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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군대에서 동원사단 장점배워 한반도 침략

39. 최강의 군대에서 장점을 배워오다
막말 막부와 번이 일본에 들여온 신식무기 후장총만 수십만정
메이지정부는 번병 13개대대와 군함 8척으로 정부군을 편성
1870년 육군은 프랑스식, 해군은 영국식으로 군사제도 정비

  • 웹출고시간2013.07.23 15:21:55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9. 최강의 군대에서 장점을 배워오다

■ 서구 군대에서 배워온 일본군

육군소좌 벳부 신스케(別府晋介)가 조선에 파견된 외교사절 일행에 끼어 몰래 들어온 해가 1872년이었다. 이 스파이는 2개월 동안 정탐하고 일본에 돌아가서 "한국을 유린하는 데는 일본군 2~3개 중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3년 뒤인 1875년 9월 메이지정부는 강화도 인근에 군함 운양호를 보내 해로측량을 하는 등 주권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도발을 감행했다. 조선의 군사력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였다.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된 대포.

외국 군함이 연해에 와서 휘젓고 돌아다니자 강화도에 설치된 초지진 포대에서 경고하는 포를 발사하였다. 그러나 구식포의 짧은 사정거리 때문에 포탄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자 운양호는 신식포로 초지진과 영종도의 포대를 공격해서 조선병사를 35명이나 죽인 후 크고 작은 대포 37문과 깃발 金鼓 등 전리품을 나가사키로 가져갔다. 이것은 사쓰마

조슈번이 가고시마와 시모노세키에서 영국 등에게 당했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운양호 함장이었던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1845~1929).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1845~1929) 소좌는 1863년 8월에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 포대를 공격했을 때 허벅다리 관통이라는 중상을 입은 병사였다. 그는 이 부상으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 함대의 파괴력과 기동력에 매료되어 완치되자 육군에서 해군으로 소속을 바꾸었다. 사쓰마번을 지배했던 정한론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12년 뒤 서구 열강의 함정과 똑같이 조선포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면 일본군은 어떻게 강력한 군대가 되었나. 메이지유신 이전에도 일본에는 막부와 여러 번에서 수입한 신식소총, 즉 라이플이 수십만 정이나 들어와 있었다. 칼과 창이나 활과 화승총이 아닌 이 소총으로 훈련을 받으면 누구나 쓸만한 병사로 변했다. 무기가 달라지면 전술이 바뀔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결국 수백 년 전통을 가진 사무라이 군대도 변화하였다. 막부와 번에선 또 증기선 군함도 유럽에서 사들였다. 열강의 함대를 바다에서 막는 방법은 군함을 갖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종래의 수군이 아닌 신식 해군이 설치되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만든 정부군은 이런 군대를 흡수한 것이었다. 1868년 조슈, 샤쓰마, 토사번의 번병 13개대대와 군함 8척으로 정부군을 편성했다. 그해 8월 뒤에 육군사관학교가 되는 병학교를 만들었고, 다음해는 해군조련소를 열었다. 1870년에는 육군은 프랑스식, 해군은 영국식으로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자국의 군사력이 약하다고 판단될 때 가장 빨리 강력한 군대를 갖는 방법은 선진강국에서 배워오는 것이다. 일본은 직접 구미에 사절단을 보내서 장점을 배워왔다. 군 장교들의 유학도 성행했다. 각종 무기도 들여와서 모방 생산을 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와 영국식 육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다.

■ 메이지정부의 군대 정비

1973년 육군은 6개의 진대(鎭台)를 설치했다가 1888년 그대로 사단으로 개편하였다. 프랑스식 육군을 프러시아식 육군으로 전환한 것이다. 진대가 지역수비를 주임무로 한다면 사단은 동원체제를 갖춰서 대외침략을 가능하게 만든 부대편제를 말한다. 여기에 궁궐 수비와 행사 때 의장병 역할을 주임무로 하는 근위사단까지 7개사단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사단 전환과 병력 확대의 목표는 조선 침략이었다. 세이난전쟁 후 메이지정부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단계를 하나씩 밟아갔다. 1875년 강화도 포격사건을 일으켜 개항을 강요한 후 이 목적은 순조롭게 달성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청군의 개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뒤 10년 간 '와신상담'하며 침략을 노리면서 군비를 확장해나갔다.

육군을 관리하는 조직은 육군대신이 주재하는 육군성, 참모총장이 통제하는 참모본부, 교육총감이 관할하는 교육총감부로 구성되었다. 육군성은 군사행정을 맡아 정책, 편제, 동원과 함께 예산을 관할했다. 군국주의 하에서 국가총동원체제로 만들거나 산업 자체를 군수 중심으로 키운 행정은 육군성이 주관하였다.

일본군은 군령 통괄, 작전계획 입안을 담당하는 참모본부를 강화시킨 것이 특징이다. 이것도 독일에서 배워온 것으로 처음에는 참모국에서 군사정보 획득과 군사지도 작성, 그리고 각국에 무관을 파견하는 일만 맡았으나 침략전쟁을 준비하면서 확대되었다. 그 해가 1888년이었다. 이미 이때부터 일본군은 조선과 대륙침략을 목표로 스파이를 파견하고, 모략전쟁을 준비하며, 역사왜곡까지 감행하는 등 본격적인 단계로 나아갔다.

황거 주변 일본군 부지에 세운 동상.

참모본부는 각 시대의 전쟁사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주요 전투를 연구해서 이를 해석하고 편찬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청에 파견했던 스파이인 사코 가게노부(酒·景信, 1850~1891)가 1883년에 가져온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주목해서 처음 연구한 것이 참모본부였다.

교육총감부는 감군부(監軍部)를 확대해서 1898년에 설치한 기구였는데 기병을 비롯 포병, 공병, 통신 등 각 병과별 교육을 관장해서 전문 군인을 양성하였다. 일본육군의 본부격인 육군성과 참모본부 그리고 근위사단은 도쿄의 황거(皇居) 주변에 집중 배치하였다. 황거 주변에 널찍하게 비어있는 공원은 모두 이런 부대 흔적들이다.

1893년에 정비된 사단 전시편제를 보면 유럽열강의 군대를 그대로 닮아있다. 총원은 18,492명으로 2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2개의 여단이 중심이 된다. 각 연대는 3개대대로 구성되어 1개사단의 보병대대는 모두 12개대대이다. 여기에 3개 중대로 구성된 1개 기병대대가 속해있고, 보병 병력의 절반 이하로 편제된 포병연대가 화력을 지원한다. 또 공병대대와 탄약, 병참을 맡은 치중병대대가 있고, 위생대와 야전병원도 딸려있다.

■ 혼성여단과 후비병

일본군 6개사단 배치도.

일본군이 최초로 대규모의 침략군을 파견한 것이 1894년 6월 18일 인천에 상륙한 5사단 혼성 제9여단이었다. 보병 2개 연대에 포병과 공병 그리고 기병이 딸려있어 혼성이란 이름을 붙였다. 여기에 병참부대가 포함되었고, 위생대와 야전병원도 같이 들어왔다. 혼성여단은 화력과 병력 증강이 필요할 때 임시로 만든 편제이다.

이 9여단이 서울에 들어와 경복궁을 침범하고 성환전투를 치뤘다. 한국인으로선 잊지 못할 치욕을 안겨준 부대이지만 서울에서 두 번이나 청군에게 밀려난 일본군이 처음 전투에 승리했다고 선전이 대단했다.

일본군 주력이 평양과 여순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일 때 조선 내부의 수비나 동학농민군 진압을 맡았던 부대가 후비병이었다. 후비병제도는 당시 서구에서 채택하던 것으로 일본도 모방하였다.

병역기간은 매우 길었다. 징병령을 내렸던 1873년에는 7년 근무제로 상비군은 3년, 제1후비군은 2년, 제2후비군은 2년이었다. 1879년에는 상비군 3년, 예비군 3년, 후비군 4년이었는데 1883년 개정된 제도는 상비병이 현역과 예비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3년과 4년을 근무해야 했고, 후비역은 5년이었다. 군대에 들어가면 모두 12년 간 매여야 했다.

1894년 전쟁이 일어나자 예비군을 마친 사람까지 다시 징집해서 후비군으로 종사시켰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후비보병 제19대대는 그런 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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