와 연명으로 귀국 복명서를 제출했는데 실제 쓴 사람은 노기라고 한다. 이 복명서에서 강조된 것은 독일군의 엄한 군기 유지와 군인교육의 중요성이었다. 러일전쟁의 영웅이 된 노기는 독일군이 엄격히 군기를 유지한 것에 인상이 깊었던 듯하다.

구스노세 유키히코(楠·幸彦, 1858~1927).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한다.

구스노세 유키히코(楠·幸彦, 1858~1927)는 1894년 11년 조선의 군사고문 직함으로 동학농민군 학살에 관여하였고, 1895년에는 미우라 공사의 수족이 되어 명성황후 시해에 가세하였다. 히로시마의 5사단 군법회의에 회부된 인물로서 뒤에 육군대신까지 오른다.

다무라 이요조(田村怡與造, 1854~1903)는 육군의 수재라고 일컬었는데 독일군의 실전훈련을 시찰하는 등 장기교육을 받은 장교였다. 가와카미와 함께 군사연구에 몰두하면서 그의 측근이 되고 있다.

동년배인 노기나 대여섯살 적은 이지치와 구스노세는 이른바 걸물인 가와카미의 예하에서 일본 육군을 변화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지치와 구스노세는 참모본부에 소속되어 조선과 청국의 정보를 획득하고 침략 구상을 짜는데 일조를 했다.

가와카미는 참모본부를 장악한 실세 차장으로 이런 유능한 장교를 수족처럼 구사해서 자신의 포부를 실천에 옮기는 실행력을 가지게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시 조선에서 퇴각한 후 10년 간 국력을 기울여 키워온 군사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준비를 마친 1893년 3월에는 육해군연합 대연습이 실시되었다. 이미 오래 전에 독일과 러시아에서 배워온 대규모 연습을 실천해보는 것이었다. 대륙 침략의 작전은 이처럼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메이지천황이 참가한 1893년 일본군 대연습 기록사진.

대연습의 장소는 이세만 일대였다. 메이지천황이 임석하고 각국의 무관을 참석시킨 속에서 근위사단과 도쿄의 제1사단 그리고 센다이의 제2사단이 참여한 훈련은 성황을 이뤘다. 이렇게 전쟁 준비는 끝났다.

가와카미는 참모본부의 여러 장교를 각국에 스파이로 파견했다. 청국과 전쟁을 할 때 유럽 열강인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독일도 이해관계가 걸렸다. 그래서 이들 나라에도 정세 파악을 위해 스파이를 보냈다. 인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월남과 남양제도에도 보내 점검할 정도였다.

메이지천황이 참가한 1893년 일본군 대연습 기록사진.

그 대표적 스파이가 바로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1852·1919)였다. 그는 중국어에 통하고 러시아어와 영어에도 능한 인물로서 1883년 중위로 청국공사관의 무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한 경험이 있었다. 1891년 중좌 계급인 그는 가와카미의 명령을 받아 단신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정보를 수집해왔다. 모두 가와카미의 전쟁 구상에 수족처럼 움직인 것이었다.

가와카미는 전쟁의 무대가 될 조선과 청국을 직접 정탐하기로 결정했다. 작전준비의 마지막 단계였다. 수행원은 이지치 코스케 중좌와 다무라 이요조 중좌, 그리고 시바 고로(柴五郞, 1860~1945) 대위였다. 시바 고로는 21년 청국공사관 무관으로 스파이활동을 시작했고 참모본부에서 전쟁 준비의 실무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가와카미의 수행장교들이 모두 중장과 대장으로 육군의 중심이 되었던 것을 보면 그가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의 일선에 내세웠던 장교들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된다.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동원해서 일본군의 1차 대외원정에 나섰던 것이다.

■ 가와카미의 조선 정탐과 고종 알현

1893년 4월 18일 가와카미 일행은 부산에 도착해서 무로타 요시아야(室田義文, 1847~1938) 총영사의 영접을 받는다. 무로타는 안중근 의사가 하르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현장에 있었던 인물인데 당시 침략 거점인 부산에서 청부사처럼 갖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가와카미는 26일 인천에 들어가 각국 거류지를 순시를 한 다음 28일에는 서울에 도착했다. 29일과 30일에는 일본공사 오이시 마사미(大石正巳, 1855~1935)가 주선해서 청국주재관인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를 방문하여 환담을 하였다. 비공식 방문이라 사전 통지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 가와카미가 만난 사람을 보면 놀랄만하다. 우선 5월 1일 스기무라 영사와 함께 대원군을 방문했다. 운현궁에서 돌아오면서 궁궐 주변을 살폈다. 꼭 1년 2개월 뒤 경복궁이 일본군의 기습을 받게 되는데 가와카미가 전투 현장이 될 광화문 일대를 돌아본 것이다. 2일과 3일에는 한규설을 방문하고 친위대를 둘러보았다고 했다. 조선의 궁궐 수비대의 실상은 여지없이 파악이 되었다.

4일에는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라는 이름으로 고종을 공식 알현하였다. 변성명했던 것을 그만두고 직접 궁궐 내부를 보려고 하였다. 침략전쟁의 최고 책임자에게 드러난 경복궁은 조선침략에서 기습 공격의 최초 목표가 된다. 도쿠토미 소호가 쓴 전기인 『육군대장 가와카미 소로쿠』를 보면 또다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가와카미가 고종을 만나는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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