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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늦가을 화단에 백일홍이 피었다. 서리가 내린 뒤 계속 쌀쌀한데도 갓 핀 듯 선명하다. 지난 팔월 초 배추모종을 할 때부터 피기 시작했으니까 이름대로 거의 백일 동안 피는 것 같다. 안존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사촌 형님이 떠올랐다.

사촌 형님은 이웃 마을에 사는 종갓집 맏며느리였다. 아버님 형제가 아홉인데 그 중 제일 큰아버지의 며느님이었다. 얼굴이 곱고 손끝이 야무져서 의식 범절에 막힘이 없는 분이다. 마음은 또 얼마나 너그러운지 신혼 시절 나는 답답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하소연을 하는 게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용기를 돋워주고 격려해 주셨다. 형님 또한 만만치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따금 푸념이나 하듯 털어놓는 얘기를 들으면 한 타래의 실을 감는 것 같다. 시집이라고 와 보니 시어머님은 와병 중이었고 시누이 시동생은 그릇에 담은 밤톨마냥 고만고만했다지. 한 이태 병간을 한 뒤 첫 아들을 낳고 백일잔치를 했는데, 얼마 안 있어 시어머님이 딸을 낳는 바람에 산간을 했다니 지금으로서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이 모든 건 내가 오기 전 일이었지만 겪어 보니 능히 그럴 만한 성품이셨다. 명절이면 수십 명 일가가 들끓는데도 항상 웃는 얼굴이시다. 사촌 형제들까지 고향에 올 적마다 다녀가기 때문에 여간 번거롭지 않을 텐데도 마늘이며 된장 등 무엇이든 챙겨 주신다. 뵐 때마다 무던하고 후덕한 성품을 헤아렸다. 나로서는 따르기 힘든 마음자세이다.

사촌 동서라지만 나이가 많아서 어머님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렵다면 어려운 분인데 같은 경주 이씨라면서 챙기시는 바람에 친정 엄마처럼 따르고 좋아했다. 우연인지 나이도 스물네 살 차이로 띠 동갑이다. 나를 편들어 주시다가 우리 어머님과도 마찰이 생겼던 분이다. 잘잘못 이전에 중간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의도였지만 어머니로서는 고까운 일도 많았을 것이다.

마늘처럼 독해야 되고 고추보다 매워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살면서 넘어야 할 고개는 끝이 없기 때문에 주저앉지 말라면서, 친정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기 때문에 겪는다 생각하면 편할 거라고 강조했다. 갓 결혼한 내게 우리 집안은 역시 며느리가 잘 들어온다고 한 것도 우정 다독이면서 끝까지 살게 하려는 의도였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험하다는 삶의 강을 건너 온 것도 생각하면 사촌 형님 덕분이다. 나 또한 천성은 그렇다 쳐도 형님을 통해서 더욱 다부지고 꿋꿋한 기질로 바뀌면서 어려움을 이겨왔다. 철부지인 내게 삶의 지침이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소중한 분인데 그 때처럼 각별한 마음이 들질 않는다. 사는 게 조금은 수월해진 것일까.

형님은 결국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셨던 분이다. 신혼 초라서 적응이 힘들었던 탓에 신경을 써 주고 마음 아파하셨던 거다. 그렇지 않을 때도 똑같이 대해 주실 분이지만 어렵고 힘들 때 더 자주 돌아보는 성품이셨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지푸라기 하나라도 아쉬워질 만큼 힘들 때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고 싶었다. 잘 될지 모르나 우선은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야 할 것 같다. 그게 곧 남다른 후의를 베풀어 준 데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람이 뜰을 질러간다. 예쁜 중에도 늠름한 백일홍에서 얼굴도 고우셨지만 성품이 더 강인한 형님을 새삼 그려보았다. 잘 해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했는데 바쁘다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오래 살아 여차할 때는 편들어주길 바라고 있으니 투정일까. 처음 대한 게 35년 전이라고 보면 철부지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또한 형님께 대한 애정으로 보는 게 그만큼 기댈 수 있는 언덕으로 의지해 왔다. 여든이 넘으셨어도 내게는 처음 뵈었던 마흔 아홉 살 형님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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