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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中에 스파이 파견…도둑측량으로 지도를 만들다

32.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상)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이 식민지 독립에 기여?
일본군 참모본부 제8과의 이름은 모략과(謀略課)
일본군 스파이들, 청일 러일전쟁 땐 유능한 지휘관

  • 웹출고시간2013.06.04 19:35:0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2. 일본군 특무기관의 공작과 비밀전쟁(상)

■ 일본군 특무기관의 말레이반도 파견

세상에는 음지에서 일어난 사건도 함께 보아야 할 일이 많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임팔전투에 투입시켰던 자유인도군이 그렇다. 자유인도군은 일본군 특무기관의 작품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노리면서 영국과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독일과 한창 전쟁 중이라서 전력을 기울여 식민지를 방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식민지는 전쟁수행에 필수인 인력과 물자 공급지였기 때문에 대응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일본군은 영국군 조직에서 인도병사를 이간시키려고 했다. 당시 영국군에 편입된 인도인 지원병은 3백만 명이었다. 이제 군사력을 보면 대영제국이란 말은 맞지 않고 영국인도제국이라고 해야 적합했다.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에 주둔한 인도병사를 꾀어내면 영국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일본군 참모본부 제2부의 제8과가 나섰다. 제8과는 모략과(謀略課)였다. 1937년 중일전쟁에서 첩보조직의 필요가 커지자 국제정세와 기밀정보의 수집 분석과 선전공작, 그리고 모략활동이 임무인 8과를 신설했다. 이 모략과가 인도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이차대전 평가가 기이하다. 이런 공작이 역사발전에 기여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인도국군을 일본군 특무기관의 도움 때문에 창건되었다고 하고, 베트남이나 미얀마에서도 특무기관이 독립에 기여했다고 한다. 납득 되지 않는 주장이고, 역사를 왜곡하는 파렴치한 말이다. 식민지를 다른 제국주의 군대가 빼앗으려고 했던 모략전쟁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일본군 특무기관을 조사하면 그런 선전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된다. 일본군 스파이들과 특무기관 그리고 그 두목들이 수행한 이른바 '비밀전쟁'을 알아보고, 동남아 각국에서 활동한 특무조직을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일본에서 요란한 첩보물 출판

일본제국의 특무기관과 첩보전을 다룬 책들

1962년에 처음 007영화가 나왔을 때 인기가 엄청났다. 상상하지도 못한 줄거리가 이어지면서 대담한 추격전과 폭파 장면이 눈을 압도하였다. 세계 각지의 도시에서 미녀들과 어울리는 코믹 장면도 흡인력이 있었고, 매번 소개되는 기기묘묘한 무기가 관심을 끌었다. 007영화는 지금까지 무려 23편이나 제작되었다.

첩보물은 영화나 소설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관심을 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짜릿짜릿한 장면이나 '본 시리즈'의 갈수록 상상력이 커지는 음모는 극장을 찾게 만든다. 그러나 그보다 다큐멘터리는 더 놀랍다. 냉전시대뿐 아니라 2차대전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전직 스파이의 자서전은 그 자체가 귀중한 역사가 된다. 또 소설가나 기자가 이들을 면담해서 내는 전기물도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다.

출판대국 일본에서는 첩보물이 많이도 나온다. 그중에 일본제국의 첩보원이 대륙 침략과 태평양전쟁 동안 음지에서 활약한 내용을 소개하는 책들이 있다. 일부만 살펴봐도 대단한 스토리텔링 자료들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상무대 돌비석

우선 스파이 양성기관인 나카노학교가 주제가 된다. 『육군나카노학교 - 정보전사들의 초상』 『육군나카노학교 극비계획 - 신자료 신증언으로 밝혀진 진실』 『비록(秘錄) 육군나카노학교』 『실록 대일본제국 육군나카노학교』 『육군나카노학교 - 비밀전사의 실태』

다음은 중국과 동남아에 근거를 둔 스파이조직을 다루고 있다. 『특무기관』 『F기관』 『대일본제국의 첩보기관』 『특무기관장 고노미 우지토시』 『만주의 정보기지 할빈학원』 『환상의 특무기관「야마」 - 쇼와사발굴』 『대일본제국의 첩보기관』 『아편왕 - 만주의 밤과 안개』 『아편과 대포 - 육군쇼와통상의 7년』 『검은 기관』

또 육군나카노학교 설립자인 이와구로 히데오(岩畔豪雄, 1897~1970)가 세운 노보리토(登戶)연구소를 밝혀낸 것도 있다. 『모략전 육군노보리토연구소』 『육군노보리토연구소의 진실』 『「사카다기관」 출동』 『육군노보리토연구소 ― 은폐된 모략비밀병기개발』 『육군노보리토연구소와 모략전 - 과학자들의 전쟁』 『노보리토연구소에서 생각하는 전쟁과 평화』

세계의 스파이조직을 일본 특무기관과 함께 소개하고, 전후에 특무기관이 되살아난 과정을 전하는 것도 있다. 『검은 기관 - 전후 특무기관은 어떻게 부활했는가』

■ 일본군 참모본부가 만든 조선지도

일본제국의 육군 참모국에서 1894년에 제작한 조선전도(朝鮮全圖)

일본군의 대륙침략과 모략전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조선과 청국에 간첩을 집중 파견한 것은 강화도조약 직후부터였다. 이미 침략 목표는 정해졌고, 모략전을 시작한 것이다. 초기 모략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상국가의 실정을 파악하는 것이었고, 그중 정확한 지도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일본 육군 참모국은 정보수집 부서를 두면서 간첩대(間諜隊)라고 했다. 아마 영어나 독일어를 번역했겠지만 노골적으로 간첩 임무를 밝혔다. 뒤에 참모본부 2부로 개명하는데 주요 임무가 군사정보와 지도 확보였다. 측량국은 평시에 지리조사를 하다가 유사시 간첩활동을 병행하는 부서였는데 여기서 스파이를 조선과 중국에 보내 군사지도를 만들었다.

미국의회도서관에 소장된 1880년대의 조선과 중국지도가 곧 간첩대와 측량국에서 만든 것이다. 패전국 일본에서 미군이 압수한 기밀자료 중 일부인 이 군사지도는 외방도(外邦圖)라고 했는데 일본지도 외에 침략대상인 외국지도를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중국지도가 236점이고 조선지도는 109점이 있다.

조선지도의 제작에서 두드러졌던 인물이 카이즈 미쓰오(海津三雄, 1853~·)이다. 그는 1877년 조선에 파견된 이후 측량임무를 띤 군함 다카오마루(高雄丸, 1191톤)를 타고 해도를 작성하거나 내륙을 다니면서 육지측량에 종사했다. 1887년 예편할 때까지 팔도 각 지역을 다니며 만든 군사지도는 정밀했다. 그는 조선 전문 간첩의 원조로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 현역에 소집되어 평양병참사령관을 맡았고, 이후 통감부 촉탁으로 철도 부설에 간여한다.

갑신정변 때 청파동에서 타살된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대위도 평양과 제물포 그리고 마포 등 서울 근교를 측량했던 간첩이었다. 카이즈와 이소바야시 외에 미우라(三浦自孝), 오카(岡泰鄕), 추카다(柄田鑑次郞) 등 모두 6명이 1883년부터 1887년까지 각지를 누비면서 지도를 작성했다. 이들이 만든 지도를 합친 것이 1894년에 제작한 「조선전도」이다.

1894년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작전에서 지리를 몰라서 헤매지 않았다. 후비보병 제19대대가 지나간 노선을 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바로 스파이들이 만든 지도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중국에도 1877년부터 일본군 스파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1879년에는 베이징, 텐진, 광둥, 푸조우(福州), 한커우(漢口) 일대에 8명이나 보내 몰래 측량을 했고, 1880년에도 8명을 뽑아 베이징과 푸젠성 샤먼(厦門), 그리고 북부와 남부로 잠입시켰다. 이 때 만든 지도는 일본군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요긴하게 사용한다.

■ 도둑측량 스파이가 러일전쟁시 일본군지휘관

일본군 스파이가 도둑측량해서 만든 지도(일본 논문 인용)

이런 도둑측량과 군사지도를 만든 스파이들은 누구였을까. 대개 일본육사를 나온 중위에서 대위급의 소장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10여년 뒤 벌어진 청일전쟁과 20년 뒤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참모나 지휘관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오가와 마타지(小川又次, 1848~1909)! 그는 고쿠라번의 사무라이 출신으로 육사의 전신인 병학료(兵學寮)를 나와 세이난전쟁에 참여한 뒤 소좌로서 참모본부에 배치되었던 인물이다. 1880년 4월에서 7월까지 중국 북부 일대로 잠입해서 도둑측량을 했고, 1885년에는 참모본부 제2국장으로 외국 병제와 지리 조사를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다. 육군의 스파이 총두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코스인 육군대학교에 들어가 독일인 교관 메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 1842~1906)의 강의를 듣는데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와 함께 우수 교육생으로 평가받았다. 오가와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제1군 참모장으로 발탁되어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를 보좌했다. 1904년 러일전쟁 때는 4사단장으로 뤼순전투와 료양회전(遼陽會戰)을 치른 후 대장 진급을 하였고, 자작작위까지 받았다. 그의 사위가 원수 겸 육군대장으로 참모총장을 지낸 스기야마 겐(杉山元, 1880~1945)이다.

일본군 스파이들은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밀정이 아니었다. 우선 그들은 유능한 소장장교 중에서 선발되었다. 현지 임무가 완수되면, 정보계통의 직무와 지휘관 보직을 번갈아 맡겼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지리를 잘 아는 곳에서 유능하게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다.

야마네 다케스케(山根武亮, 1853~1928)는 조슈번 사무라이 출신으로 번에서 세운 학교인 메이린칸(明倫館)에서 배웠다. 그리고 경시청 순사로 있다가 육사 1기생으로 입학해서 석차 3위로 졸업하였다. 순사를 지낸 그는 중국 스파이에 적임이었다. 베이징 부근 5만분의 1 군사지도는 그의 공적 중 일부이다. 청일전쟁 때는 제2군 병참참모장으로 활약했고, 청국주둔군사령관을 지냈다. 청국공사관에 소속되어 정보조직을 지휘하던 그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인천에 주재한 임시군용철도감으로 병력과 병참 수송을 책임졌다. 8사단장과 근위사단장을 지낸 그는 남작 작위를 받고 10년간 귀족원의원으로 일했다.

고이즈미 마사야스(小泉正保, 1855~1917)도 순사 출신이다. 육사 1기생으로 졸업한 후 참모본부에 소속되어 청국에 파견된 뒤 한커우(漢口)와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스파이짓을 했다. 러일전쟁 때 24여단장으로 뤼순 일대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8사단장을 지낸 후 중장으로 예편했다.

시마무라 다테오(島村干雄, 1856~1910)는 1879년부터 두 차례에 걸쳐 4년 동안 청국에서 첩보임무에 종사했다. 러일전쟁 때는 12여단장으로 러시아군과 일대회전을 치룬 료양회전에 참가한 후 여러 지역을 순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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