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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조선 침략의 쌍벽을 이루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요시다 쇼인의 학생으로 침략의 추동력
청일전쟁에 제1군사령관으로 참전했지만 졸렬한 전략으로 해임
메이지정계의 원로로 백작, 후작에 이어 최고 작위인 공작에 올라

  • 웹출고시간2013.09.24 18:32:17
  • 최종수정2013.09.24 18:32:17
46.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 조선침략의 추동력인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

메이지유신 이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는 육군뿐 아니라 정계와 관계를 오랫동안 주무른 실권자였다. 그는 메이지 군대의 산파였던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郞, 1824~1869)의 후계자로서 군제개혁을 단행하고 징병제 실시를 결행하였다. 또한 육군의 기초를 만든 군정가로서 '조슈 파벌'을 이끌던 '군벌의 시조'이기도 했다.

1894년 여름 일본군이 서울에 들어와서 도성을 장악하고 경복궁을 침범했을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내각의 총리는 맡고 있었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야마가타는 총리를 비롯 내각의 요직을 역임한 원로이면서 제1군사령관으로 전선에 나왔다. 이들은 조선침략을 추동한 최고 책임자이며, 동시에 이를 막는 청국과의 전쟁을 결정한 최고 책임자였다.

이토는 1885년에 만 44세를 겨우 넘긴 나이로 총리가 된 후 4차에 걸쳐 7년 반 가까이 장수한 총리였고, 야마가타는 핵심 군직을 돌려 맡은 후 2차에 걸쳐 3년 여 동안 총리로 지냈다. 일본제국의 헌법을 제정한 초기에 정계와 육군의 실세는 바로 이들이었다. 조선 침략의 정점에도 이들이 존재했다.

일본제국의 침략성을 보면 그 시점에 요시다 쇼인이 있다. 오키나와를 집어먹고,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며, 만주와 대만 그리고 필리핀을 침략한다는 구상은 모두 쇼인의 「유수록(幽囚錄)」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학생들이 도쿠가와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정부의 실력자가 되어 강병 정책을 추진하였다. 번(藩)을 폐지해서 무사계급과 다이묘(大名)까지 제거한 다음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는 국민개병의 근대 군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군대로 침략을 시작했다.

이토와 야마가타가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그런 꿈을 전해 받은 지 꼭 37년 후인 1894년에 실제로 조선에 군사 침략을 감행한 것이다. 이후 청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대륙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마침내 만주를 침범해서 만주국을 만들었으며, 군국주의의 길로 더 나아가 아시아인에게 심대한 고통을 주었다.

일본제국의 군대를 침략군으로 만든 '공로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누구인가.

■ 야마가타의 자유민권운동 탄압

토치기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기념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메이지 2년인 1869년에 구미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서 각국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조슈번 출신들은 요시다 쇼인의 교육 때문인지 구미행이 빈번했다.

이 시기 유럽은 전쟁판이었다. 분쟁이 일어나면 전쟁으로 결말을 지었다. 1870년에 벌어진 프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그러했었다. 승리한 프러시아는 독일제국으로 변신하였고, 독일은 프랑스를 대신해서 유럽의 중심국가로 외교무대에서 활약하게 된다. 야마가타는 이런 정세를 보고 약육강식의 국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앞에 있던 실세들이 짧은 시기에 사라졌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세이난전쟁에 패해서 자결하였고, 다른 실세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그에게 반대하는 육군 내 세력은 요직에서 쫓아냈다. 대파벌을 장악한 야마가타를 가로막을 세력은 없었다.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동상

조선에서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때 청군에게 밀려난 후 군사강국을 목표로 예산을 쏟아 넣었던 국정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그러면서 1888년 12월부터 다음해 10월까지 다시 유럽 각지를 다니며 견문을 쌓았다. 독일에서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를 만나 국가 운영과 군대 편제를 배우고 온 것도 그때였다.

그는 1890년에는 의회개설을 앞두고 일본식 지방자치제를 만들었다. 요점은 중앙정계의 영향을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이 받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을 이른바 일본식 공공정신을 함양하는 무대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성공적이었다.

메이지 실권자들에게 자유민권운동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을 뽑는 유례없는 등급선거를 실시해서 지방의회를 명망가를 채우게 하였다. 직접선거뿐 아니라 간접선거도 병행해서 부유하고 나이 많은 인사가 의회를 장악해서 사회질서를 중시하도록 만들었다.

1887년에는 더 적극적인 탄압에 나섰다. 보안조례를 공포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주요 자유민권론자를 체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도쿄에서 지방으로 몰아냈다. 메이지정부가 군대식 질서로 국민을 조직하는 것을 저해하는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침략과 전쟁 그리고 군국주의의 길은 그런 방식으로 출발하였다.

■ 야마가타의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근대사의 주요 연구주제가 되어 많은 저서가 있다.

야마가타는 원로로서 군대와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의 요직은 물론 총리 인선도 그의 말이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군제개혁과 군대증설, 그리고 전략과 정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의견은 대개 그대로 수용되었다.

가장 큰 주장은 1888년에 이른바 주권선과 이익선을 말한 것이다. 이때 동아시아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동점과 시베리아철도를 부설하며 들어오는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불안해졌다고 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청국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조선을 다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야마가타식 용어로 말한 것이 주권선과 이익선이었다.

주권선은 일본의 국경을 의미하고, 이익선은 일본의 이익과 관계되는 경계선을 의미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에 숙명론처럼 된 지정학적 분석을 적용해서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했다. 이익선은 주권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익선이 침범되면 주권선도 위험해진다는 개념으로 군비확장론의 핵심이 이것이었다. 조선을 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해서 일본의 영향 아래 두려면 청국을 압도할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같은 논리는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에 확대되어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는 내용으로 확대되었고, 또 러시아의 보복전쟁에 대비하는 논리와 장래 벌어질 백인과 유색인종 간의 대립을 예상하는 논리로 증폭되었다. 즉 전쟁 등으로 일본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주권선과 이익선도 더불어 확대되면서 2차대전을 일으키는 논리까지 제공했던 것이다.

■ 1907년 공작이 된 야마가타 아리토모

야마가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축쇄판이었다면 이토 히로부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신봉자를 거느리면서 서로 좋은 상담역으로 협력했다고 한다.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가 『나의 교유록』에서 기록한 말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비슷한 평가가 나온다. 전국시대와 막부 말기와 대비하면 오다 노부나가가 사이고 다카모리였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겸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천하통일을 앞두고 쓰러진 오다 노부나가의 과실을 도요토미가 차지해서 통일 후 조선을 침략한 것처럼,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메이지 유신을 완수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과실을 차지해서 조선과 중국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조선강점 10년을 맞아 기념해서 내놓은 도록의 사진. 이토 옆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최고의 공로자로 배열되어 있다.

세상이 급변할 때 거부가 되거나 비약 출세하는 길이 나온다. 토사(土佐)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1835~1885)가 메이지권력과 결탁해서 미쓰비시란 재벌을 일으켰다면, 이토와 야마가타는 막부말기 하급무사 집안에서 정치적으로 비약 출세하였다.

메이지 일본에서는 유럽 왕국의 귀족제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1884년 그런 제도를 모방해서 화족령을 제정하였다. 이른바 황족 아래 화족(華族)이라고 부르는 귀족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라고 해서 서민과 격이 다른 특권 세습계급을 운영하였다.

가장 높은 귀족인 공작에는 264년 간 막부의 장군으로 일본을 지배해온 도쿠가와 가문을 비롯해 섭정과 관백 등에 오른 공가사회의 고노에(近衛) 가문 등이 들어갔다. 정책을 좌지우지한 메이지 원훈들도 유력 가문을 배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에 메이지유신의 실권자들도 공작 지위에 끼어들었다. 메이지시기에 모두 4개의 가문이 공작이 되었다.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타로 가문과 사쓰마 출신인 오오야마 이와오 가문이다.

집안 배경이 없던 이들 공작이 된 것은 뛰어난 공로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떤 공로가 높이 평가되었을까. 그것은 메이지 최대의 국가 목표인 조선 침략에 대한 기여도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온갖 고위 서훈을 다 받고 화족령에 따라 백작과 후작이 되었는데 여기에 영전을 더해 1907년 9월 공작에 오른 것이다. 조선 강점 10주년에 펴낸 사진첩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의 바로 옆에 자랑스럽게 편집된 그의 얼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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