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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발상지는 왜구의 근거지였다"

메이지유신 공신들의 노략질 계승
야마구치, 히로시마, 후쿠오카, 가고시마, 나가사키 등이 여기에 해당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도 왜구 거점 하나인 후쿠오카 출신
고려 말 조선초에 삼남과 평안도 함경도까지 왜구가 침범해서 노략질
조선 초기 삼남에 쌓은 여러 성은 왜구 침입에 대비해서 쌓은 방어용

  • 웹출고시간2013.01.15 18:28:2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4. 메이지유신 공신들의 노략질 계승

왼쪽부터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토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시바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하던 대좌 계급의 한 스파이가 나온다. 일본의 공작금을 레닌 일파에게 전달해서 러시아혁명에 기여했다고 놀랄만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 스파이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1864~1919)였다.

러시아 주재 무관이었던 그는 영국의 전설적 첩보원 시드니 라일리가 여순에서 보내온 요새 도면을 확보하여 여순요새 점령에 일조를 했다. 영일동맹에 따라 정보를 공유한 것이다. 또한 아카시는 유럽의 반러시아 조직에 공작금을 살포하고 핀란드, 폴란드, 그루지아에서 민족운동을 일으켜 제정러시아를 곤혹스럽게 했다. 시바료타로는 레닌이 "일본의 아카시 대좌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소설에서 쓰고 있다.

바로 그 아카시가 조선에서 통감부와 총독부의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장으로 등장했다.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집행자였던 그는 1910년 7월부터 1914년 4월까지 재임하며 의병을 대거 학살하였다. 그 공으로 대만총독이 되었고, 대장 승진까지 했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이노우에 가오루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 때문에 가려졌다면 아카시 모토지로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갖는 무단통치의 상징 때문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략과 탄압의 역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아카시의 출신지는 규슈의 후쿠오카였다. 조선침략에 앞장선 극우인물인 현양사 총수 토야마 미쓰루(頭山滿, 1855~1944)와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1874~1937)도 같은 후쿠오카 출신이었다. 도대체 후쿠오카는 조선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 지금은 잘 정비된 항구 모습이지만

무라카미 해적소굴(붉은 선)과 세토내해.

일본을 가서 보면 동해와 세토내해(瀨戶內海)에 인접한 지역의 실체가 바로 들어온다. 그것은 야마구치, 나가사키, 후쿠오카, 가고시마 등지에서 메이지유신과 조선침략을 주도한 주요 인물들이 성장했고, 동시에 이들 지역이 과거 왜구의 소굴이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잘 정비된 항구와 농촌도시의 모습을 갖고 있다. 어디나 간판과 치장이 요란하지 않고 원색이 별로 없는 무덤덤한 거리가 이어진다. 작은 섬들의 모습도 여느 섬들과 다름없다. 연락선 부두에는 끊임없이 연안 여객선이 닿고 떠나간다. 여객선의 여러 목적지가 전에 왜구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마쓰우라(松浦)해적 소굴이었던 이키섬의 관광안내도이다.

규슈 일대와 세토내해는 대륙과 일본을 연결하는 바다통로였다. 이곳에 뱃일을 하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이들은 장사를 하거나 뱃길 안내 또는 해적질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13세기에 들어와 갑자기 마쓰우라(松浦)의 히라도(平戶)와 이키(壹岐)나 쓰시마(對馬島) 같은 섬을 거점으로 고려땅에 가서 노략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왜구였다.

왜구는 『고려사』에서 169년 간 529회나 침입했다고 나온다. 전성기에는 3백척에서 5백척의 배를 가지고 침범해서 분탕질을 했다. 나중에는 중국 연안까지 원정을 갔다. 16세기까지 왜구는 동아시아의 화근 덩어리였다.

이런 왜구 소굴에 살던 사람들이 19세기 후반에 갑자기 메이지유신에 앞장서고 조선침략에 나서게 되었다. 무슨 까닭인가·

■ 고려 쇠망 원인 중 하나인 왜구 침범

일본 학계에서 정리한 왜구 침입도.

왜구가 처음 침범했을 때 고려는 막을 방도가 없었다. 삼면이 바다라서 어디로 들어올지 몰랐다. 어촌에 나타났다가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 내륙까지 들이쳐서 오래 동안 노략질하고 나서야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가 오지만 이미 도망간 뒤였다.

왜구에게 방비가 없는 연안 노략질은 말 그대로 횡재였다. 도둑떼는 더욱 늘어나서 이제 마을 단위가 아니라 여러 고을을 들이쳐서 민간 재화뿐 아니라 관아 창고를 몽땅 털어가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세곡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과 사람들까지 납치해서 끌고 갔다. 가장 자주 시달린 지역은 가까운 경남 일대였으나 전남으로 들어간 왜구는 장성, 흥덕, 고부, 김제, 전주로 올라가서 충청도 부여, 공주까지 치고 들어가기도 했다.

주요 강어귀는 왜구의 접근로라서 조운선이 막혔다. 개경으로 가는 세곡을 육지로 운반하자 그것마저 탈취하기 위해 청주까지 오기도 했다. 심지어 강화도에서 약탈해갔고, 경기도 고을까지 들이닥쳐 개경 수비군이 밖으로 나가면 수도를 공격하려는 꾀도 냈다.

왜구 격퇴는 고려 말의 최대 현안이 되었다. 그래서 군 지휘관인 최영과 이성계 같은 유능한 장수가 왜구를 격멸한 후 정계의 실권자로 부상하였다. 그 와중에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국력을 갉아먹었는데 결국 고려는 쇠퇴하고 새 왕조 조선이 세워졌다.

■ 왜구는 정보통인 동시에 횡재의 수단

왜구는 단순한 바닷가 도적떼가 아니었다. 규슈와 세토내해의 여러 지역에서 몰려들어 대규모 해적으로 확대되었다. 왜구의 선단은 수백 척에 이르게 되었다. 갈수록 정보를 더 수집하고 노략질 대상 지역도 확대했다. 강화도와 삼남은 물론 경기도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도와 함경도 연안까지 안가는 곳이 없었다.

약탈해간 재화는 어떻게 나누었을까· 본래 해적은 일정한 비율로 약탈물을 분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말단까지 위험수당을 챙긴 셈이었다. 1360년 공민왕 9년에 강화도를 침범해서 쌀을 4만 석이나 가져갔다. 납치한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는데 얼마나 잡아갔는지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노략질은 두목에겐 왜구가문을 일으켜서 떵떵거릴 기회를 주었고, 졸개들에겐 살 방도를 마련해주었다. 왜구짓을 한 영주는 경쟁력이 강화되었고, 다른 영주도 기회만 있으면 왜구로 변신할 기세였다. 세토내해의 일본인에게 조선은 너나없이 한탕을 노릴 무대로 보여졌고, 그런 생각은 유전인자처럼 후대에 전승되었다.

조선이 체제 정비 후 쓰시마를 정벌하는 등 방비를 갖추자 명이 이제 노략질 대상이 되었다. 연안이 매우 길어 대비가 어려웠던 명은 내륙으로 주민을 이전시키는 해금정책까지 써야 했다. 요동에서 광동과 복건성까지 분탕질하던 왜구는 척계광(戚繼光, 1528~1587)에게 격파당하는 등 세력이 줄어들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지령을 내리자 비로소 위축되었다.

왜구가 사라진 것은 17세기에 기독교 전파를 막기 위해 도쿠가와막부가 쇄국책을 내린 이후였다. 1633년부터 39년까지 5차례나 쇄국령을 내리고 허락 없이 외국에 나가는 것을 강력히 금지하였다.

■ 유신은 쇄국책 포기와 조선재침을 의미

조선 초기에 쌓은 읍성과 산성은 이런 왜구를 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삼남 일대의 병영과 수영의 위치를 보면 왜구의 상륙지나 내륙 침범 경로와 일치하고 있다. 충남 내륙의 해미에 성을 쌓고 충청병영을 설치한 이유도 그곳이 왜구의 침범 노선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 이해에서 왜구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고려와 조선의 관방정책은 북의 거란 몽골 여진과 남의 왜구를 막는 것이 중심이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왜구를 막는 일선으로 역할하였다. 왜구의 확대를 임란으로 본다면 군사 연구의 중심에 왜구가 있어야 한다.

대마도의 전통가옥인 시이네 돌창고이다. 왜구들은 한반도에서 노략질한 곡식을 이곳에 저장해두고 먹었다.

한국인의 반일감정 확산은 왜구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왜적은 주로 신라만 적대해서 침범했지만 고려 조선의 왜구는 모든 해안 지역에 출몰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왜구의 전통을 가진 일본에서 언제나 침범하면 횡재할 수 있는 꿈의 나라가 되었다. 그것이 불행을 가져왔다.

왜구의 후손들에게 쇄국책은 가장 큰 불만 대상이었다. 결국 메이지유신의 공로자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쇄국정책을 포기시켰다. 그런 뒤 왜구 문화 속에서 성장한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아카시 모토지로 등은 이미 유전인자가 된 왜구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조선 침략 후 한탕 횡재를 노리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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