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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엊그제 인근의 식당에 갔더니 '추억의 비비고'라는 북스가 있다. 양은도시락과 김치와 고사리와 콩나물을 곁들여 놓았다. 어릴 때처럼 김치를 깔고 나물을 넣어 렌지에 올렸다. 김을 잘게 부수고 달걀까지 고명으로 얹은 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쳐서 먹는다. 들기름도 없이 김치만 깔아 익힌 어릴 때의 도시락 비빔밥이 더 향수적이다. 연유를 모르겠다.

생각하니 추억이라는 반찬이 빠졌다. 가스레인지에서 그 때의 난로 비빔밥처럼 노릇하게 익기를 바란 것부터가 무리다. 스무 개 남짓 도시락은 워낙 많아 위에서는 뜨겁기도 전에 밑에서는 눌어붙기 직전이었다. 수업시간 도중에도 번갈아가며 뒤바꿔 놓아야 했고 옮겨놓을 동안 은근히 데워지고 특유의 맛을 연출한 셈인데 화력이 센 가스레인지에 익히면서 그 맛을 기대했다.

전통한식집이라 그런지 어릴 때 먹은 토속메뉴가 고루 갖춰져 있다. 도토리묵과 메밀묵도 석이버섯과 흑임자를 얹어 꽤나 먹음직스럽다. 밖에는 또 눈까지 환상적으로 쌓이고 있다. 음식 또한 맛보다 분위기를 탄다. 밤참을 먹다 보면 눈도 자주 내리고 도란도란 얘기는 끝도 없이 무르익었건만 지금은 교통체증 때문에 불편하다고 타박이다.

후식으로는 가래떡이 나왔다. 이제 막 떡집에서 가져 온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얼핏, 석쇠에 구운 뒤 조청을 찍어 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밤은 길고 입이 궁금해서 나온 메뉴라도 똑같아서는 곤란하다 싶었는지 어머니는 가끔 도토리묵과 수수부꾸미를 추가했다. 먹다 보면 삭풍은 누그러지고 겨울밤도 어언 새벽이 되곤 했다.

누구에게나 향수가 있다. 종일 놀다 보면 볕 발은 약해져 해름 참이 되고 밥 먹으라는 어머니 소리에 이끌려 들어갔다. 저녁을 먹고는 담요를 들쓰고 이내 잠들었다. 자치기에 사방치기에 해거름까지 놀다가 저녁만 먹으면 솜뭉치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는지 두런대는 소리에 깨 보면 온 가족이 화롯가에 앉아 비빔밥을 먹는 중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 봐야 초저녁이고 구진한 식구들을 위해 어머니가 준비하셨나 보다. 겨울밤은 길어서 저녁을 먹고도 출출해지니 밤참문화가 나올 수밖에 없고 반찬은 주로 김치였으나 뚝배기에 안친 걸 보면 100% 돌솥비빔밥이다. 언제 먹어도 맛이 있고 겨울 하면 무슨 추억이나 되는 것처럼 아련하다.

그런 비빔밥은 학교에서도 자주 먹었다. 4교시가 끝날 즈음이면 교실 안은 김치 냄새로 뒤덮인다. 등교시간에 지핀 난로가 3교시쯤에는 벌겋게 타오르고 우리는 각자 싸온 도시락을 층층이 올려놓았다.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어서 열어보면 약속이나 한 듯 김치가 들어 있고 푸푸 하고 야단스럽게 김 오르는 중이었다.

싸 올 때는 반찬통에 별도로 담은 것인데 난로에 안치면서 바닥에 깔고 밥을 얹은 게 우리 먹은 비빔밥의 원조다. 지금은 단지 50년 전 그 때를 재현하는 양은 도시락에 각종 나물을 넣고 비벼 먹으면서 달걀도 김도 없이 김치만 얹어 먹던 그 비빔밥이 훨씬 맛있었다고 투정을 부린다.

음식 맛을 좌우하는 것은 양념만이 아닌 향수와 정이었던 것일까. 게다가 어머니도 계시지 않고 형제들 모두 바쁘게 사는데 그 때의 맛을 원하는 건 가당치 않다. 난롯가에서 같이 공부했던 도시락의 주인공도 아득히 멀어졌다. 기나긴 겨울밤 함박눈처럼 쌓여가던 얘기와 지루했던 겨울을 넉넉하게 만들어 준 음식문화가 갈수록 애틋해진다.

고향의 겨울이 그리운 것은 겨울밤에 얽힌 서정과 향수 때문이고 추억의 여백에는 밤참의 기억도 오롯이 적혔다. 눈이 내릴 때는 문풍지도 침묵을 지키더니, 밤 깊어 사위던 화롯불처럼 세월 강 여울에서 잃어버린 맛을 반추해 본다. 밤참은 기억 속의 맛으로 사라진 걸까. 나로서는 잊지 못할 향수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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