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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전총리 "일본군은 영국군보다 더 잔혹하고 난폭"

31. 야스쿠니신사에 세운 인도인 기념비 (下)
도조 히데키가 환영한 보스는 대동아공영권 선전판
일본군의 임팔 침공을 안내한 보스, 비행기 추락사
팔 판사는 도쿄전범재판의 이단자 겸 시대의 반역자

  • 웹출고시간2013.05.28 16:46:5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1. 야스쿠니신사에 세운 인도인 기념비 (下)

야스쿠니신사에 자랑스럽게 설치한 태평양전쟁 점령지 석각지도.

■ 보스, 동남아 일본군 점령지에서 활동

보스는 네타지(Netaji)라고 불렸다. '존경하는 지도자' 또는 '총통'이란 뜻이다. 그는 동남아에서 다시 군대를 가질 수 있었다. 싱가포르 등지에서 항복한 영국군의 인도병사들이 인도국민군(INA)으로 재편되었는데, 이를 인수받아 자유인도군이라고 했다. 1943년 6월 5일 싱가포르에서 행한 사열식에는 도조 총리가 참석하여 보스의 위세를 높였다. 8월 21일 '자유인도임시정부'를 결성하고 수상과 전쟁장관을 겸했다. 인도 교민사회가 임시정부의 토대였다.

이제 일본제국의 대동아공영권에는 점령지인 만주 내몽고(蒙疆연합자치정부) 남경정부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버마와 함께 옵저버로 자유인도임시정부가 들어왔다. 도조는 일본 해군이 점령한 인도섬 안다만과 니코바르 제도를 선물로 주었다. 안다만 섬을 방문한 보스는 꿈에 부풀어 독자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는 등 정부 수립을 구상했다.

증오가 극대화되면 판단력이 상실될 수 있다. 보스가 그러했다. 보스의 적은 오로지 영국이었다. 그리고 적의 적은 모두 아군으로 보았다. 보스는 단순하였다. 일본군을 앞세워 인도에 들어가는 것을 독립으로 생각했다. 일본군 점령 후 인도의 상황 변화엔 관심이 없었다.

싱가포르 전 수상 리콴유(李光耀)의 자서전.

일본군 치하를 경험한 리콴유(李光耀, 1923~ ) 싱가포르 전 총리는 자서전(류지호역, 문학사상사 간행)에 이렇게 썼다. "우리들은 곧 새로운 지배자가 된 일본군이 영국인보다 더 잔혹하고 더 난폭하며 더 부당하고 더 악의적으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들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년 반 동안의 일본군 점령 시절, 일본군이 우리를 구타하거나 가혹하게 다루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차라리 영국에게 지배받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아시아민족인 일본인에게 환멸을 느꼈다."

"일본인은 자신들을 아시아 민족과 동일시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민족적으로 우리들을 멸시했다. 그들은 미개한 중국인이나 인도인, 말레이인과는 달리,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사마의 후손이었으며 선택받은 민족이었다."

"15세에서 50세에 이르는 모든 중국인 남자들은 다섯 곳에 마련된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공고문을 게시하고 거리를 돌며 스피커로 방송했다. --- 그들은 트럭 50대에 실려 --- 해변으로 끌려갔다. --- 일본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학살된 사람은 모두 5만에서 1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보스는 일본군에 편승해서 동남아를 활보하는 또다른 지배자와 다름없었다. 그는 싱가포르 등지에서 자행된 학살에는 관심이 없이 일본이 제공한 11인승 비행기로 여기저기 점령군 사령관과 인도 교민사회를 방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보스의 활약은 거기까지였다.

■ 임팔 패배로 무너진 보스의 꿈

임팔 공격을 지휘한 일본군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영국과 미국에서 중국의 국민당에게 보내는 군수물자의 통로가 인도였다. 동부 벵갈의 임팔을 거쳐간 이 보급품 때문에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 고전하였다. 버마의 15군사령관 무타구치 렌야(牟田口 廉也, 1888~1966)는 이 통로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1944년 3월에 개시해서 7월 초까지 계속된 임팔 공격은 극한 상황 속에 시작되었다. 국경지역을 흐르는 폭 600m에서 1Km인 친드윈강을 건너면 3000m 이상의 높은 아라칸 산맥이 이어진다. 그 너머 고원지대의 임팔로 가려면 800Km의 산줄기와 울창한 정글을 가로질러야 했다.

대본영의 작전 허가를 받은 15군은 15사 31사 33사의 3개사단 등 8만 병력과 6천여 인도국민군을 동원하였다. 보스는 출정하는 인도국민군에게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공격군이 올린 최대 성과는 임팔 북쪽의 코히마 점령이었다. 그 소식에 보스는 크게 고무되었다.

임팔 방어작전을 지휘한 영국군 14군 사령관 슬림 장군.

영국군 방어부대는 14군 사령관 슬림(William Joseph "Bill" Slim, 1891~1970) 장군이 지휘하는 제4군단의 17인도사단 20인도사단 23인도사단에 1개 기갑여단이 주축이었다. 전투가 계속되자 2개사단과 2개여단이 추가되어 병력으로도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40일 간 계속된 일본군의 필사적인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원인은 보급 차이였다. 영국군은 임팔까지 연결된 기차는 물론 수송기로 군수물자를 받아 사기가 높았다. 반면 일본군은 처음부터 보급 계획이 없이 적의 물자를 노획해서 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글로 가는 보급수단 겸 군량은 말(1만 2천마리) 물소(3만마리) 코끼리(1천 30마리) 산양(1만마리) 등이었다. 그러나 물살이 거센 하천을 건너다가 상당수가 떠내려갔다.

제공권을 장악한 영국군의 공습은 일본군에게 공포였다. 하지만 가장 큰 위기는 우기로 초래되었다. 모든 도로가 사라졌고, 진흙탕 강물이 범람해서 탱크와 탄약을 휩쓸어버렸다. 콜레라, 말라리아, 이질, 각기병과 온갖 정글병도 인명을 앗아갔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표현한 전투가 임팔전투였다. 최대치(최재성 분)가 소속한 일본군이 15사단이었고, 시청자를 전율케 한 처절한 장면이 동벵갈의 밀림 속 전투장면이었다.

임팔 전투지도와 이차대전 전적지 방문자료.

이 전투는 2차대전 최악의 비극으로 평가된다. 일본군은 궤멸 상태에서도 사령관 명령으로 물러나지 못했다. 31사단장은 이에 항명하여 후퇴를 감행하였고, 결국 전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8만 6천 병력 중 1만 2천 명만 살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보스는 절망하였다.

다음해인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로 항복한다고 밝힌 15일 보스도 싱가포르의 자유인도방송으로 고별 연설을 했다. 보스는 마지막까지 순진했다. 이제 소련으로 활동 근거를 이전하겠다고 동료들과 일본군 장교들에게 밝혔다. 당시 일본에게 최대의 적은 만주를 침공한 소련이었다.

보스는 대만에 도착한 뒤 8월 18일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으나 그게 끝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보스가 사망했다는 보도는 6일 뒤에 나왔다.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가 되었다. 현장사진에 비행기 동체가 없었고, 근접이 아닌 원경사진만 공개된 것 등 의문점이 많았다.

■ 인도인 팔 판사의 반역사적 행위

많은 인도인은 영국이든 일본이든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했지만 보스와 그의 추종자 팔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만 증오하였다. 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인이 백인과 싸우는 것만 보았다. 일본군이 점령한 뒤 인도에서 벌어질 사태에는 무지하였다.

전후 찾아온 임팔전투지의 기념식과 일본군 위령제(위)

극동군사재판의 판결에 긴요한 사실 규명에도 팔 판사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6만 5천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에게 저지른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은 비참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9일 간 120km를 행진시키면서 굶어죽이거나 낙오했다고 총검으로 찔러죽인 수가 1만 명이었다. 이것을 팔은 "수송기관도 없었고 식량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했다.

너무나도 명백한 비전투원에게 행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그 짐승 같은 성격은 부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잔학 행위를 저지른 인물은 이 법정에는 없다"며 그 책임을 져야 할 두목급 전범을 옹호했다. 궤변의 정점은 이런 말이었다. "남경대학살이 이루어진 사실은 부인하지 않지만 과장된 선전인 수십 만 건의 증언과 증거는 믿기 어렵다. 퇴각중인 중국군 상당수가 잔학했다."

팔은 "원폭 사용을 결정한 정책이야말로 홀로코스트에 유일하게 비교되는 행위"라고 하는 등 추축국 전범을 단죄하는 무대에서 연합국을 비판하여 재판 자체를 우습게 만들었다. 천황 면책에 항의하고 군수재벌의 처벌을 관철해야 할 이 식민지 출신 판사는 역사관이 비뚤어져 있었다.

인도의 네루수상도 시대에 반역한 팔 판사의 행위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네루는 팔의 의견이 정부가 동의하지 않는 개인견해라면서 다른 판사들과 보조를 같이하라고 전화로 설득했다. 하지만 팔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맹신자였다.팔과 같은 논리라면 인도사에도 할 말이 없을 수 없고, 감정이 상할만한 평가와 비유도 한없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인도를 잃더라도 셰익스피어를 잃을 수는 없다"는 험한 말을 이미 들은 인도에는 그런 말이 결코 예의가 아니다.

2007년 인도를 방문한 아베총리가 보스의 후손을 만나는 장면

■ 팔과 보스를 못 잊는 아베 총리

전후 전범 잔당이 득세하자 팔은 일본 우익들의 영웅이 되었다. 여러 차례 일본에 초청했고, 팔은 기고만장했다. 1950년 10월 도쿄전범재판의 최대 희생은 '법의 진리'였다며 일본과 독일 전범의 처벌을 비난하였고, 1952년 11월에는 히로시마를 방문해서 "도대체 미국이 원폭을 투하할 무슨 이유가 있었나. 일본은 이미 항복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했다. 1966년 쇼와천황은 '국가 또는 공공에 대해 여러 해 공로가 있는 자'에게 주는 훈장인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팔에게 수여했다.

일본 우익은 팔이 죽은 뒤에도 잊지 못했다. 1997년 팔 판사 사후 30년과 인도 독립 50주년을 맞아 교토 료젠고코쿠(靈山護國)신사에 세운 기념비는 팔의 헛소리에 감격한 전범 잔당의 보은행사였다.

2007년 8월 아베 총리는 꼴까따의 「수바스 찬드라 보스 기념관」을 방문해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들은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인도독립운동을 이끈 보스의 강한 의지에 깊이 감동하고 있다. 네타지는 일본에서 매우 존경하는 이름이다." 그러나 인도에선 지금 일부 추종자 외에 그리 존경하는 인물이 아니다.

아베총리가 팔 판사의 아들 프라산타 팔을 만났을 때 특별한 사진 2장을 받았다. 팔 판사가 전 총리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1896~1987)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로 도조 내각에서 장관을 맡았던 A급전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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