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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율하는 기록 가와카미 전기… 과거침략 손금보듯

42. 조선침략의 실무책임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참모차장
가와카미는 군무를 맡고, 가쓰라는 군정을 맡아 서로 보완
메이지 육군 삼걸이 가와카미(川上), 가쓰라(桂,) 고다마(兒玉)
유럽 군사시찰과 군사유학 이후 일본군은 획기적 발전

  • 웹출고시간2013.08.13 18:32:24
  • 최종수정2013.08.13 18:32:24
42. 조선침략의 실무책임자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참모차장

■ 그를 아는 한국인 거의 없어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왼쪽)·가쓰라 타로(桂太郞, 1848~1913).

한국사의 일제 침략을 다룬 서술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되는 존재가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이다. 본격적인 침략 단계에서 군사작전의 실무책임을 맡아 강력히 추진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침략의 상징이 된 이토 히로부미 뒤에 가와카미도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군에서 걸출한 인물로 표현된다. 메이지의 육군 삼걸(三傑)은 그와 함께 가쓰라 타로(桂太郞, 1848~1913)과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1852~1906)를 꼽고 있다. 가쓰라 타로는 3사단장과 대만총독, 육군대신에 이어 내무와 외무 그리고 대장대신에 이어 3차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고다마 겐타로도 3사단장과 대만총독을 거치고, 러일전쟁의 만주군 총참모장과 육군대신, 내무대신,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최고 군대직위가 참모차장과 참모총장이었고, 총리는 물론 대신 직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군대경력에서 가쓰라와 고다마보다 더 화려하게 묘사된다. 그를 천재라고 평가하는 말도 있다. 일본사회에서 가와카미를 부정하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가 쓴 그의 전기 『육군대장 가와카미 소로쿠』는 찬사 일색이다. 그러나 한국근대사와 중국근대사에서 그는 최악의 인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렇게 절망감을 주는 메이지의 일본장교는 없었다. 그리고 육군 참모본부를 개편한 그의 수완과 원대한 동아시아 침략 구상을 보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 어용언론인 도쿠토미 소호

일본에서 사내아이가 자랄 때 은연중 불어넣는 장래희망은 육군대장이었다. 광복 이후 한국에서도 공군이나 해군대장이 아닌 육군대장을 장래희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육군이 주도한 일제 군국주의의 영향이 그처럼 강력했다.

도쿠토미가 쓴 가와카미의 전기는 가와카미를 가리키는 말이 모두 대장이다. 어릴 때부터 육군 초급장교를 지낼 때나, 장군이 되었거나 죽은 뒤에도 모두 대장, 대장이다. 육군대장을 우상화하는 이력으로 가와카미의 일생이 전기물로 나와 있는 것이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 1863~1957).

도쿠토미 역시 한국에서 보면 흉측한 사람이다. 그는 메이지시기의 대표적인 어용신문인 「고쿠민신분(國民新聞)」의 사장으로 제국주의와 국가주의 관점에서 메이지정부과 군벌을 옹호해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결탁해서 일본 국민을 오도한 언론인 겸 평론가 작가가 그였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에서 나오는 반일신문의 강한 영향력을 줄일 수 없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최선의 방편으로 도쿠토미를 불러왔다. 그래서 최신 시설을 갖춘 「경성일보」 경영을 맡기고, 관제언론을 키웠다. 그는 조선인에게 언론자유를 주는 일은 정말로 위험천만한 일이며 언론은 혁명사상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도쿠토미가 쓴 가와카미 전기도 그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실린 생생한 자료가 전율할만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은 뒤늦게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격랑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19세기 말기 가와카미는 늑대와 같이 발톱을 숨기고 조선의 내부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기에 나오고 있다.

■ 메이지 육군의 2세대 선두주자

메이지 육군은 유신 10걸 중 하나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가 창시하였다. 그가 암살된 후 조슈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쓰마번의 오야마 이와오가 7개 상설사단으로 키워냈다. 다음 세대의 선두에 가와카미 소로쿠와 가쓰라 타로, 고다마 겐타로 삼걸이 부상했다. 그중 동갑인 가와카미와 가쓰라는 경쟁자였다.

1884년 오야마 이와오 육군경이 구미순회를 할 때 연대장 보직을 맡고 있던 대좌 계급의 가와카미와 가쓰라를 데리고 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상의한 일이었다. 긴 항해 도중에 이와오는 두 사람에게 서로 협력하도록 선중에서 훈육하며 가와카미는 군무(軍務)를 담당하고, 가쓰라는 군정(郡政)을 맡도록 하였다. 곡절은 있었지만 이것으로 두 사람의 진로가 정해졌다.

귀국한 뒤 가와카미는 참모차장이 되었고, 가쓰라는 육군차관이 되었다. 가쓰라는 3사단장으로 나아가 지휘관이 되었지만 가와카미는 참모본부를 강화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시 다른 보직을 받았어도 곧 참모본부로 돌아와서 청일전쟁 전체를 기획해나갔다.

청일전쟁에 파견된 일본군 기록화.

이 시기는 메이지정부를 비롯해 육해군은 이른바 거족적으로 조선 침략을 최우선 현안으로 삼고 있었다. 기업도 가세하였다. 메이지 육군의 차세대 선두주자였던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이 전력을 기울인 것도 침략 기획을 짜나가는 일이었다.

가와카미의 전쟁 구상에서 모델이 된 것은 독일제국의 육군이었다. 이와오 육군경이 유럽에 데려가서 보여준 근대육군의 전략전술은 수준높은 것이었다. 이를 그가 그대로 활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전략을 뒷받침하는 독일군의 참모본부 조직도 본을 떠왔다.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을 다른 말로 바꾸면 바로 가와카미가 독일식 전략을 일본군에 덮어씌워 만든 기획전쟁이었다.

■ 가와카미의 독일 유학

규슈의 가고시마 동북쪽에 있는 요시노 마을의 공회당 뜰에 '가와카미 대장이 탄생한 땅'이란 기념비가 있다고 한다. 오야마 이와오와 도고 헤이하치로는 가고시마의 도심 출신이지만 그는 변두리 출신이었다. 그는 군인이 되어 1868년 후시미(伏見)전투와 보신(戊辰)전투에 참가한 뒤에 조슈와 사쓰마 그리고 토사번 군대로 만든 친병 조직의 장교로 편입되었다.

근위사단으로 확대된 이 부대는 정한론을 둘러싼 다툼과 사쓰마번 중심의 반란인 세이난(西南)전쟁이 일어났을 때 메이지정부의 편에 섰다. 가와카미도 고향 세력과 벌이는 전쟁에 진압군으로 참전하였다. 승리한 편에 섰던 그의 출세는 순조로웠다. 내전 차원의 경험에 그쳤던 가와카미의 안목은 유럽을 본 후 크게 달라졌다.

도쿠토미 소호가 쓴 전기인 『육군대장 가와카미 소로쿠』.

가와카미는 외국 여행을 많이 한 편인데 그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두 차례의 유럽 경험이었다. 1차가 1884년 1월에서 1885년 1월까지가 유럽과 미국을 순회한 것이었고, 2차가 1886년 11월에서 1988년 6월까지 독일에 파견되었던 것이었다.

가와카미 전기에는 일기에 토대를 두고 매일 유럽에서 본 사실을 전하고 있다. 각국에서 국왕과 왕세자를 알현하고, 부대를 시찰하면서 병사들의 복무 여건을 점검하였다. 포대를 방문해서 배치상황을 샅샅이 보고, 포의 성능을 듣고 기록하였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맥을 구축하였던 일이다. 가는 나라마다 오찬회와 만찬회에 참석해서 고급장교들과 환담을 했다. 만난 장교들의 이름을 꼼꼼히 적고, 군사문제의 관심사를 물어 다답을 들었다. 왕족을 방문하고 육군대신을 만났으며, 현지에서 군사정보를 수집하던 무관이나 공사들에게 세부 사실을 듣기도 했다. 최고의 만남은 독일제국의 군사영웅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1891) 참모총장을 만난 것이었다.

가와카미는 독일에 군사유학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1886년 근위2여단장으로 독일 베를린에 가서 병제를 정밀하게 공부였다. 이 시기에 유럽 유학을 한 것은 일본에서도 선구적인 일이었다. 이때 군사학 연구뿐 아니라 유럽국가의 인구와 산업 그리고 자원 등 국세도 조사를 하였다. 이런 경험은 청일전쟁을 기획할 때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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