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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갈대밭에 눈이 쌓였다. 싸락눈에서 함박눈으로 커지더니 포말을 뿌려대며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다. 출근길에 보는 청미천의 눈 풍경이 그린 듯 아름답다. 계절을 덧칠하는 겨울이 일약 화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잠깐 새 바뀐 겨울의 바탕화면을 보는 것 같다. 눈이 오면 겨울 화가는 바탕을 설정한 뒤 눈꽃 핀 겨울나무와 철새를 스케치하면서 여백을 채운다. 바람이 불거나 새가 날아들 때만 눈가루가 날릴 뿐 정물화처럼 잠잠했다.

눈은 새침데기다. 엄청난 기세로 날리면서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소나무만 해도 살짝 뒤덮어서 흡사 백로가 앉은 모양새다. 촘촘한 잎이 겹겹으로 쌓인 눈에 묻힐 법하련만 군데군데 파랗게 드러난 여백의 효과는 제법 달인의 솜씨다.

귀 기울이면 겨울 특유의 음률이 쏟아진다. 얼음장 밑의 냇물처럼 눈 속을 타고 가는 멜로디였다. 이따금 배경음악의 정적을 깨는 효과음도 들린다. 눈이 쌓이면 자위가 돌고 쪼개지면서 타악기 같은 음향이 들리고 철새가 날아들 때는 물결 같은 파장이 일어났다.

고요가 끝나고 바람과 함께 눈사태로 번지면 화가에서 안무 담당으로 바뀐다. 휘파람 같은 눈보라의 지휘에 수많은 갈대가 군무에 맞춰 돌아갔다. 차분했던 풍경이 격렬해지면서 눈앞의 세상이 한꺼번에 돌아가는 듯 일시에 흔들린다.

볼 때마다 향수를 자아내는 풍경이었다. 눈을 잔뜩 쓰고 있다가 터져 나온 아우성일까. 하기야 그렇게라도 털어버리지 못했으면 죄다 꺾였을 테지.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고요가 끝나고 눈보라와 함께 펼쳐진 희대의 풍경이 무게를 덜어내는 것 같은 스케치다.

얼마 후 눈보라는 기세가 약해진다. 장중한 음악이 끝난 뒤의 차분한 느낌을 재현이나 하듯 겨울화백은 물가의 억새풀 하나를 화폭에 담았다. 보푸라기 같은 줄기에 소복소복 돋아난 서리꽃이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침묵의 땅에서 사뭇 남다르다.

문득 갈대밭 모서리에 희끗희끗 눈발이 날린다. 그리 쌓이고도 남은 게 있었는지 곧장 녹아드는 개울가의 눈이 보였다. 내리면서 쌓이는 줄 알았건만 일제히 투신하는 흰나비 떼들… 결국 떨어지면서 물 한 방울로 첨가되련만 그냥 사라질 것 같아 짠하다.

왕벚나무 가지도 눈물을 머금었다. 펄펄 날린 뒤 피어난 서리꽃이 푹해지면서 자위가 돌고 물방울이 잡혔다. 눈雪 녹은 눈물인지 수장되는 눈을 보고 흘린 눈眼물인지 모르나 쌓이는 눈만 생각해 온 내게는 꽤나 고풍스럽게 느껴진다.

군청색 하늘 아래 잔뜩 움츠린 들판과 빈 가지를 휘감는 높새바람은 차갑기만 했었다. 겨울과 함께 냇물은 얼어붙고 초록은 지워졌어도 그 자리에 재현된 눈 쌓인 풍경과 갈대밭 춤사위며 억새풀 같은 고요가 그렇게나 아름다웠을까.

멀리 도요새가 날아든다. 일부는 눈밭을 쪼고 자맥질을 할 동안 겨울 소나타는 끝났다. 폭풍 다음에 이어지는 후렴은 다름 아닌 고요와 평화다. 불러도 싫증나지 않고 부를수록 오히려 되살아나는 의미는 전개부의 긴장에서 파생된다. 갈대밭 어름에서 찍은 한컷 영상과 겨울 소나타의 주제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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