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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은 침략의 선도자

메이지 정권의 재정과 외교 실세로 조선 침략을 선도한 인물
1862년 영국공사관을 습격한 테러단에 가담해 건 방화 성공
조슈번의 유명한 5인 중 하나로 대장·외무대신 등 요직 독점

  • 웹출고시간2012.12.04 15:35:13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9. 이노우에,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은 침략의 선도자

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메이지정부의 조선침략에 앞장섰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명성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있는 인물이다. 조슈번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운 조선침략의 구상을 일생에 걸쳐 실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권의 실세로서 요직을 맡아온 그는 한국근대사에서 담당한 악역도 화려했다.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특명부전권대사로 와서 불평등조약을 주도했고, 외무경일 때는 신사유람단으로 온 개화파를 꾀어서 일본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청일전쟁이 벌어지자 주한 특명공사로 자원 부임해서 조선정부에 일본군 지원을 강요하였고,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반일봉기를 나서자 일본군 증파병의 학살을 지휘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즉시 서울에 특명대사로 와서 가담자 전원을 일본에 귀국시켜서 처벌을 막았다. 이들은 다음해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무죄 석방된다.

■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의 이노우에 옛집

다카다공원으로 이름을 바꾼 이노우에공원 표시.

한국에서도 야마구치시의 유다온천은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JR유다온천 역에서 내려 온천지역을 찾아 올라가면 골목 속에서 이노우에공원이 나타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옛 집터에 만든 공원이다. 울컥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른다. "이렇게 쉽게 그 흔적이 나타나다니!"

한국근대사에서 이노우에 가오루는 숨어 있었다. 심지어 한국사 개설 책에도 한두 군데밖에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 대부분이 그를 모르고 있다. 침략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온천 옛집 터에 있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

일본근대사 연표에서도 슬그머니 그와 조선 관계를 빼놓은 사례가 보인다. 치밀하게 조사한 자료에서 생략된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1894년과 1895년,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직후에 수행한 그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았다면 빼놓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유다온천의 작은 공원에 그를 기리는 흔적이 가득하다. 지금은 다카다(高田)공원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동판 위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의 생애를 새겨놓았다. "메이지 유신 창업 이래 시종 내외의 기밀이 높은 정무에 참여하였고, 산업 진흥에 진력해서 국운을 열어 원훈으로 추앙받았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은 모자를 벗고 지팡이를 든 모습으로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부터 온몸이 새들의 배설물로 가득 덮여 있다. 그렇게 그는 역사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아이들은 소리치며 놀기에 바쁘고 어른들은 한쪽으로 나오는 온천물에 탁족을 한다. 공원 입구에서 솟아난 물은 지난 역사 때문에 찾아온 객을 아랑곳 하지 않고 흐른다.

■ 야마구치에서 반대파가 습격, 난자해

조슈(長州)번의 청사는 하기의 외진 곳에 있어 방어가 어려웠다. 양이의 침범을 막는 적지로 생각한 야마구치에 새 청사를 마련하고 1863년 4월 이주했다. 그때부터 조슈번은 야마구치번으로도 불리게 된다.

조슈번은 급진 존왕양이론을 내세워 교토 정국을 주도했으나 아이즈번과 사쓰마번이 주도한 정변에 의해 추방된다. 그러자 조슈번은 1864년 8월 고쇼(御所) 주변에서 3200여 군대를 동원해서 변란을 일으켰다. 약 250년만에 교토에서 일어난 이 대사건으로 3만호가 불에 타는 참사가 벌어졌다. 마침내 조슈번은 패배하고 급진 지도자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자객에게 공격받은 소데도키 다리의 돌비.

막부는 1차 조슈정벌군을 출진시켰다. 조슈번 내부에서는 막부에 순응하는 보수파가 집권하고 소장파를 처벌하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에 반대하여 번주 앞에서 열린 대책회의 중 막부에 대항하자고 주장했다. 그 까닭에 귀로에서 반대파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동상 옆에는 서양의사 도코로 이쿠타로(所郁太郞)의 현창비가 있다. 교토에서 의학을 배운 그는 조슈번의 사무라이와 가깝게 되어 야마구치의 병원 책임자가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난자된 상처는 6군데에서 5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로 봉합되고 위기를 넘겼다. 현창비는 그 공을 기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다. 조슈군의 참모로 활동하다가 진중에서 장티프스에 걸려 27세에 죽고 만다.

야마구치에는 기헤이타이(奇兵隊) 결성지와 같은 유적이 곳곳에 있다. 이노우에 가오루도 건강을 회복한 뒤 대원 100명으로 구성된 고우죠군(鴻城軍) 총독으로 참전하였다. 고우죠군은 조슈번 소군(小郡)지구에서 호농과 하급 사무라이 중심으로 조직된 무장대였다.

■ 이노우에 가오루의 재정 실무경험

이노우에 가오루 옛집 터 기념비.

요시다 쇼인의 제자답게 이노우에 가오루는 26세에 테러단의 일원이 되었다. 1862년 다카스기 신사쿠가 이끈 10명의 영국공사단 습격단에 가담해서 방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직후 후환이 두려운 그는 교토로 도피한다.

그는 조슈번의 명에 따라 이른바 조슈 5걸의 한 사람으로 영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그때 서양의 발전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런던에서 시모노세키 전쟁 소식을 듣자 급거 귀국해서 강화에 분주하면서 개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쓰마와 동맹을 맺은 후에는 나가사키에 체재하여 무기 구입과 외국 기선을 도입하는 업무를 맡았다. 유신 이후엔 규슈 진무(鎭撫)총독의 참모로 나가사키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무역 거점인 나가사키는 막부의 직할지였다. 막부 패배 뒤 행정이 마비되자 조슈번의 핵심인물인 그가 가서 행정을 담당한 것이다. 이 경험은 유용하였다. 1869년 대장성으로 옮겨 조폐국과 은행 설립에 관여하는 등 재정전문가로 활약한다. 폐번치현 이후에는 중앙재정 확립과 회사 설립에 노력했다. 막부의 어용상인인 미쓰이가 이때 관과 결탁해서 성장을 시작한다.

■ 12년 간 대신을 지낸 화려한 관운

야마구치시 루리코지(瑠璃光寺)에 있는 일본 3대명탑 중 하나인 오중탑.

메이지유신 성공 후 일등공신들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는 병사하거나 암살되어 무대에서 떠났다. 그 다음에 떠오른 인물들이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이노우에 가오루이다. 일본에서도 '밥하는 사람 따로, 먹는 사람 따로'였던 모양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제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내각을 만들어 초대에 이어 네 차례나 총리를 맡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육군의 원로로서 청일전쟁에선 제1군사령관, 러일전쟁에선 참모총장으로 지휘한다. 또 두 차례나 총리에 올라 군대와 관료 양쪽에서 거물이 된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들처럼 제국의 정상에서 호령하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에서 원훈의 지위를 유지하며 파벌을 바탕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15년에 80세로 죽을 때까지 재정, 외교, 산업계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무엇보다 관운이 화려했다. 1879년 외무경에 오른 뒤에 외무대신 직책까지 8년, 농상무대신 1년 5개월, 내무대신 2년 2개월, 대장대신 6개월 등 모두 12년 1개월 동안 장관급으로 지냈다. 2개월 간 총리대리도 역임한다. 관직을 떠난 뒤에는 미쓰이재벌의 종신 고문으로서 경영에도 참여한다.

왜 지루하게 그의 행적을 살펴야 했나·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과 맺은 악연을 찾아보기 위한 사전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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