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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아시아 침략 수법에는 공식이 있었다

35. 조선침략과 동일한 일본의 동남아 침략
조선 침략과정은 독립국 → 보호국 → 식민지
동남아는 독립지원 특무공작 → 점령 → 식민지
태국에 설치한 F기관이 자유인도군을 만든 산파
첩자 하리마오, 일본에서는 영화*만화로 우상화

  • 웹출고시간2013.06.25 19:42:2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5. F기관과 말레이의 하리마오

■ 하리마오란 말이 유행한 까닭

인도네시아로 파견된 보도반원 오노사에오(小野佐世男, 1905~1954)의 점령지 그림.

일본제국의 침략 수법은 비슷했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을 청에서 떼어낸 다음 보호국으로 만들고 국권을 탈취해서 '무단통치'로 억눌렀다. 타이완은 청일전쟁 노획품으로 청에서 할양받아 '엿과 채찍(飴와 鞭)'으로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간 다스렸다. 중국 동북지역은 관동군이 침략해서 중국에서 독립시킨다며 만주국을 세운 뒤 '모략과 폭력'으로 1932년부터 1945년까지 13년 간 지배를 했다.

동남아에서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일본군의 말레이반도 공격은 진주만을 기습한 6시간 후인 1941년 12월 8일 새벽 1시 30분(한국시간)에 전격 개시하였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었다. 이것을 일본에서 자존자위(自存自衛)를 위한 전쟁이면서 식민지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동남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고 펼쳤던 모략전쟁을 구미열강의 식민지를 분쇄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면 듣는 사람이 세뇌될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스스로 자기 말에 최면이 되기가 쉽다. 그런데 그것이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사교육이라면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우익정치가들이 상습적으로 하는 망언이 이런 교육 때문이라면 더 그렇다.

■ 일본군 F기관과 자화자찬

일본군 스파이의 전설은 러일전쟁 때 스웨덴 주재 무관으로 러시아 반체제파를 지원해서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1864~1919)였다. 그런 방식이 동남아에서도 활용되었다.

후지와라 이와이치가 쓴 수기 『F기관』.

참모본부 모략과의 선발대는 후지와라 이와이치(藤原岩市, 1908~1986). 1931년 육사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서 보낸 군대생활 14년 중 정보계통에서 일한 시기는 약 5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F기관을 이끈 발군의 모략가였다.

F기관이 결성되고 활동한 곳은 태국의 방콕이었다. 이른바 남방작전 즉 동남아 침공을 위한 선전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가 참모본부 모략과에 들어간 해는 1939년, 스파이 양성기관인 나카노학교 교관을 겸하면서 남방작전의 사전조사를 맡았다. 그는 정보 수집을 위해 민간인 수십 명을 촉탁으로 동원하였는데 결국 현지 공작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군대 침공에 앞서 기자를 비롯 작가와 예술가를 현지로 데려가서 사상전을 벌였다. 이른바 보도반 활용을 중요시한 것이다. 전쟁 동영상, 전투 사진, 점령지 그림 등 지금 남아있는 보도반의 작품은 전쟁을 미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F기관은 후지와라(Fujiwara)와 자유(Freedom), 우정(Friendship)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모략기관의 최대 성과는 말레이시아 내의 90만 인도인의 지지를 받고, 영국군 포로 중에서 인도인을 설득해 반영 인도자유군을 만든 것이다.

상반신은 사자, 하반신은 물고기 모습의 상징물 머라이언과 싱가포르 야경.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 후 후지와라는 영국과 호주 병사 포로를 빼고 인도인 병사 4만 5천명을 따로 모아 민족심에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42년 2월 17일 마리너만 인근 파러공원에서 한 이 연설(The Farrer Park address)은 일본의 지도 아래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후지와라가 쓴 『F기관』의 서문에 이런 요지가 있다. "백인의 아시아 예속지배를 거부하고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건설하고 '아시아인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사상전의 핵심이었다."

"나는 근시안적 모략공작을 경계했다.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 여러 민족의 비원에서 일어나는 자주자발적인 봉기를 촉구했다. 이야말로 점령지정책에 성과를 기대할 수 있고, 대동아전쟁의 대의명분을 얻을 것으로 확신했다."

"전쟁 중과 전쟁 후 인도, 파키스탄, 네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북수마트라에서 많은 친구와 지기를 얻었고, 그들과 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들 여러 민족은 전후 자유와 독립의 영광을 얻었고, 일본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 여세는 중동과 아프리카 민족해방과 연결되며, 수백 년에 걸친 백인지배의 세계사에 결정적 변혁을 가져왔다."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역사발전의 공을 일본군 특무공작의 성과로 보는 자화자찬은 지나치다. 열강의 식민지를 일본제국이 강탈하려고 했던것이 비밀전쟁의 핵심인데 이를 호도해서 오로지 동남아와 아랍지역 그리고 아프리카를 해방시킨 공적처럼 말하고 있다.

■ 말레이의 하리마오 다니 유타카(谷豊)

F기관의 중요한 당면 목표는 반영 협력세력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동남아 각국에는 인도독립연맹이나 말레이와 중국인이 만든 반영단체가 존재했다. F기관은 이런 조직과 접촉해서 침공 사전공작을 했고, 침공 후에는 군사작전에 협력하도록 했다. 그런 대상 중 특이한 존재가 하리마오였다.

말레이의 하리마오로 유명한 도적떼 두목은 일본인 다니 유타카(谷豊, 1911~1942)였다. 그는 후쿠오카 태생인 일본인으로 2살 때 일가와 함께 말레이시아 북동부의 테랭가누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이발사로 일했다. 말레이문화 속에서 성장한 다니 유타카는 후쿠오카에 있는 조부모에게 가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다시 말레이시아로 가서 이슬람교에 귀의했다.

그런데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1931년 20세가 되어 징병검사를 받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슬람교도인 그는 신성한 황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로 판정을 받아 불합격되었다. 생업을 위해 일본의 고무공장에서 일하던 그를 분격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만주사변은 동남아의 화교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화교들이 배일폭동을 일으켰다. 공격 대상은 일본인들이었다. 아버지의 이발소는 습격을 받고 파괴되었다. 그 와중에 다니 유타카의 누이동생은 잡혀서 참수되었다. 이 사태 후 일가족이 모두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니는 1934년 7월 혼자 말레이시아로 돌아갔다.

그는 말레이인 친구들과 작당해서 도적으로 변신했다. 이 도적의 습격 대상은 부유한 화교였다. 관헌의 체포를 피해서 여러 해 동안 말레이반도를 전전하며 도적질을 계속했던 그는 하리마오로 유명해졌다. 하리마오는 말레이어로 '호랑이', 또는 '용감한 호랑이'란 의미이다. 말레이어와 태국어에 능숙하고 행동이 대담하면서 경건한 이슬람교도였던 그를 F기관이 주목하였다.

■ 전쟁 전후 말레이 하리마오의 활약

말레이 보도반원종군기.

하리마오는 말레이시아 북부의 코타바루와 태국 남부의 나라티와 두 지역을 무대로 활동했다. 지금도 이 일대에서 전설적 영웅으로 구전되는 그는 부하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빼앗은 재물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들의 편을 들어 그런 평판을 얻었다는 것이다.

말레이의 경찰이 하리마오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자 태국 남부로 가서 피신하였다. 결국 1941년에는 태국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 하리마오를 F기관이 보석금을 내서 풀어준 다음에 설득해서 협력을 요청했다. 일본인이면서 말레이인이었던 그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일본의 첩자와 테러분자로 변신해서 혁혁한 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공격하기 전에는 영국인 광산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등 간첩 활동을 벌였다. 개전 이후의 활동은 눈부셨다. 영국군 요새 공사의 태업, 기관차의 전복, 교량 파괴와 전화선 절단, 말레이 용병 이탈 선전, 영국군 정황보고 등 거침이 없었다. 일본군이 침공해서 내륙으로 들어갈 땐 영국군이 설치한 다리 파괴용 폭발물을 속속 제거하였다.

두드러진 활약이 영국군이 방어요새를 건설하는 공사장에서 벌인 태업이었다. 하리마오의 도적떼들이 인부로 들어가 공사 현장을 좌우했다. 자재를 유출하거나 장비를 고장 내서 진척이 되지 않도록 했다. 이런 날림공사 때문에 일본군이 공격하자 겨우 2일만에 요새의 방어선이 뚫렸다.

일본군이 진격해오자 영국군 병영은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하리마오가 뛰어들었다. "나는 하리마오다.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 때문에 싸우고 있나. 영국군은 우리 말레이인의 적이고 일본군은 말레이인 편이다. 일본군이 영국군과 싸워 승리의 진군을 계속하고 있다. 총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라." 그가 이렇게 설득하자 전원이 함성과 함께 총을 버렸다고 한다.

하리마오는 말라리아에 걸려 30대 초에 싱가포르의 일본군 병참병원에서 죽는다. 격렬한 삶을 살고 간 그는 일본에서 영웅시되었다. '말레이의 하리마오'는 1943년과 1989년 두 번이나 영화 소재가 되고, 만화와 소설이 쏟아진 것은 물론 1960년에 '쾌걸 하리마오'란 TV 프로그램으로 널리 소개되었다.

■ 미얀마의 사례가 주는 교훈

"사자에게 먹히는 것이 무서울까. 호랑이가 더 무서울까."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그것을 잘 드러내는 사례가 미얀마에 있다. 또 일본의 특무공작이 세계의 식민지를 사라지게 했을까. 아니다. 미얀마가 독립한 것은 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패전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제국이 승리했으면 아시아의 암흑기는 끝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얀마의 아웅 산(1915~1947)은 반영 혁명가이며 군인이었다.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 특무부대 미나미기관(南機關)의 지원을 받아 하이난 섬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30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1942년 미얀마로 돌아왔으나 고국은 영국보다 잔인한 방법으로 통치하는 일본군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웅산은 다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FL)을 결성했다.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전개하던 중 패전을 한 일본군이 미얀마에서 철수하자 영국이 미얀마를 재점령하였다. 아웅 산은 1947년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와 담판을 벌여 독립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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