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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드넓은 예당평야는 달려도 끝이 없다. 30분쯤 갔을까, 먼 산자락 드러나는 지평선이 눈썹처럼 가지런하다. 드문드문 허수아비는 금물결 젓는 사공 같다. 바람이 지나갈 때는 벼이삭에 층층 가르마가 트인다. 한들한들 코스모스와 둔덕의 갈대, 그리고 작은 비행기처럼 떠오르던 고추잠자리가 예쁘다. 

 가을이면 들녘에 바다가 생긴다. 멀리 수평선과 파도는 없지만 벼가 익을 때는 금빛으로 물드는 아침 바다의 풍경 어지간하다. 초록이 빠져나간 뒤 금물결로 차오르던 아득히 들녘을 보니 해루질이 생각난다. 그게 곧 물 빠진 갯벌에서 어패류를 잡는 거라면 초록물 삔 가을도 거둘 일만 남았다. 금싸라기 깻잎과 새파랗게 튀는 녹두알도 그 즈음부터 결이 삭고 익는 건 누차 보았다. 산 다랑치 비탈밭, 무논에서도 썰물 지는 갯벌에서처럼 동부와 두렁콩을 딸 수 있겠다. 가을을 캐는 해루질 물때로서는 최고다.

 이따금 보면 바닷가의 해돋이 같다. 언젠가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이 구슬을 잔뜩 산란해 놓던 그 풍경. 수평선이 물들기 시작할 때는 금빛물결 떠오르는 해오름 속의 갈매기. 들어가지 않아도 일단은 눈으로 해루질하는 기분이었다. 바닷가의 어부들처럼 캐고 줍는 건 아니었으나 물때를 기다리듯 밤새 기다렸다. 얼마 후 바닷물 속에서 머리를 쳐들던 붉은 태양이 어둠 속 태아처럼 꿈틀거린다. 진흙 뻘에서 조개잡이 같은 게 해루질이라면 금빛바다는 어둠이 빠진 뒤 드러난 진풍경이다. 직접 잡지 않고 눈으로 완상하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물 빠진 갯벌에서 조개를 잡던 날의 기억. 꽃게를 파내면 저만치 주꾸미가 보였다. 허둥지둥 달려가면 손이고 뭐고 개흙치레가 되었으나 한 마리 두 마리 늘어나는 게 재미있었다. 그나마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지쳤으니 딴에는 공교로웠다. 바닷바람은 손끝이 에이게 차고 갯벌의 진흙은 수없이 들러붙고 끈적이던 기억. 눈으로는 아름다웠던 풍경이 막상 그렇게 딴판이라니. 한낱 갯벌체험이었건만 물 따라 들어가면서 잡는 해루질은 얼마나 힘든 것일까.

 도구 역시 자질구레하게 많아서, 물속에 들어갈 때는 갈고리까지 등장한다. 특수한 지형에서는 대대적인 중무장에 밤에도 불 밝혀 일하는 걸 몰랐다. 파도소리에 잠들다가 물때 맞춰 나가는 건 참 목가적인데, 인생도 해루질이라면 시련이 수위를 넘어 힘들었던 순간이야말로 물때는 좋다. 이름 고운 해루질도 막상 들어가면 끈적이는 뻘과 소금기 품은 갯바람에 시달린다.

 들판의 금물결 역시 벌레만 생겨도 노심초사 이파리만 시들어도 거름과 퇴비를 주면서 이룬 결과다. 한편에서는 땀땀 수를 놓고 더러는 모듬모듬 휘갑치면서 훨씬 예쁘장한 깔로 드러난다. 초가을 갈피 묻어나는 만추의 서정은 드물게 고즈넉한 느낌이고 곳곳에 묻어나는 조락의 이미지도 아름다웠다. 밑단을 들추면 철새가 날아가고 기러기 발 사이로는 청옥색 하늘이 보였다.

 살 동안의 어려움도 밀물로 차오르고 썰물이 지면서 소라니 멍게를 캐는 바닷가에서처럼 아기자기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단지 주의할 것은 갯벌도 많이 드러나고 밀물 때까지 여유가 많을 경우 물 들어오는 시간을 유념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기도 한다. 많이 캘수록 재미가 나서 깜빡 잊을 경우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진다. 어렵사리 찾아온 기쁨 역시 절제하지 않으면 모처럼의 행운도 백지화된다.

 돌연 계절의 후미에서 물 삐는 소리와 툭툭 아람 버는 가을의 기척. 어둠 속 해루질로 금빛 아침 바다가 되고 가을이 또 거둘 게 최고 많은 계절이라면 행복 또한 진흙투성이 불행의 갯벌에서 조금씩 캐낸다. 행복의 뻘 치고는 푹푹 빠지는 늪이어도 원하는 건 대부분 그런 곳에 들었다. 물때가 좋은 곳은 개흙이었으나 그래서 파낼 게 많다. 힘들어도 지금은 해루질 물때라고 생각하는 삶을 그려 본다. 풍경까지 물씬 차오르는 가을 물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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