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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동학은 물론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

강화도 현장에서 재빠른 머리회전으로 판을 친 부사(副使)
조선침입 앞잡이로 실무밝았지만 1인자 앞에서는 조연행세
조선엔 불평등조약 체결 강요, 구미엔 불평등조약 개정 애걸

  • 웹출고시간2012.12.11 17:41:4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10. 이노우에, 동학은 물론 명성황후 시해에도 관여

만년의 이노우에 가오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그가 왜 조선과의 악연을 자원했는지 알 수 있다.

"이노우에의 장점은 머리회전이다. 일단 분규가 일어나면 전광석화처럼 대처해서 수완을 보인다. 어떤 어려운 문제에도 임기응변하는 재주를 갖고 있다. 성격은 급하지만 싫증을 잘 내지 않으며 공명심에 담박하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부탁받으면 나쁜 직무라도 열심히 일했다. 세상의 악평은 그런 점에서 나온 것도 있다."

메이지정권이 당면 목표로 삼은 조선 침략의 앞잡이로선 실무에 밝은 그가 적임자였다. 불평등조약 체결부터 개화파정권의 친일 정책과 최대 반일세력인 동학농민군 제거까지 이노우에 가오루가 책임을 졌고, 명성황후 시해에도 마무리에 등장했다.

조선의 국권 탈취는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2대 소네 아라스케(1849~1910), 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가 담당했다.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그렇게 50년만에 조슈번의 사무라이들인 야마구치 인맥에 의해 완수되었다.

■ 유다온천의 메이지유신 사적지

야마구치 시청의 남서쪽에 대형 호텔과 여관들이 늘어선 곳이 있다. 유명한 유다(湯田)온천이다. 온천의 상징인 흰여우가 유다온천역 앞에서 커다란 조각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600년 역사를 가진 이 온천은 논 한 가운데 용출하는 금빛 원천에서 시작하였다. 밤마다 흰여우가 찾아오는 것을 한 스님이 발견했다는 전설로 온천의 역사는 시작된다.

유다온천의 마쓰다야 사적비.

하지만 더 중요한 근대의 역사가 유다온천에서 이야기된다. 이른바 메이지유신의 지사들과 관련된 유적들이 여기에 있다. 골목을 거닐다 보면 여기저기 표지가 나온다. 어느 찻집 자리에는 요시다 쇼인이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밀의한 장소라고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격동기에 분주히 찻집을 드나드는 사무라이들이 상상된다.

어느 여관은 쇼인의 문하생으로 근대법을 정비한 초대 사법대신 야마다 아키요시(山田顯義)의 처가였다고 한다. 얼마나 출입이 잦았던지 반란 모의장소인 여관집의 딸과 사귄 모양이다. 메이지유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감성이 흔들릴만한 곳이다.

1867년 유신 3걸인 기도 다카하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토시미치가 모여 사쵸동맹을 확인한 마쓰다야(松田屋). 현재 고급 호텔로 사용한다.

국가가 관리하는 사적(史蹟)으로 격상된 장소도 있다. 마쓰다야(松田屋) 여관이 대표적이다. 1867년 어느 날 여기서 유신의 3걸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여 사쵸동맹을 확인하고 막부 공격을 협의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급호텔로 변해서 메이지유신 문서를 전시한 자료실까지 설치하였다.

이 호텔의 방 이름은 특이하다. 신관 4층의 가장 넓은 방부터 신사쿠, 쇼인, 히로부미라고 이름을 붙였고 3층에는 가쓰라와 료마의 방이 있다. 호텔 온천의 노천탕은 흰여우탕이고, 가족탕이 유신의 탕이다. 방이건 욕탕이건 이노우에 가오루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길 건너편 골목에 그의 집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 독직사건 후 강화도조약으로 재기

야마구치시 유다온천의 큰 길 모습.

야마구치로 조슈번의 번청을 이전한 후 유다온천에는 조슈의 근왕파뿐 아니라 사쓰마와 도사번의 인물까지 모여들었다. 신진 과격파들이 번의 실권을 장악하자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그리고 사카모토 료마가 막부타도를 모의하러 유다온천을 찾아온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에게 그런 상황이 기회가 되었다. 소장파로서 중요 인물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거물급이 된 기도 다카요시와 다카스기 신사쿠의 도우미로 신뢰를 받았다.

막부는 조슈번에 타격을 주기 위해 무기 도입을 금지하였다. 그러자 사카모토 료마가 사쓰마번이 무기를 구입하는 것처럼 위장하자는 꾀를 냈다. 그때 총과 함정을 수입하는 실무를 맡은 사람이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메이지정권에서 그는 갖가지 난제를 극복하며 재정과 외교의 거물로 커나갔다. 통상과 조폐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은행 설립에도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 발생한 독직 사건으로 공격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때 그가 할 일이 생겼다.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서 해안을 방어하는 조선군의 포격을 야기한 뒤 무력으로 협박하며 수호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야마구치 인맥인 그를 이토 히로부미가 전권부사로 밀었다.

■ 회담장에서 효과 본 머리회전

메이지혁명을 모의한 찻집의 하나인 린야도(臨野堂) 돌팻말.

1876년 이노우에 가오루가 강화도에서 한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조약 체결까지 전 과정은 메이지 정권이 꾀를 짜서 밀어붙였기 때문에 전권대신도 아닌 부사가 한 일을 따로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대표 신헌 전권대신이 쓴 『심행일기』를 보면 판을 좌우하던 일본인의 발언들이 나온다. 그것이 대부분 이노우에의 말이 아닌가 한다.

강화도에 도착한 일본대표단은 군대를 앞장세워 상륙했다. 그리고 회담장 주변에서 훈련을 하며 협박 분위기를 조성한 뒤 초안을 제시하였다. 서구 열강이 시작한 근대외교의 경험이 없는 조선 관리는 조약문이 갖는 허점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은 머리회전이 빠른 이노우에 가오루가 놓칠 수 없는 무대였다.

우선 조선대표의 자격에 시비를 걸었다. 조정과 논의하면서 회담을 진행하자 영의정과 직접 만나겠다고 하였다. 또 조선이 의례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옥신각신했다. 조약문에 국왕을 직접 기재하고 어보를 찍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심각한 조약 내용에는 초점을 무디게 하였다. 물론 조정에서 검토하고 최종 재가한 내용이 조약으로 체결되었지만 관세를 설정하지 않은 것 등은 그의 솜씨였을 것이다.

조선은 영사재판권이나 연안측량권 부여 그리고 개항장 설정으로 뒤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일본이 서구열강에 당한 영사재판권 등을 조선에 슬그머니 덮어씌운 것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연표에는 강화도 조약 때문에 일본의 힘으로 조선이 독립국이 되었다고 써놓았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전근대의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 세계였다. 신성로마제국이 중심인 유럽이나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했던 아랍도 그러했다. 근대에 들어와 모든 나라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근대화는 지구촌이 하나의 문화권으로 전환되면서 각국이 구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침략 대상으로 목표한 조선과의 조약문에서 자주국으로 쓰게 했다고 공치사하는 것은 이후 침략의 역사를 보면 우스운 일이다.

■ 2인자로 수명을 연장한 이노우에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는 부대신 이노우에보다 4살이 적다. 고비마다 그를 챙겨 되살려놓은 이토보다는 이노우에가 5살이나 많다. 육군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보다는 2살이 많다. 그는 평생 이들의 조력자로 지낸 조연 체질이었다.

조선에서 공을 세운 그는 1879년 외무경에 오르고 곧 외무대신이 된다. 그의 최대 임무가 구미 열강에게 애걸해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역설도 그런 역설이 없다.

아시아를 적대하며 시작한 메이지정권은 위선으로 출발한 정권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의 메이지를 암울하게 만든 인물의 하나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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