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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전의 귀재, 조선과 청국에 스파이를 파견하다

시바료타로가 찬사를 아끼지 않은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청일전쟁 뒤 동남아 침략을 위해 직접 스파이로 나가 정보 수집
참모총장 임명 후 대장 승진했지만 다음해에 죽어 전쟁이 미뤄져

  • 웹출고시간2013.09.10 16:31:39
  • 최종수정2013.09.10 16:31:39
45.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의 동아시아 침략구상

■ 시바료타로의 가와카미 찬가

시바료타로는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러일전쟁을 이끈 육해군 지휘관과 교묘한 책략을 시도한 외교관을 누구보다 최고로 평가한다. 한갓 기병 여단장과 해군 참모에 지나지 않는 아키야마 형제를 영웅으로 부각시켜 역사를 왜곡시키는 독선도 그런 시각에서 나왔다.

1897년 영국에서 출간된 청일전쟁 관련 책에 실린 참모차장 때의 가와카미 소로쿠 삽화.

그러나 일본군을 혁신시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가르친 공로자는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시바료타로도 가와카미에 관해서는 찬가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은 나라가 너무나 작았지만 그래도 청국과의 전쟁에 이기려고 했다. 이기려면 이기기 위한 조직과 방법이 있어야 했을 것이었다. 프로이센주의였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육군 참모 메켈 소령이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많이 알기 위해 많은 수재를 독일에 파견했다. 그 중에서 최대의 인물은 그 당시 육군의 보배로 불리던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유럽인들은 '프로이센에서는 국가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냉소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뼛속까지 프로이센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사상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참모본부의 활동이 ---- 국가를 앞으로 앞으로 이끌고 나가려고 했다. 이 메이지 20년대의 가와카미 사고방식이 그 뒤 태평양전쟁 종료까지 국가와 육군 참모본부의 관계를 결정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이야기다.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정한 것이 가와카미의 프로이센식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첫 희생자가 조선이었다. 시바료타로는 참모본부의 첩보활동을 간추려 설명한다.

"프로이센주의에서 싸움은 선제주의이며 먼저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 그것 말고는 승리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때부터 적의 정치정세나 사회정세, 군사정세를 충분히 알아두어야 한다. 그 때문에 첩보가 필요했다."

13년 간 중국에서 암약했던 중국전문 스파이인 모략장군 아오키 노부즈미(靑木宣純, 1959~1924).

"가와카미는 첩보를 중요시했다. 그리하여 첩보는 첩보 브로커에게 맡기지 않고 그의 부하인 참모장교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들을 뽑아 적지에 잠입시켰다. 다만 그들이 막상 개전되었을 때 작전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방식이 달랐다."

"이를테면 1884년 청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싸우게 되자 가와카미는 '청국 군대의 실정을 조사하라'고 수많은 참모장교를 현지에 파견했다. 대위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島安正), 대위 고지마 마사야스(小島正保), 중위 오자와 도쿠헤이(小澤德平), 중위 오자와 가쓰로(小澤豁郞) 등이었고, 소위 아오키 노부즈미(靑木宣純)를 남중국에 3년 동안 잠복시켰다."

■ 상하이의 일본군 특무기관 제스필드 76호

조선과 청국에 깔린 첩보원들이 속속 정보를 보내왔다. 시바료타로는 가와카미가 도쿄에 있으면서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조선과 청국 군대의 실태는 물론 고관들이 움직이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스파이들의 거점은 공사관이나 특무기관 조직 등 가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본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중국 요지에 설치된 특무기관은 정보 수집, 요인 암살, 이권 탈취, 아편 밀매, 흑사회와 결탁, 매음굴 운영 등 온갖 비인도적인 행위를 자행하였다.

상하이에는 제스필드 76호란 주소를 이름으로 장제스의 정보기구인 남의사(藍衣社)와 맞서 공작원 살해를 감행하던 일본군 특무기관이 있었다. 중국인 변절자인 한간(漢奸)들이 도이하라(土肥原)기관과 우메(梅)기관에 속해서 운영하던 기관이다. 영화 '색계'에서 양조위가 이끌던 특무기관이 바로 제스필드 76호였다.

상하이에서 암약했던 일본군 특무조직이 있었던 상하이시 징안구(靜安區) 완항두루(万航渡路) 435번지. 동네사람은 특무들이 사용한 지하실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현재 직업기술학교로 사용된다.

지난 8월 20일 아침 찌는 듯한 더위 속에 특무기관 제스필드 76호의 흔적을 찾았다. 이 특무조직은 유명해서 상하이 토박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징안구(靜安區) 완항두루(万航渡路) 435번지. 지금은 그 터에 커다란 아파트를 겸한 직업기술학교가 들어서 있다.

직업기술학교 옆 가게의 주민이 여기가 일본군 특무기관이 있었던 곳이라고 말해준다. 당시 사용했던 지하실도 있다고 했다. 학교 정문의 경비원에게 지하실을 물어보니 없어졌다고 한다. 상하이는 이처럼 일제 침략의 잔재가 주민들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이런 특무기관을 중국 전역에 퍼지게 한 사람이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이었다. 정보장교들에게 현지어를 습득시켜 지역 전문가로 양성하고 모략전에 활용했다.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은 이런 흉측한 첩보공작이 성공한 첫 무대였다. 조선의 고관을 끄나풀로 만들고 관군의 무기와 전투역량을 파악해서 일거에 무력화한 것이 첩보전쟁의 성과였다. 청군을 기습해서 단기간 공격으로 승리를 과시한 다음 강화회담에서 승전을 보장받은 것도 모략전쟁의 일환이었다.

■ 청일전쟁 이후 침략 목표는 동남아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저서 『나의 교유록』에 실린 가와카미 소로쿠 사진.

1897년 가와카미 소로쿠는 동남아를 시찰해서 수집한 정보를 정리한 『인도지나시찰대요(印度支那視察大要)』를 펴낸다. 이 책을 보면 또다시 끔직한 생각에 전율하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 등 열강의 공세에서 국가의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조선을 침략했다고 주장해왔다. 또 열강의 식민지로 고통을 받는 아시아인들을 돕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미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가와카미의 계획에 따르면 동남아는 조선에 이어 침략해서 식민지로 지배할 대상에 불과했다.

『인도지나시찰대요』는 먼저 동남아인들의 인종과 풍습을 소개하고 있다. 서구제국주의국가에서 인류학 연구 성과를 통해 최대한 식민지를 수탈하는 방식을 모방한 모습이 드러난다. 다음에는 현지 정치와 경제를 점검하고, 프랑스군 사령관과 병사 등 군대의 규모와 근무 여건 등을 살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현지인이 구성한 군대를 조사한 내용이다. 프랑스 군대와 현지인 군대를 이간시킬 방법을 찾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군량의 확보방법과 그 운반 즉 운수교통도 조사를 하고 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병참과 수송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앞서가던 전쟁 기획자였다.

프랑스의 해군보병 3개연대, 포병 7개중대, 외국인보병 4개대대 반, 베트남 척탄병 1개연대 등. 이것이 베트남에 있던 군대였다. 일본군이 공격할 경우 침략군의 규모가 자동으로 계산되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총독부는 설치한 지 13년이 지난 때였다. 가와카미는 총독부에서 군사를 담당한 장교가 참모장교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고위직을 맡은 인물 중에는 가와카미가 길러낸 정보장교가 있었다.

가와카미는 부하 장교들만 스파이로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현지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서울에 와서 궁궐 호위 실태 등을 파악하거나 천진에 가서 요새 정보뿐 아니라 리훙장의 인물 됨됨이까지 조사해갔다. 그런 뒤 기습적인 침략과 전쟁으로 승리를 챙겼다.

이제 동남아 침략의 첫 단계에서 자신이 직접 스파이가 되어 정보를 수집해왔다. 조만간 일어날 전쟁은 일본 정부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일본제국의 헌법은 천황의 군 통수권을 불가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메이지유신의 원훈에 휘둘려왔고, 이제 참모본부를 장악한 호전적인 장교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소불위의 전쟁 기획자 가와카미 소로쿠. 동남아 정탐 직후인 1898년 1월 가와카미는 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9월 대장으로 진급했다. 군 선배가 즐비한 속에 파격적인 출세였다. 그러나 운은 거기까지였다. 1899년 5월 죽어 도쿄의 아오야마레이엔(靑山靈園)에 묻힌다.

■ 가와카미 연구가 없는 한국

일제 침략이라는 호된 시련을 겪고도 한국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침략의 발상자와 주도자, 그리고 실행자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 침략의 발상자인 일본의 국학자들과 요시다 쇼인 등 메이지유신 원훈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국 언론에는 아직도 요시다 쇼인의 유적을 둘러보고 찬양하는 글을 버젓이 실리는 정도이다.

침략과정에 두드러졌던 이토 히로부미만 매도하고 그 뒤에 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가쓰라 타로 등은 말하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전쟁 기획자 가와카미 소로쿠를 모르는 것이다.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가와카미 소로쿠의 연구를 찾으면 재일동포 김문자 지음,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태학사)이란 번역서만 유일하게 나온다. 일본군 장교가 시해에 가담한 실상을 가와카미와 연관해서 연구한 책이다. 실제 명성황후의 시해를 기획한 최고 군사책임자가 가와카미 소로쿠였던 것이다.

한국군사사의 연구 성과에는 가와카미 소로쿠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군의 군사사 연구자들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한국사학의 연구 성과에도 없고, 일본사학의 논문에도 보이지 않는다. 군사사학의 연구에서도 이 인물이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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