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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만주 진출 기지로 울릉도 침략 계획, 사카모토 료마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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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만주 진출 기지로 울릉도 침략 계획, 사카모토 료마

일본 고치의 바다에서 료마가 서양 위협을 막는 방법을 맹렬히 연구
일본 사무라이로 흑선에 대응해 양이운동·유신·부국강병 등 모색
33살 젊은 나이에 정적에게 암살… 짧은 생애 자체가 '일본의 전설'

  • 웹출고시간2013.03.12 15:57:39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22. 조선·만주 진출 기지로 울릉도 침략을 계획하다 - 사카모토 료마

가쓰라 해변 전경

사카모토 료마가 1867년 3월 시모노세키에서 사업을 하던 조슈번의 사무라이 인도 노부루(印藤聿, 1831~1911)에게 보낸 편지에 조선 땅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홋카이도와 함께 다케시마(竹島)를 개척하겠다는 구상을 전한 것이다. 이 다케시마는 독도가 아니라 울릉도를 말한다.

인도 노부루는 료마와 조슈번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데 뒤에 도요나가 쵸키치(豊永長吉)로 개명하는 인물이다. 『료마의 편지(龍馬の手紙)』에 실린 원문을 보면 조슈번에 속한 3명의 대부(大夫)와 이미 이 계획을 논의했다고 한다.

도쿠가와막부는 사무라이가 지탱하는 집권체제였기 때문에 막부가 해체되면 수많은 사무라이들의 생존할 길이 없어진다. 홋카이도 개척은 이들을 홋카이도의 미개척지에 보내자는 말이었다. 이 계획은 메이지정부가 채택해서 둔전병 형태로 실현되었다.

울릉도 침범 계획은 뚱딴지같은 말이었으나 구체성을 가졌다. 10개월 기한으로 4백금을 빌려서 목재와 농작물 그리고 해산물을 잘 아는 사람들을 모집하고 증기선에 태워 울릉도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조선 땅인 울릉도를 개척하겠다는 행위는 신국(新國), 즉 식민지를 목표로 한 침략적 구상이었다.

이런 생각은 요시다 쇼인의 이른바 '다케시마(竹島)개척론'에서 비롯하였다. 쇼인은 조선과 만주를 겨냥하는 침략에 적합한 기류지로서 울릉도를 꼽고 제자들에게 세뇌시켰다. 이에 따라 1860년에는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오무라 마쓰지로(大村益次·, 1824~1869, 村田·六가 개명)가 연명으로 「울릉도 개척에 관한 건언서」를 막부에 제출한다.

오무라는 징병제를 실시해 근대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로 야스쿠니신사 한 가운데 있는 큰 동상의 주인이다. 이들과 다카스기 신사쿠가 료마에게 관련 정보를 전한 대부들로 추정된다.

그런데 일본 최초의 증기선 충돌사건이 1867년 4월에 일어나 이 침범 계획은 추진할 수 없었다. 료마가 이끌던 가이엔타이(海援隊)의 배인 이로하가 나가사키를 떠나 오사카로 가는 도중에 기슈번(紀州藩)의 증기선과 충돌해서 침몰한 것이다. 료마는 기슈번의 책임이라면서 배상금을 강요해 거금 7만량을 받아냈으나 원한을 사게 된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료마는 그해 겨울 막부 수호를 책임졌던 아이즈번(會津藩)의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고치시 남쪽의 가쓰라해변에 있는 「사카모토 료마기념관」, 태평양을 보고 있다.

■ 고치현 해변의 료마기념관

시고쿠섬 고치(高知)시의 남쪽 끝에 아름다운 해변 가쓰라가 있다. 여기서 보는 바다는 시원하다. 일본의 남쪽바다가 태평양이라는 사실은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난다. 말 그대로 망망대해가 이어진다.

1853년 6월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제독이 태평양을 넘어서 에도만까지 흑선 4척을 이끌고 온 사건은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편전쟁의 여파였다. 그것은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전해진 서구문화와는 다른 성격이었다.

청국이 영국에게 패배해서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고 홍콩을 빼앗긴 사실은 동아시아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크고 작은 실전이 계속된 일본에서 흑선으로 상징된 구미 열강은 칼을 차고 다니던 무사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양이운동이란 대의 앞에서 막부와 협력했으나 미국에 이어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와 수호조약을 맺은 후에는 개명한 무사계급은 막부를 일차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때 약관의 하급무사들이 놀라운 활약을 한다.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중 사카모토 료마가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 주선과 막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넘기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중간에서 주선했다. 메이지유신이 현대 일본인이 갖는 자긍심의 원천이라면 료마는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료마기념관 전시실 모습

가쓰라해변의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사카모토 료마기념관」은 태평양을 보고 있다. 일본에선 태평양을 건너온 위기에 적극 대처하려는 시도가 성공했으나 한국근대사에서 보면 애석하게 그 시기도 늦었고 방법도 서툴렀다. 결국 먼저 근대화한 일본이 침략하게 된다.

■ 역사박물관인 료마기념관 전시

한국과 일본의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을 비교하면 갑자기 한국이 안쓰럽게 보인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명확하다. 건물 설계, 전시 내용, 전문성 등에서 한국이 뒤떨어진다. 관련 전문가들과 공무원들이 배워온다고 많이도 일본에 가지만 달라지는 게 별로 없다.

가쓰라 해변의 료마기념관은 설계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료마탄생 150주년 공모작으로서 전국에서 모금하여 1991년에 완공했다. 외형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기선 모양을 하고 있으나 어딘가 어색하다. 그 좋은 언덕에 세운 건물로서는 제 값을 못하고 있다. 옥상은 전망이 좋지만 전시실 규모나 내부 구조와 동선도 그저 그렇다.

그러나 관람객들은 진지하다. 지난 1천 년 간 일본 최고의 정치인으로 평가된 인물을 찾아온 것이다. 전시장과 벽면 패널을 보고 또 본다. 말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설명문과 사진 그리고 지도로 표현한 내용은 볼만하다.

료마기념관은 동일 주제로 만든 여러 기념관 중 하나이다. 그래서 료마가 사용했다는 권총과 가이엔타이(海援隊) 규약을 제외하면 특별한 유물이 없다. 료마기념관은 역사박물관이다. 고고학박물관은 매장유물을 발굴해서 전시하는 것이라 실물 자료로 꾸며져 다채롭지만 역사박물관은 주로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는 패널이 위주가 된다.

패널의 수준은 축적된 연구의 질이 좌우한다. 일본의 박물관이 세계 정상인 것은 깊은 연구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료마의 가계와 생가의 구조, 성장기와 혁명의 발자취, 편지와 어록 등을 보기 쉽게 정리해서 료마 연구의 전문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쉽게도 이 전시실은 료마의 울릉도 침략계획을 보여주지 않는다. 메이지유신이 대외침략을 전제로 시작한 역사적 사건이었고, 료마도 그런 발상을 했던 사실이 드러나길 꺼려한 것인지 모른다.

■ 도사 투견장과 함께 있는 료마기념관

료마기념관에서 아래편에 도사투견장이 있다. 도사(土佐)는 고치현의 옛이름이다. 메이지 년간에 토종개인 마에다(前田犬)와 불독 그리고 불 테리어와 그레이트 데인 등 여러 종을 교배해서 만든 개가 도사견이다. 투견용으로 만들어 두려움을 모르며 공격성이 강하기 때문에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

도사 투견장

료마의 짧은 생애는 도사견처럼 치열하고 역동적이었다. 하급 무사 출신으로 막부를 타도해서 상급 무사가 지배하던 체제를 무너뜨렸다. 또 흑선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군사력과 맞서기 위해 해군 양성을 맹렬히 추구하였다. 체제를 바꾸는 혁명은 성공하였다.

그는 정권이 메이지에게 넘어간 한 달 후에 암살당한다. 극적으로 죽은 까닭에 흠잡을 것이 별로 없는 그의 삶은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메이지유신의 정치강령인 정권 환수, 의회개설, 관제개혁, 헌법제정, 군대창설, 화폐정책 등 그가 구상한 「선중팔책(船中八策)」도 찬양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요시다 쇼인이 사주한 조선 침략의 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단견은 아쉽기 짝이 없다. 서구 열강에 대항하는 힘을 이웃국가 침략에서 얻겠다는 생각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원초적인 비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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