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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차별과 탄압의 화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히로시마 대본영에서 병참 참모로 조선과 악연을 맺기 시작
조선인을 일본헌법 적용대상에서 제외, 이등 국민으로 편입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와 함께 유일한 부자 원수·육군대장

  • 웹출고시간2013.01.08 18:03:5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3. 조선인 차별과 탄압의 화신 '데라우치 마사타케'

야마구치매장문화재센터 전면(왼쪽)과 전시실. 야마구치의 고대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세이난전쟁에서 오른손 부상을 입어 경례도 왼손으로 했다. 보직도 전투지휘관보다 행정과 교육부문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에 유학한 후 1887년 중좌 계급으로 일본육사 교장이 된다. 그는 특이한 교장이었다. 퇴근 뒤에도 망원경으로 생도들을 감시할 만큼 꼼꼼했다고 한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히로시마 대본영의 병참과 통신책임자로 상석참모와 병참총감을 겸한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1848~1899)의 지휘를 받았다. 가와카미는 사쓰마 즉 가고시마파의 두목급이었으나 1899년 참모총장 현직에서 병사를 했다. 가와카미 인맥은 그 후 힘을 쓰지 못했다. 야마구치파인 데라우치의 견제 때문이었다.

데라우치는 대본영 근무 중 처음 조선과 악연을 맺었다. 일본군의 병참·통신망은 조선땅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의 허락 없이 군용전신선을 설치하거나 부산과 서울, 서울과 평양을 잇는 병참기지는 그가 추진한 일이었다. 병참망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대거 학살한 사건의 배후에는 실무책임자인 데라우치가 숨어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1사단 참모장과 참모본부 1국장을 지내고 1898년 초대 교육총감이 되었다. 교육총감은 육군대신·참모총장과 함께 군부의 최고직위에 속한다. 1900년에는 참모차장이 되었고, 1901년에는 제1차 가쓰라내각의 육군대신으로 러일전쟁을 지휘했다. 1906년에 대장 승진을 했고, 다음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군공으로 자작에 올랐다.

내각 총리는 조선총독으로 세운 공적을 인정받은 결과라고 한다. 1차대전 와중에 취임한 총리 자리는 편하지 않았다. 연합국에 줄을 선 일본은 중국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 태평양의 독일령인 마리아나와 마샬군도를 점령했다. 데라우치는 1918년 러시아혁명으로 집권한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시베리아출병을 결정했으나 쌀값 폭등으로 인한 내란 상태에 직면해서 총리직을 사임했다.

■ 조선인을 이등국민으로 법제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 때 일본은 교활했다. "합방이나 합병 중 어느 것이 좋을까, 아니면 병탄으로 부를까·" 민족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용어 선택에 고심을 했다. 마침내 찾아낸 말이 병합이었다. "한 나라를 집어 먹었다."는 병탄이 아니라 "합쳤다."는 말로 슬쩍 넘긴 것이다.

일본은 결코 대등하게 합칠 생각은 없었다. 매국단체인 일진회가 연방국가를 목표로 '합방운동'을 벌였지만 그것도 허상이었다. 한국을 완전히 폐멸시켜서 일본의 일부로 만든다는 방침은 철저했다.

열강도 간섭하지 않았다. 최강국 영국이 먼저 관세 및 치외법권만 인정되면 '병합'에 이의가 없다고 승인했고, 러시아도 "한국병합에 이의를 주장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면서 사전 통보만 요구하였다.

그래도 만약을 위해 '조선인의 자발적 청원에 의한 병합'이라고 내외에 선전했다. 그러면 새 영토의 주민은 당연히 일본인과 동일한 지위를 인정해야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예외법규를 제정해서 일본헌법의 적용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처음부터 열등한 지위를 부여하여 차별을 했고, 태형과 같은 구시대의 유물을 존속시켜 효과적인 탄압 방법으로 사용했다.

천황에게 직속된 조선총독은 총리만 경유하면 입법 행정 사법 모든 면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자리였다. 현역대장 데라우치총독은 조선인의 언론 결사 자유를 박탈하고, 모든 민족운동을 금지했다. 통치의 실행수단은 총독부 관리와 경찰업무를 겸하도록 한 헌병이었다.

■ 조선정복에 기고만장한 데라우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서명.

이런 서명이 든 문서로 조선은 암흑기를 맞는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국권을 강탈하는 '병합조약'을 말 그대로 무식하게 밀어붙여 신속히 체결하였다. 일본 외무 관료까지 그처럼 짧은 기간에 끝낼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이 모인 병합 축하연회장에서 데라우치는 기고만장하여 고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1533~1597),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를 거론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땐 침략에 실패했지만 자신은 조선 정복에 성공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더구나 고바야카와는, 1만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가려다가 저항에 막혀 경기도에 머물다가 벽제관에선 선봉에서 명군을 격퇴한 인물로서, 야마구치와 인연이 있는 모리씨(毛利氏)의 일족이었다.

105인사건 사진. 법정에 끌려가는 신민회원.

1911년 1월 데라우치는 민족운동의 싹을 말리기 위해 꾀를 냈다.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다고 날조해서 신민회원 600여명을 붙잡아 모진 고문을 가했다. 국권회복을 바랬던 지도층을 대거 투옥하여 공포상황을 조장한 것이다. 법관도 증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소된 105명 가운데 99명을 무죄로 판결했고 6명만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데라우치는 이 날조사건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부르는 것을 꺼려했던 모양이었다. 갑자기 '105인 사건'으로 부르도록 했다. 이를 비롯해서 태형과 위생검열 등 여러 폭력 조치로 민족 저항은 예기가 꺾어졌다.

■ 아들 육군대장 히사이치 비석도 옆에 있어

데라우치 히사이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아들 히사이치(寺內壽一, 1879~1946)도 원수 육군대장이었다. 황족이 아닌 경우로 유일하게 부자가 원수 육군대장이 된 사례이다. 일본육사 11기인 히사이치도 1927년 조선군참모장으로 와서 다음해 중장 진급을 했다. 아버지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의 공적으로 백작이 되었고, 아들은 조선군 경력으로 승진을 했다.

아들 데라우치는 군국주의 침략의 선봉에 섰다. 5사단장 등을 거쳐 대만군사령관으로 군림하다가 1936년 육군대신을 거쳐서 교육총감이 되었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후에는 북경 주둔 북지나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허베이성, 산둥성, 산시성 요지를 기습하고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것은 그의 지휘에 따른 결과였다. 1941년 남방군총사령관이 된 히사이치는 미군과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을 연파하고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점령했으며, 태국과 버마 및 남양군도로 진주하면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마지막은 비참했다.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밀리다가 결국 현지에서 패전을 맞는다. 싱가포르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고 연합군에게 포로가 잡힌 총지휘관이 그였다. 히사이치는 1946년 말레이시아의 심팡 렝감수용소에서 병사했다. 싱가포르 화교학살과 마닐라 대학살 등의 최고책임자인 이 1급전범은 수용소 생활조차 이겨내지 못했다.

■ 데라우치 부자의 비석과 자위대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비석. 그는 중국과 남방침략군의 총사령관으로서 1급전범이었다.

히사이치의 비석은 야마구치의 아버지 무덤 왼쪽에 있다. 나란히 있는 부자의 비석을 오가며 보고 또 보았다. 히사이치의 비문은 "원수 육군대장 데라우치 히사이치 묘(元帥 陸軍大將 寺內壽一墓)".

둘 다 원수라고 적혀있다. 원수는 대장 위에 따로 있는 계급이 아니라 육해군 대장 일부가 원수부에 속해서 대원수인 천황에게 군사업무를 자문하는 직책이었다. 1926년에는 망국의 왕 순종에게 예우 차원에서 원수라는 칭호를 주기도 했다.

데라우치 묘지 안내판.

데라우치 부자의 무덤 저 건너편에 일본 자위대의 야마구치 병영이 있다. 우연한 일이겠지만 데라우치 묘를 지키는 군대처럼 생각된다. 병영 옆에는 넓은 자위대 훈련장도 딸려있다.

새 총리 아베가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승격하고 교전규칙을 새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이 공약을 이행한다면 데라우치 부자는 지하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를 지켜볼 것이다. 천황이라는 존재도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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